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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의 철학 이야기 2

일하는 사람의 철학 이야기 2

김세준 (지은이), 소희 (그림)

615(육일오)·2013-12-24

  • 237쪽
  • 철학
  • KDC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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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한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의 철학에 의해 결정된다. 철학이 ‘개똥’이면 삶도 ‘개똥’이 되어 버린다. 그릇된 철학은 그릇된 삶을 낳고 참된 철학은 참된 삶을 낳는다. 철학의 빈곤은 삶의 빈곤을 낳는다. 이 책은 삶의 좌표를 잃고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 보다 나은 삶과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이들에게 작은 희망의 근거가 될 것이다.

목차펼치기

1장 세계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가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복잡성이 나타났다. 이것이야말로 인류 역사가 다른 유기체의 역사와 다른 이유이다.” 1. 지구 위에 위대한 존재가 있다 사람으로의 전환 지구에 위대한 존재가 있다. 그는 기차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는 팔이 있다. 그는 하루에 수 천 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는 발이 있다. 그는 새들보다 더 높게 구름 위를 나는 날개가 있다. 그는 물고기보다 더 잘 헤엄칠 수 있는 지느러미가 있다. 그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이 있고, 다른 대륙에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 그는 산을 뚫고 폭포를 멈추게 하는 힘이 있다. 그는 땅의 모습을 바꾸고 숲을 키우고 바다와 바다를 잇고 사막을 적신다. 그 거인은 누구일까? 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같은 질문은 소련(러시아)의 작가 미하일 일리인Mikhail Ilyin의 《사람은 어떻게 거인이 되었는가?How man became a giant》라는 책의 서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어렵지 않게 이 수수께끼의 정답을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사람이다. 일리인은 사람을 “거인”, “위대한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그의 지적처럼 지구 위에 아니 세계 어디에도 사람보다 뛰어난 존재는 없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빠른 동물이라는 치타도 사람보다 빠를 수 없고 가장 높이 난다는 도요새도 사람보다 높이 날 수는 없으며 그 어떤 물고기도 사람보다 더 깊게 헤엄칠 수는 없습니다. 세계에서 사람의 경쟁자는 오직 사람뿐입니다. 그러나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와 곰의 영혼 따위를 더 두려워했습니다. 오랫동안 세계를 창조하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그 무엇(신, 절대이념, 세계정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이 있다고 믿어 왔습니다. 사람은 “위대한 존재”이지만 아직은 자신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 “위대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많은 철학자들이 사람을 철학하기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4대 성인”(공자, 석가모니, 예수, 소크라테스)으로 일컫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혹은 있는) 사상가들은 모두가 사람에 대한 질문과 그 답을 자기의 철학적 알맹이로 삼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신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 즉 자연현상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 “온 세상에 오직 나만이 존재한다.”天上天下 唯我獨尊은 도발적인 철학적 문제제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일화를 있는 그대로 믿기 힘들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일생동안 생로병사, 즉 사람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공자 역시 “사람도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느냐?”며 죽을 때까지 인仁, 즉 “사람다움”仁者人也을 추구했습니다. 예수는 사람의 죄를 사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4대 성인”들의 철학적 화두는 모두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상가들이 수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성인으로 받들어지는 이유는 인류 사상사에 남긴 그들의 뚜렷한 흔적과 거대한 발자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류 사상사에 남긴 그들의 발자취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문제의 중심”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인류의 생각을 사람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사람으로의 전환’은 그들의 가장 큰 철학적 공적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찾았다고 믿었을 뿐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사람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을까요? 사람으로의 철학적 중심 이동은 시대를 앞서가는 탁월한 선택이었지만 그들은 객관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 문제에 대한 과학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계급사회에 갇힌 그들의 편협한 사고는 그들로 하여금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볼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인류가 영원히 기억할만한 뛰어난 사상가들이었지만 시대적, 계급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건 겸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사람의 능력과 가치를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사람은 자연을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은 철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결국 사람의 능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불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안다.”라는 말을 즐겨 썼습니다. 사람이 알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고 사람은 신이 창조한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본질이 “무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는 석가모니의 선언도 사람의 가치를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며 사람 내면의 깨달음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신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깨우쳐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하지만 세계는 모든 것이 변화하며 고정된 실체가 없고 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주관관념론에 빠져 사람을 공허한 내면의 세계에 가둬 버렸습니다. 공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몸을 죽여서라도 사람다움을 이룬다.”며 인을 강조했지만 사람다움이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관념론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도덕수양”을 통해 “대동사회”(사람다움이 실현된 이상사회)를 이루려는 망상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도덕수양”에 전념할 수 있는 지배계급을 군자君子로 찬양하고 육체노동을 경멸했으며 육체노동을 하는 민중들을 소인小人, 즉 사람답지 않은 존재로 무시하였습니다. 그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이른바 을 주장하며 계급사회의 신분질서를 옹호하였습니다. 예수는 “너희들 중 죄 없는 자, 이 여인을 돌로 쳐라!”라며 신 앞에서 만민의 평등과 사랑을 가르쳤지만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의 해방사상은 결국 중세 유럽의 계급질서를 지탱하는 사상적 기둥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고대 사상가들의 철학적 중심 이동은 탈레스의 ‘이성적 사고’에 비견될만한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관념의 세계에서는 결코 사람의 본질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단지 사람으로의 철학적 중심 이동만으로는 결코 사람과 세계에 대한 과학적인 해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천상에 대한 사람의 관심이 특정한 사회역사적 조건에서 천동설을 낳은 것처럼 사람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류의 이성이 과학의 토대 위에 올라서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자연에 대해 알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지만 객관세계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사람에 대해서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람도 다른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객관세계, 즉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객관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없는 사람으로의 철학적 전환은 사람을 오직 신과 관념세계에 밀어 넣을 뿐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고대 사상가들은 하나같이 사람을 ‘운명의 천동설’ 안에 가둬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오히려 봉건적 신분질서를 지탱하는 사상적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구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 즉 사람을 옭아 메는 관념의 사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철학 발전의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중세 사람들이 천동설을 믿은 것은 종교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세계에 대한 사람의 인식 수준이 낮았기 때문입니다. 최초로 지동설을 발견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이지만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아리스타코스Aristacos였습니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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