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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존 손베리 (지은이), 김기찬 (옮긴이)

크리스챤다이제스트·2005-12-20

  • 종교
  • KDC 235.6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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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존 손베리 김기찬 옮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머리말 1.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출생과 초창기 생활(1718-38) 2. 회심(1738-39) 3. 대학 시절(1839-42) 4. 중간에 생긴 일:선교 활동을 위한 준비 (1742-43) 5. 코노미크(1743-44) 6. 델라웨어의 전진기지들(1744-45) 7. 크로스윅숭(Crossweeksung, 1745) 8. 계속되는 크로스윅숭 생활 (1745-46) 9. 크랜베리(Cranberry, 1746-47) 10. 서스퀴한나 시절(1744-46) 11. 계속되는 서스퀴한나 생활(1746) 12. 선교 보고서 13. 인생의 말기에 접어듦(1746-47) 14. 마지막 날들과 죽음(1747) 15.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성품에 대한 한 가지 평가 머리말 오늘날 뉴잉글랜드 지역의 주들은 250년 전에는 대부분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했다. 영국의 문화가 이식된 식민지 도시들이 대서양 해변과 내지 수로를 따라 따로따로 흩어져서 번창하고 있었고, 이 정착지 사이에는 널찍한 황야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백인치고 이 황야의 아름다움과 위험을 맛본 사람은 드물었다. 오늘날은 고속도로와 철도가 여기저기 마구 뻗어 있는 산업 중심지를 핏줄처럼 잇고 있는 그곳이지만, 당시에는 강과 하천만이 골짜기를 누볐고 개척자가 울창한 언덕들을 헤집고 다니던 곳이다. 오늘날은 농장들과 집들이 언덕 중턱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지만, 그때는 황소가 밭 가는 고요한 자연이 있었다. 지금은 아이들이 뛰놀며 가축들이 풀을 뜯고 있지만, 그때는 늑대와 사슴이 한가로이 돌아다녔다. 인적 드문 이 땅의 거주민은 토착 부족민, 즉 아메리카 인디언들뿐이었다. 시간이 시작된 이래로 그들보다 뒤처지고 비참하고 이교에 물들어 있는 민족도 드물었다. 정치적으로 인디언들은 민족적 유대나 군사적 유대가 없었다. 경제적으로는 비참하게 생계를 꾸려가려고 아주 원시적인 수단을 사용했다. 그들의 사회적 관행은 지극히 야만적이었다. 종교적으로는 괴상한 미신과 귀신 숭배가 판을 치는 무서운 무지에 젖어 있었다. 16세기부터 아주 문명화한 사람들이 그들의 해안에 닿은 후에 그들의 경계 안으로 옮겨갔을 때, 이 미개한 야만인들에게 자비를 보여 어느 정도 그들의 야만을 억제하였을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지만, 처음부터 인디언들은 유럽인 이웃으로부터 배반과 학대 외에는 별로 경험한 바가 없었다. 사실 인디언들이 접촉하게 된 ‘그리스도인’인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인디언들에게 읽기보다는 총쏘기를 가르치고 기도보다는 술을 가르쳤다. 기독교가 말하는 정직의 원리들을 인디언들의 마음에 집어넣기는커녕 그들을 속여 모피와 보석을 빼앗았고, 그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기보다는 고향 땅에서 그들을 짐승 내몰듯 내몰았다. 다행히도 주목할 만한 예외들이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함을 깨닫고 그들을 영적인 흑암에서 세상의 참빛(the Light of the world)으로 이끌려고 했던 것이다. 이 예외적인 인물 가운데서도 가장 영웅적인 인물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를 이제 우리는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먼저, 그보다 앞서는 한 사람에 대하여 한 마디만 하도록 하겠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회심시키는 데 첫번째로 지대한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17세기 중반의 존 엘리엇(1604-90)이었다. 영국 허트퍼드셔(Hertfordshire) 태생인 이 학자는 1631년 매사추세츠 록스베리(Roxbury)에 있는 한 장로교회 목회자로 임명을 받고 미국으로 이사했다. 지칠 줄 모르고 일했던 엘리엇은 목회를 하면서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신구약 성경을 모히칸족 방언으로 번역하고 인디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영어로 된 신학책을 서너 권 출판했고, 그들을 위하여 영어 문법책과 입문서를 편집하기도 했다. 엘리엇은 죽기 전에, 야만인들 가운데서 신자가 꽤 많은 교회를 만들었다. 어떤 점에서 브레이너드의 노력은 뛰어난 그 선배의 노력보다 뜻깊다고 볼 수 없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브레이너드의 활동 기간은 훨씬 짧았다. 엘리엇은 반세기를 활동했지만, 브레이너드는 4년밖에 하지 않았다. 게다가 브레이너드는 엘리엇과는 달리 인디언 언어로 번역을 하거나 책을 출판하는 일처럼 학문적인 기여를 한 적이 없었다. 또한 각자가 일구어낸 회심자의 수만 놓고 보더라도 브레이너드가 일구어낸 성과는 엘리엇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뒤에서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보면 드러나겠지만, 다른 점에서 브레이너드의 활동은 록스베리 목회자의 활동이 보이지 않게 할 정도로 영광스러울 뿐만 아니라 기라성 같은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밝게 빛난다. _1_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출생과 초창기 생활(1718-38) 헤즈키아(Hezekiah) 브레이너드와 도로시(Dorothy) 브레이너드의 셋째 아들인 데이비드는 1718년 4월 21일 뉴헤이번에서 북동쪽으로 25마일 떨어진 코네티컷 강 옆 여울목에 자리잡은 조용하고 자그마한 식민지 마을 코네티컷의 해덤(Haddam)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家系)가 재미있고 그의 가족 관계가 그의 활동과 관련되어 중요하므로, 장차 그가 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그 배경을 잠시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편집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그의 아버지는 영국 왕에게 임명을 받은 코네티컷의 한 시의원이었다고 말한다. 헤즈키아 브레이너드의 아버지는 치안판사이며 해덤 교회의 집사인 대니얼 브레이너드였다. 우리의 연구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좀 더 인상적인 점은 브레이너드의 모계이다. 브레이너드의 외고조부 피터 호바트(Peter Hobart) 목사는 노퍽(Norfolk) 주 힝엄(Hingham)에서 한때 교회를 맡았던 청교도 사역자였지만, 박해 시절 동안 그는 대서양을 건너가 남은 생애를 아메리카 대륙에서 전도하며 보냈다. 호바트에게는 아들이 다섯 있었는데, 그 중 네 아들이 설교자였고, 그 중에 브레이너드의 할아버지 제레미야가 있었다. 제레미야 호바트는, 처음에는 링컨셔(Lincolnshire)에 있는 보스턴에서, 후에는 매사추세츠의 린에서 사역한 새뮤얼 휘팅(Samuel Whiting) 목사의 딸과 결혼했다. 이들에게서 난 도로시는 헤즈키아의 아내가 되어 호바트와 휘팅과 브레이너드의 가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선조들이 갖고 있던 종교적 성향은 브레이너드의 가정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헤즈키아와 도로시 브레이너드의 다섯 아들 가운데서 넷, 즉 느헤미야, 존, 이스마엘, 그리고 데이비드가 복음을 전하는 데 생애를 바쳤다. 느헤미야는 코네티컷 이스트베리에서 사역했지만 27살 나이에 폐렴으로 일찍 죽었다. 이스마엘은 6년 후에 예일에서 공부하다가 죽었고, 인디언 선교사로 데이비드를 이은 존은 61세 생일을 지내고 난 다음 오래 전에 죽은 형제들과 함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이어받은 종교적 전통은 종교개혁 이후로 영국에서 발전했고 미국으로 옮아갔을 때도 원래의 힘을 고스란히 간직했던 청교도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주된 정보원(情報源)인 그의 일기에 언급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브레이너드의 초창기 시절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한다. 데이비드가 8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죽은 것 외에는 겉으로 드러난 상황을 봐서는 그에게 중요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젊은날의 영적 체험에 더 관심이 간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흡족한 결과를 보는데, 그의 초창기 생활 이야기에 나타나는 첫번째 사건을 보면 이 일기를 쓴 저자가 젊었을 때부터 ‘생각이 좀 많고 우울해했던’ 것을 우리는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적인 전력(前歷)에 대한 브레이너드의 첫번째 언급은 의미심장하고 사실상 예언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그의 생애는 29년 동안 줄곧 두드러지는 두 가지 성격, 곧 엄격하고 생각이 깊은 성격과 극단적인 우울증 경향에 비추어 볼 때에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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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존 손베리 김기찬 옮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머리말 1.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출생과 초창기 생활(1718-38) 2. 회심(1738-39) 3. 대학 시절(1839-42) 4. 중간에 생긴 일:선교 활동을 위한 준비 (1742-43) 5. 코노미크(1743-44) 6. 델라웨어의 전진기지들(1744-45) 7. 크로스윅숭(Crossweeksung, 1745) 8. 계속되는 크로스윅숭 생활 (1745-46) 9. 크랜베리(Cranberry, 1746-47) 10. 서스퀴한나 시절(1744-46) 11. 계속되는 서스퀴한나 생활(1746) 12. 선교 보고서 13. 인생의 말기에 접어듦(1746-47) 14. 마지막 날들과 죽음(1747) 15.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성품에 대한 한 가지 평가 머리말 오늘날 뉴잉글랜드 지역의 주들은 250년 전에는 대부분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했다. 영국의 문화가 이식된 식민지 도시들이 대서양 해변과 내지 수로를 따라 따로따로 흩어져서 번창하고 있었고, 이 정착지 사이에는 널찍한 황야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백인치고 이 황야의 아름다움과 위험을 맛본 사람은 드물었다. 오늘날은 고속도로와 철도가 여기저기 마구 뻗어 있는 산업 중심지를 핏줄처럼 잇고 있는 그곳이지만, 당시에는 강과 하천만이 골짜기를 누볐고 개척자가 울창한 언덕들을 헤집고 다니던 곳이다. 오늘날은 농장들과 집들이 언덕 중턱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지만, 그때는 황소가 밭 가는 고요한 자연이 있었다. 지금은 아이들이 뛰놀며 가축들이 풀을 뜯고 있지만, 그때는 늑대와 사슴이 한가로이 돌아다녔다. 인적 드문 이 땅의 거주민은 토착 부족민, 즉 아메리카 인디언들뿐이었다. 시간이 시작된 이래로 그들보다 뒤처지고 비참하고 이교에 물들어 있는 민족도 드물었다. 정치적으로 인디언들은 민족적 유대나 군사적 유대가 없었다. 경제적으로는 비참하게 생계를 꾸려가려고 아주 원시적인 수단을 사용했다. 그들의 사회적 관행은 지극히 야만적이었다. 종교적으로는 괴상한 미신과 귀신 숭배가 판을 치는 무서운 무지에 젖어 있었다. 16세기부터 아주 문명화한 사람들이 그들의 해안에 닿은 후에 그들의 경계 안으로 옮겨갔을 때, 이 미개한 야만인들에게 자비를 보여 어느 정도 그들의 야만을 억제하였을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지만, 처음부터 인디언들은 유럽인 이웃으로부터 배반과 학대 외에는 별로 경험한 바가 없었다. 사실 인디언들이 접촉하게 된 ‘그리스도인’인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인디언들에게 읽기보다는 총쏘기를 가르치고 기도보다는 술을 가르쳤다. 기독교가 말하는 정직의 원리들을 인디언들의 마음에 집어넣기는커녕 그들을 속여 모피와 보석을 빼앗았고, 그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기보다는 고향 땅에서 그들을 짐승 내몰듯 내몰았다. 다행히도 주목할 만한 예외들이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함을 깨닫고 그들을 영적인 흑암에서 세상의 참빛(the Light of the world)으로 이끌려고 했던 것이다. 이 예외적인 인물 가운데서도 가장 영웅적인 인물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를 이제 우리는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먼저, 그보다 앞서는 한 사람에 대하여 한 마디만 하도록 하겠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회심시키는 데 첫번째로 지대한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17세기 중반의 존 엘리엇(1604-90)이었다. 영국 허트퍼드셔(Hertfordshire) 태생인 이 학자는 1631년 매사추세츠 록스베리(Roxbury)에 있는 한 장로교회 목회자로 임명을 받고 미국으로 이사했다. 지칠 줄 모르고 일했던 엘리엇은 목회를 하면서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신구약 성경을 모히칸족 방언으로 번역하고 인디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영어로 된 신학책을 서너 권 출판했고, 그들을 위하여 영어 문법책과 입문서를 편집하기도 했다. 엘리엇은 죽기 전에, 야만인들 가운데서 신자가 꽤 많은 교회를 만들었다. 어떤 점에서 브레이너드의 노력은 뛰어난 그 선배의 노력보다 뜻깊다고 볼 수 없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브레이너드의 활동 기간은 훨씬 짧았다. 엘리엇은 반세기를 활동했지만, 브레이너드는 4년밖에 하지 않았다. 게다가 브레이너드는 엘리엇과는 달리 인디언 언어로 번역을 하거나 책을 출판하는 일처럼 학문적인 기여를 한 적이 없었다. 또한 각자가 일구어낸 회심자의 수만 놓고 보더라도 브레이너드가 일구어낸 성과는 엘리엇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뒤에서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보면 드러나겠지만, 다른 점에서 브레이너드의 활동은 록스베리 목회자의 활동이 보이지 않게 할 정도로 영광스러울 뿐만 아니라 기라성 같은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밝게 빛난다. _1_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출생과 초창기 생활(1718-38) 헤즈키아(Hezekiah) 브레이너드와 도로시(Dorothy) 브레이너드의 셋째 아들인 데이비드는 1718년 4월 21일 뉴헤이번에서 북동쪽으로 25마일 떨어진 코네티컷 강 옆 여울목에 자리잡은 조용하고 자그마한 식민지 마을 코네티컷의 해덤(Haddam)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家系)가 재미있고 그의 가족 관계가 그의 활동과 관련되어 중요하므로, 장차 그가 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그 배경을 잠시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편집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그의 아버지는 영국 왕에게 임명을 받은 코네티컷의 한 시의원이었다고 말한다. 헤즈키아 브레이너드의 아버지는 치안판사이며 해덤 교회의 집사인 대니얼 브레이너드였다. 우리의 연구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좀 더 인상적인 점은 브레이너드의 모계이다. 브레이너드의 외고조부 피터 호바트(Peter Hobart) 목사는 노퍽(Norfolk) 주 힝엄(Hingham)에서 한때 교회를 맡았던 청교도 사역자였지만, 박해 시절 동안 그는 대서양을 건너가 남은 생애를 아메리카 대륙에서 전도하며 보냈다. 호바트에게는 아들이 다섯 있었는데, 그 중 네 아들이 설교자였고, 그 중에 브레이너드의 할아버지 제레미야가 있었다. 제레미야 호바트는, 처음에는 링컨셔(Lincolnshire)에 있는 보스턴에서, 후에는 매사추세츠의 린에서 사역한 새뮤얼 휘팅(Samuel Whiting) 목사의 딸과 결혼했다. 이들에게서 난 도로시는 헤즈키아의 아내가 되어 호바트와 휘팅과 브레이너드의 가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선조들이 갖고 있던 종교적 성향은 브레이너드의 가정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헤즈키아와 도로시 브레이너드의 다섯 아들 가운데서 넷, 즉 느헤미야, 존, 이스마엘, 그리고 데이비드가 복음을 전하는 데 생애를 바쳤다. 느헤미야는 코네티컷 이스트베리에서 사역했지만 27살 나이에 폐렴으로 일찍 죽었다. 이스마엘은 6년 후에 예일에서 공부하다가 죽었고, 인디언 선교사로 데이비드를 이은 존은 61세 생일을 지내고 난 다음 오래 전에 죽은 형제들과 함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이어받은 종교적 전통은 종교개혁 이후로 영국에서 발전했고 미국으로 옮아갔을 때도 원래의 힘을 고스란히 간직했던 청교도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주된 정보원(情報源)인 그의 일기에 언급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브레이너드의 초창기 시절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한다. 데이비드가 8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죽은 것 외에는 겉으로 드러난 상황을 봐서는 그에게 중요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젊은날의 영적 체험에 더 관심이 간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흡족한 결과를 보는데, 그의 초창기 생활 이야기에 나타나는 첫번째 사건을 보면 이 일기를 쓴 저자가 젊었을 때부터 ‘생각이 좀 많고 우울해했던’ 것을 우리는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적인 전력(前歷)에 대한 브레이너드의 첫번째 언급은 의미심장하고 사실상 예언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그의 생애는 29년 동안 줄곧 두드러지는 두 가지 성격, 곧 엄격하고 생각이 깊은 성격과 극단적인 우울증 경향에 비추어 볼 때에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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