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시인의 말 저녁이다. 시간은 알 수 없다. 먼길 해남 땅끝地末이 지척인 곳, 한 시대와 불화한 시인의 생가에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는 우리가 잊고 산 시인이다. 물론 그 시인은 지상에 안 계신다. 그의 부재가 근래 우리 문단에 횡행하고 있는 탈민족주의 문학의 평안이었다면 시인이 온몸으로 노래했던 “조국은 하나다”라는 슬로건은 조롱받아 마땅하리라. 이 비루한 문학현실이 너무 아프다. 대저 시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이 땅에서 시인이라고 부름 받은 것은 또한 무엇이겠는가라고 심각하게 의문하는 이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내 무능이 시업에 도저하지 못하였기에 답할 길이 없다. 돌아보면 지나온 길이 간곡해질 때가 많이 있다. 내가 아직 세상의 법도를 모르면서 함부로 썼던, 1980년대 불의 시대를 지켜본 시편이 꽤 있어 이 시집을 읽는 독자 중에서 혹여 불편한 심기를 가질 수도 있을 거라 생각된다. 게으른 산행은 산의 마음과 한몸이 되는 행복한 산행이 되지만 내 게으른 시업은 실패였기에 실패한 시업을 탄하며 이 시집을 세상에 내놓은 비감 또한 자못 크다. 일찍이 추사 김정희 선생이 갈파했던가. 마천십연磨穿十硏 독진천호禿盡千毫라고 했던가. 한 사람이 있어 평생 글 쓰는 것에 뜻을 두었다면 적어도 먹을 갈아 벼루 열 개 정도는 바닥을 맞뚫어야 하고, 아울러 붓 일천 자루 정도는 소진시켜 티끌로 남기는 일이 큰붓의 마땅한 도리라는 말씀에 그저 무릎을 꿇을 따름이다. 그렇다. 나는 시라는 이름의 깨끗한 이슬 한 방울로 아직 흙 한줌 적셔주지 못했다. 그러나 순결한 시의 씨앗으로 어머니 대지에 지극한 생명을 모시고 싶은 꿈은 여여하다. 끝으로 문단 데뷔 이후 내 미욱한 시의 성실한 독자이자, 생의 도반인 수경 임은희와 딸 헤림이, 아들 승옥이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아울러 어려운 출판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을 펴내준 방남수 대표를 비롯한 화남출판사 식구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밤이다. 시간은 알 수 없었다. 2008년 여강에서 가을을 보내며 홍일선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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