책 소개
이스마엘 카다레가 ‘미크로로망(microroman, 미니어처 소설)’이라 지칭한 세 편의 단편 소설집. 최신작 ‘광기의 풍토’, ‘거만한 여자’, ‘술의 나날’이 실려 있다. 40년의 시차를 두고 쓰인 작품들은 긴 시간의 간극에도 흔들림 없이 전혀 다른 문체와 등장인물을 통해 전후 공산주의 체제 초기 알바니아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다.
목차펼치기접기
1 작은외삼촌의 자살 시도 바깥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이내 불행의 기운을 감지했다. 긴 의자는 평소와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지만 바바조*가 보이지 않았다. 의자 옆 땅바닥에는 적자색 표지의 책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코담배 갑과 한참 전에 식어버린 파이프가 팽개쳐져 있었다. 안마당 문을 미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바바조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것은 매우 드문 일이어서 바바조가 돌연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 바바조는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검정색 보르살리노*를 쓴, 그때까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바바조와 그 남자는 둘만의 대화에 몰두해 있어 내가 거기 있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낯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절대로 권총을 숨기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보르살리노를 쓴 남자가 말했다. 자살하고픈 충동을 느낄 때 손 닿는 곳에 총이 있을 때보다는 없을 때 일을 저지르기가 더 쉽다는 것이었다. 아, 그게 그런 거였군. 나는 계단을 달음질쳐 올라가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다 하마터면 2층 복도에서 작은이모와 부딪칠 뻔했다. 이모가 내 몸을 와락 껴안았다. 나로선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모가 막 울고 난 참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분명히 느껴졌다. 예쁜 여자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난 다음엔 더 예뻐 보인다는 사실을 난 이미 주목한 바 있었다. “이모가 자살하려 한 거야?” 내가 물었다. 이모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지?” “바바조가 어떤 남자와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 “내가 자살하려 한다고 아빠가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는 거야?” 나는 우물쭈물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꼭 이모 이름을 들은 건 아니야. 그러니까 말이지…… 누군가가 자살하려 한다고…… 맞아, 그 말은 들었어…… 또 총을 숨겨서는 안 된다는 말도. 총을 제자리에 두라고……” “너 미쳤구나!” 이모는 화를 내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계단 쪽으로 발길을 재촉하다 곧 뒤돌아서서 말했다.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이 멍청아! 네가 방금 전에 들었다고 생각한 건 잘못 들은 거야. 그러니까 아무한테도 이야기해서는 안 돼. 알았지? 그건 집안의 비밀이니까 이 집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 알았지?” 이모는 몹시 흥분해 계속 나를 나무라면서 말끝마다 “알았지?”라고 다짐을 주었다. 이모가 돌연 마음을 추스르지 않았더라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모는 내 귀에 입을 바싹 갖다 대더니 어느새 누그러진 목소리로 설명을 해주었다. 이모 자신도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자살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이란 다름아닌 이모의 남동생, 그러니까 내 작은외삼촌인데, 이런 일들은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모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는데 지금 이 순간 자살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라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난 이모에게 방금 전에 들은 말을 잊어버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적어도 이모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내게 말해주어야 한다고 버텼다. “난 그애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이모는 생각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짓도, 라고 잠시 후에 이모는 또 한 번 말했다. 그러고 나서도 이모는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모가 정말로 외삼촌한테 아무 짓도 안 했다는 걸 나는 간신히 납득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그것도 아주 우연히 이모가 본 것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보아서는 안 될 그것을 이모가 보고 말았던 것이다. “자, 이 정도면 됐어!” 이모가 말했다. “너한테 너무 많은 얘길 하고 말았네. 하지만 날 배신하진 않겠지, 그렇지?” 이모는 나를 껴안았다. 언제나 그렇듯 이모의 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나를 두고 멀어져가는 이모의 금발머리가 근심으로 가늘게 흔들리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폭로하고 있었다. 잠시 동안 나는 집 안을 이리저리 뒤지고 다녔지만 작은외삼촌은 어디에도 없었다. 작은외삼촌은 사람들이 ‘겨울 방’이라 부르는 방에 처박혀 지냈는데 거기서 뭘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제 나는 작은외삼촌을 향한 절대적인 경외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것 같았다! 마당에서는 큰이모가 시트를 널고 있었다. 큰이모는 비밀을 알 거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내게는 아무 말도 안 하리라는 것 또한 분명했다. 눈가가 거무스레한 검은 눈과 무엇보다 조신한 성격 때문에 큰이모는 집안의 재원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반면 작은이모는 나부끼는 금발에다 유리알처럼 박힌 눈동자와 요염하게 찢어진 눈매 탓에 집안의 온갖 심술궂은 장난기가 집약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바바조는 이제 다시 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지만 밤에나 외할아버지와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집시들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 빠져든 뒤에야 말을 걸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체제가 바뀐 건 사실이지만, 공산주의자들과 이런저런 유대를 맺고 있던 가문 덕에 바바조는 재산을 압수당한 것 말고는 달리 피해를 입지 않았다. 늘 그래 왔듯이 집시들이 행랑채에 살면서 밤이면 계속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교생인 큰외삼촌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이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만(큰외삼촌과 작은외삼촌은 겨우 한 살 터울인 데다 형제 이상으로 친해서 아침마다 함께 등교했다), 그렇다 해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큰외삼촌은 청각에 문제가 있어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별로 안 좋았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나는 큰외삼촌에게 다가가, 또 한 사람은 어디로 갔냐고 물었다. “누구 말이야?” 큰외삼촌이 물었다. “허풍선이 그 녀석?” 나는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욕설들이 큰외삼촌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입을 딱 벌린 채 듣고 있었다. 형으로서 자살이라는 어리석은 수작을 벌인 동생을 꾸짖는 건 당연하겠지만, 어쩐지 큰외삼촌의 분노는 더 심오한 무언가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았다. 큰외삼촌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내 머릿속이 흐물흐물한 덩어리로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작은외삼촌은 동정의 대상이기에 앞서(머리털이 빠지는 불운으로는 모자라 이런 어이없는 짓까지 저질렀으니 말이다) 누가 뭐래도 내숭꾼이며 못 말리는 허풍선이라는 게 큰외삼촌의 생각이었다. 큰외삼촌은 자살마저도 남의 시선을 끌기 위한 수단쯤으로 여기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두 외삼촌을 똑같이 좋아했다. 둘 다 마음에 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의 걸음걸이, 머리에 쓴 교모, 각자의 방을 가득 채운 책들이 그랬고, 라틴어 수업 때 배운 것을 둘이 함께 복습하는 모습이 그랬고,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듣도록 라틴어로 말을 주고받을 때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도미누스, 템플룸, 인 엑스텐소……* 같은 말들을. 이처럼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두 사람에게 똑같은 애정을 쏟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땐 큰외삼촌이, 또 어느 땐 작은외삼촌이 더 신비로워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얼마 전 큰외삼촌이 귀 수술을 받은 뒤 머리를 붕대로 싸맨 채 집 안을 맴돌고 있었을 때는 큰외삼촌이 내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자신의 광채가 바랬음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또 예전의 위상을 되찾을 방법은 자살밖에 없다는 듯, 작은외삼촌이 권총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그후 큰외삼촌은 바바메토 의사에게 두개골 절개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돌아가야만 했는데, 큰외삼촌에게 그것 말고는 다른 해결책이 없었다. 그 이후로는 모든 게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심술기 번득이는 눈으로 큰외삼촌은 알아듣기 힘든 말들을 쉴 새 없이 뇌까렸다. 무시무시한 비밀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아아아, 루브르의 신비, 에에…… 난 그런 말을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아 괴로운 심정으로 그 방을 나왔다. 층계를 내려가려는데 위에서 큰외삼촌이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그렇고, 이런 말 아무에게도 한마디도 하면 안 돼!” 이상한 일이었다. 그동안은 매사에 서로 다른 견해…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리뷰 남기기
로그인하면 리뷰를 남길 수 있어요.
리뷰 0개
아직 리뷰가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