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책머리에 영문학과 역사적 상상력 르네상스시대의 인문주의자 필립 시드니(Philip Sidney)는 ??시의 옹호??(The Defense of Poesy)에서 문학이 역사보다 우월한 글쓰기임을 피력한 바 있다. 역사는 파편적이고 우연적인 반면, 문학은 보편적인 가치를 재현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이상적인 것을 동경하고 추구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물론, 보편적인 가치나 명제를 본격적으로 추구하는 학문으로 철학이나 형이상학을 꼽을 수도 있겠으나, 시드니의 경우에, 시넓게 보아서 오늘날의 문학는 보편과 구체의 학문을 대표하는 철학과 역사의 적절한 균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학문보다 우월한 영역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후기구조주의, 해체비평, 신역사주의, 탈식민주의 등과 같은 일련의 문학비평이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풍미하면서 인문학계에 있어서 문학과 역사에 대한 통념은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보다는 다분히 의문시되었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으로 문학이 추구한다고 믿었던 인문주의적인 가치, 미적인 질서, 유토피아적 비전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허구이거나, 특정 집단의 이해 혹은 권력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기제로 비쳐지기 시작하였다. 문학 텍스트는 더 이상 우리가 우러러보며 존경을 표하는 정전이 아니라, 은연중에 권력의 기제로 봉사하고 있으며, 문학이 승인하는 윤리적 가치나 미적인 질서 역시 보편적이기보다는 특정한 이해나 가치 혹은 집단과 결부되어 있으므로, 문학텍스트는 이런 사실들을 증명하는 사례들(case histories)이라는 것이 요즘 비평의 대체적인 논지다. 새로운 인식의 패러다임 변화와 함께, 역사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다. 역사학자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가 지적하듯, 이제 역사란 단순한 사실들(facts)의 나열이나 제시가 아니라, 문학과 마찬가지로, 비유와 은유를 사용하는 언어구조물로, 문체의 선택, 어휘 혹은 문장 배열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가는 담론(discourse)의 구성물로 정의되고 있다. 이에 따라서, 문학과 역사를 구별하는 오래된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이 두 인문학분야간의 대화와 소통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영문학계의 현재 상황이자 추세다. 앞에서 지적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주류로 자리 잡은 현 상황에서, ‘역사와 문학’이라는 주제로 엮인 이 논문집은 이런 현대 비평의 패러다임 변화와 맥락을 같이한다. 더구나, ‘여홍상 교수 회갑기념 논문집’으로는 이보다 적절한 주제도 없을 것이다. 그는 1994년에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부임하면서부터 줄곧 ‘역사와 문학의 경계 허물기’를 강조해온 분이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당시만 해도 비교적 생소했던 신역사주의자들, 가령,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제롬 머갠(Jerome McGann) 등의 학문적 업적들을 강단과 학계에서 적극적으로 소개하셨고, 그들의 학문적 성과를 한국 영문학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맞게 수용하고 발전시키는 데 꾸준한 노력을 경주하고 계신 분으로서, 특히 바흐친의 문학이론과 문화이론을 국내에 정착시킨 장본인이 바로 여홍상 교수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 못할 참으로 대단한 업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겠다. 이 책은 여홍상 교수의 회갑을 축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간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면서 귀한 사랑, 소중한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 혹은 지인들이 다시 한 번 스승과 더불어 ‘아름다웠던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즐겁게 마지막 과제를 해보자’는 취지로, 글을 통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기어이 결실을 맺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주 귀하디귀한 열매다. 이를 계기로, 제자들 역시, 여홍상 교수의 최대화두, ‘문학과 역사’라는 주제를 다시금 되짚어보고 성찰의 시간을 가져본 참으로 귀하고 뜻 깊은 시간이었다. 이 책에 논문을 기고한 연구진들은 모두 여홍상 교수의 지도하에 학위논문을 썼거나, 대학원 세미나 혹은 학회 등을 통해서 학문적인 인연을 맺고 쌓아온 사람들이다. 따라서 여홍상 교수가 신역사주의적인 관점에서 소개한 ‘문학과 역사’라는 주제의식이 마땅히 이들의 지적성장과 학문적 경력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다양하게 분화되고 발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화와 발전 과정에서 문학비평의 새로운 전망이 탄생한다.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은 신역사주의적인 비평 틀에 안주하지 않고,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 같은 새로운 문학적 기류 혹은 정신을 포용할 뿐만 아니라, 주제비평, 정신분석학과 역사비평의 화해처럼, 기존 비평 틀들의 발전적인 통합도 시도하고 있다. 이미 새로운 전망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다양한 관점과 접근방식으로 맺은 이 열매가 모쪼록 달콤한 향기를 풍기어 더욱 새롭고 향긋한 열매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 책에 실린 귀한 글들의 내용을, 각 논문이 일차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학작품의 연대순에 따라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머리말을 갈무리하겠다. 먼저, 최재민의 논문(“Puritan and Anti-theatricalism in Early Modern England”)은 청교도들이 문학, 특히 연극을 혐오했다는 추정에 맞서, 청교도주의자 존 폭스(John Fox)의 ??교회행정과 영웅적 인물들??(Acts and Monuments),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벤 존슨(Ben Jonson)의 문학작품 등을 통해서 르네상스시기 영국청교도들의 문학 혹은 연극에 대한 유연한 태도와 자세를 밝히고자 한다. 김천봉의 ???서정민요??와 워즈워스, 공감의 시학, 그리고 녹색기억?은 흔히 낭만주의 문학의 효시로 간주되는 ??서정민요?? 초판부터 4판까지의 출간과정을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전성기’에 연계하여 살펴보고, 워즈워스 시의 특징을 ‘공감의 시학’과 ‘녹색기억’으로 규정, 1798년 초판의 내용을 중심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박우식의 ?코울리지의 유토피아적 비전: ??노수부의 노래??와 항해공동체?는 사무엘 테일러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노수부의 노래??(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에 그려진 공동체의 항해과정에서 노예제도(무역)의 암시성을 발견하고 이상적 정치 공동체의 모습을 추적한다. 기독교 천년왕국 도래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고 만민동권정체의 실현계획도 실패하자, 코울리지는 문학작품을 통해 그런 유토피아적 비전을 재현했다는 것이 이 논문의 요지다. 전범수의 논문(“Reading Poems in Their ‘Place’: Romantic Collection, Versions, and Self-Fashioning in Coleridge’s Fears in Solitude”)은 코울리지의 팸플릿 ??은둔 속의 근심??(Fears in Solitude)에 수록된 작품들의 여러 수정본들을 비교한다. ?한밤의 서리?(“Frost at Midnight”) 등 이른바 “대화시”(conversation poems)가 표면적으로는 강력한 감정의 자연발생적인 넘쳐흐름이나 그 상실감을 주제화하는데 반해, 이 논문은 코울리지의 “명상적 서정시”가 역설적으로 수반하는 텍스트 자체의 변동성(instability)을 분석하고, 작품과 장르의 의미를 물적 형식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텍스트 연구(textual studies)적인 문제 제기가 낭만시 연구에 유효함을 밝힌다. 그리고 이 논문집의 주인공 여홍상 교수의 ?배릿 브라우닝의 ‘저주’의 시학과 여성시인?에 따르면, 빅토리아조의 대표적 여성시인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Elizabeth Barret Browning)은 ?필그림 곶의 도망노예?(“The Runaway Slave at the Pilgrim’s Point”)와 ?한 나라에 대한 저주?(“A Curse for a Nation”)에서 노예제 문제를 신생국 미국에 내린 ‘저주’로 보고, 이를 여성흑인노예 혹은 여성 선지자시인의 입장에서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한다. 브라우닝은 다른 사회적 저항 시에서 다루고 있는 근대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처한 다양한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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