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세월의 두께가 느껴지면서 인연을 아끼게 된다. 더 나아가기에는 힘이 부친 이유도 있다. 그간의 각수연구를 모아 책으로 내는 것도 그런 의미이다. 의욕이 넘칠 법한 나이에 동국대 원서를 사러 간 적이 있다. 출가를 염두에 두고 사전에 불교학을 전공해볼까 하는 심사였는데, 세상이 달리 보여서 그만 두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 모자란 것은 용기가 아니었다. 정성이었다. 책을 전공하고 나서 그 대학과 인연이 닿았다. 4년을 불교문화에 젖어 살면서 어느 때보다 소중한 경험을 했다. 지혜와 여유를 아는 사람과의 만남은 행운이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 때 각수를 처음 접하였는데, 이 책은 그 인연의 또 다른 결실이다. 지금 재직 중인 대학에서 기록관련 교과목을 강의하면서 우리의 기록유산인 의궤들을 뒤적이게 되었고, 다시 각수를 접했다. 사찰이 아닌 도감의 관점에서 보는 각수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떠나는 답사처럼 설레는 마음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뒤돌아보면 연구자는 결과에 따른 보람보다는 그 과정에서의 중독으로 끈을 이어가는 듯하다. 각수라는 직업으로 생계를 꾸린 이들이 조선 오백년에 몇이나 될지 모른다. 수천을 넘어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각수의 이름을 일부 지면에 올린데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미안하고, 언젠가 다시 그들의 사연을 접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운흥사의 발원각승 연희, 환속해서 각수로 활동한 단성현의 오국량, 조선을 좁게 여긴 조영, 교서관의 이시태와 권치대, 유생 박동명, 선수 이수일 형제, 김여립과 학순, 전영성의 애환, 책판이건 옥책이건 지석이건 글자를 남긴 박영남, 그 몇몇 각수의 이름이나마 몇 줄 써내려간 걸 큰 위안으로 삼는다. 송광사 사천왕상 복장유물에 적힌 각수 이름을 내려다보며 두어 달을 지낸 적이 있다. 기록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식견과 상상력의 부족을 여실히 느꼈다. 벽에 부딪힐 때마다 실감하는 바다. 당초 주어진 임무는 아니었지만, 어느 날 문득 각수들의 스타일이 보이자 저절로 긴 한숨이 나왔다. 한두 줄의 결론을 남겼지만, 더없이 즐거웠던 기억이다. 각수는 박사학위 주제이다. 독서와 출판의 관계를 밝혀보고자 했다가 은사 고산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불교학자료실에서 조사한 자료에 살을 보탠 것이 벌써 이십년이 지났다. 부족한 재주에 이쪽저쪽 곁눈질을 하다 보니 그간 서너 줄의 결론을 더했을 뿐이다. 하루가 간다. 또 하루가 가고, 가끔은 잊고 지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사람으로 태어나 이름을 남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만 기억하는 이에게 위로가 될 뿐이다. 이 책 또한 그렇다. 각수를 떠올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다행이다. 2013. 1. 31.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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