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휘발유 같은 사랑의 기미 문단에 나온 지 십수 년이 지났건만 저자의 말이란 걸 산문으로 풀어 쓰는 건 처음이다. 별 대수롭지 않게, 어린 시절 연애편지 쓰듯 하면 되겠지, 하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열어놓은 한글창이 허허벌판 같다. 그래서 생각을 조금 바꿔보았다. 요컨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흰 눈밭에서 스키라도 타는 심정으로 신나게 미끄러지자고. 그랬는데, 허허벌판이 점점 암흑이 된다. 뭐 대단한 작품집이라도 내는 거냐며 스스로에게 핀잔도 줘 보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빈 공간 앞에서 어떻게 시간을 때워야 할 지 도통 오리무중이다. 난 정말 대책 없이 두껍기만 한 이 책의 앞머리를 어떻게 이끌고 나가야 할까. 소위 문화비평집이니 하는 책들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시집을 열심히 읽고 시를 쓰고 자기 이름을 내건 시집을 내는 게 일반적인 문학지망생의 행로라면, 이 책은 그런 의례적인 경로를 겪지 않고 작의조차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몇 가지 단속적인 우연의 결과물로 내 이력의 일부로 편입하게 된 셈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대체로 이 책이 난감하고 얼떨떨하게 반갑기도 하면서, 약간은 으스스하다. 서른 넘어 처음 월급이란 건 받게 해준 글들이라는 점에서 물론 각별하기도 하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과 편협한 미적 감식안을 바득바득 노출하는 방식이긴 했지만, 나 아닌 다른 작가, 또는 취향 바깥에 있었거나 의도적인 무관심의 대상들조차도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전환기적 가치를 부여해도 딴에는 큰 무리가 없을 듯싶다. 어쨌거나 이 책은 21세기에 출간하는 나의 첫 저작인 셈이니까. 사실 이 책을 비평서라고 이름 붙이는 데 동의하고 싶지 않다. 그저 감상문이나 타인의 작품들을 빌미로 끼적인 내적 담화에 더 가까울 뿐이다. 여러 작가들을 만나고 공통분모가 희박한 다양한 책들과 음악, 영화들을 만나면서 내가 결국 얘기하고 싶었던 건 삶의 심급에 늘 못 미쳐 의기소침해지는 나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였다. 나는 이 사실을 원고를 정리하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글들을 쓰던 당시 나는 내가 시를 쓰면서 깨우치고자 했던 것, 또는 삶의 외곽에서 소리 없이 빚어져 마음의 풀무를 요동치게 하는 시의 본령 앞에서 새침한 애인처럼 돌아서서는 스스로를 방기하려고 애썼다. 그건 마치 사랑하는 조강지처를 놔두고 뭔지 모를 불안과 자책감 탓에 집 밖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떠돌이 바람남편의 심사와도 비슷하다. 내 몸에서 빠져나가 공적이고도 주기적인 루트를 통해 발설되는 나의 말들이 켜켜이 쌓여가면 갈수록 나는 내 살의 일부로 여겼던 무언가와의 거리를 거듭 확인해야 하는 일상들에 지쳐버리곤 했다. 하지만 그 엄살 섞인 고단함이 내 깜냥으로 버틸 수밖에 없는 가장 진솔한 나의 무게였음을 이제야 알고, 반성한다. 시에 대한 장황한 변설들을 풀어놓으며 마무리를 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런 만큼 매일매일 건성 반 진정 반으로 쓴 글들이 웹페이지에 오를 때면 그 생경해 보이는 활자들의 중심에서 이명처럼 공전하던 무수한 문장들이 그저 환각만은 아니었다고, 지금도 믿는다. 그건 불붙기만 기다리다가 불현듯 공기 속에 증발해버리는 휘발유 같은 사랑의 기미였다. 때문에 이 기회를 통해 수 년째 얼굴조차 제대로 안 비치면서 깨끗이 돌아서지도 못한 시에게 미안하다는 말 전한다. 내가 너를 애써 기다리지 않듯, 너도 나를 기다리지 말기를. 내게 시를 쓴다는 건 결국 아끼고 아끼던 사랑을 세상 속에 드러내는 일에 다름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참으로 미련한 사랑의 도망자이다. 2001년 말부터 2004년 초까지, 2년 여 동안 쓴 글들을 정리하다 보니 원고매수가 족히 4천 매에 달했다. 거르고 첨삭하고 할 것 없이 화투패 돌리듯 짚이는 대로 묶겠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고슴도치 아빠라도 되는 양 자꾸만 눈길이 머물길래 개중 내 마음에 흡족해 보이는 글들로만 정리했다. 그랬더니 버려진(?) 나머지 글들의 운명이 문득 애닯아진다. 무분별하게 씨 뿌려 놓고 달아나서는 저 혼자 다 자라버린 놈들한테 뒤늦게 양육권 운운하는 꼴인 듯싶지만, 그 버려진 글들이 '우리는 알아서 잘 클 테니 당신 여생이나 걱정하쇼'라고 빈축을 놓는 것 같아 되레 마음이 놓인다. 그건 이 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잘난 주인 만나 호강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몇 가지 삶의 불가항력한 우연 끝에 세상의 간택을 기다리게 될 이 놈들이 같이 살자고 바지춤 붙들기 전에 어서 빨리 이 책을 세상에게 귀속시켜 버리는 게 피차 현명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기름냄새가 사라지기 전에 남은 사랑을 유순하게 불 밝히리라. 그의 마음이 내 마음인 양 속 깊은 얘기를 조금이나마 풀어놓을 수 있게 해준, 선생이거나 선배이거나 동료이거나 친구이기도 한 작가들, 내 마음의 화덕에 여전히 남은 잉걸들을 확인시켜준 음악들, 전혀 다른 발성법으로 깨달음을 준 책들과 피차 불편하면서도 외로울 때마다 친구인 척 해준 영화들에게 감사한다. 내 인생 최초로 4대 보험 혜택을 누리게 해 준, 이 책의 또 다른 산파일 수밖에 없는 소설가 김연수, 김중혁의 이름도 빼놓으면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이 책을 위해 지갑을 여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께 이 책을 바친다. 책이 나오면 지인들과 노래방에 가서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나 목청껏 불러 젖히고 싶다. 2004년 가을 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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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이 사람을 보라 말 안 되는 세상, 음풍농월의 촌철살인이여 - 김훈 이 늙은네는 교주가 아닙지러. 그저 번뇌하는 소설쟁이일 뿐입지러 - 소설가 박상륭 가볍게, 그러나 맹렬하게 싸움 권하는 남자 - 진중권 사랑과 평화의 로맨틱 워리어 - 한대수 작고 예민한 코끼리 코의 일렁임 - 소설가 조경란 만지면 불붙어버릴 그대의 차가운 손 - 소설가 한강 시여, 물 만난 물고기의 무념무상한 놀이여 - 시인 이성복 잠들기도 전에 모두를 떠나보낸 시인 - 시인 김구용 송사 파렴치한 아름다움, 여성의 몸속에서 울고 있는 바리데기의 목소리 - 시인 김혜순 한가위 태풍 전야, 서울 하늘에 까마귀 날다 - 소설가 김현영 삶은 지리멸렬하다, 그렇다면 사랑은? - 소설가 김연수 커트 코베인보다 오래 살아남은 자의 슬픔, 혹은 환희 - 소설가 김경욱 수줍은 뱀의 유혹, ‘저곳’에의 꿈 - 시인 박형준 젊은 시인이여, 목탁을 두드려라! - 시인 차창룡 2장 책은 무엇으로 사는가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내가 만난 시와 시인』 양파껍질 속에 숨은 시의 자궁, 혹은 무덤 ― 이성복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시를 위한 희생인가 시에 의한 희생인가 - 『시의 희생자 김수영』 홀로, 먼 곳에서 마음의 유적들을 뒤적이다 -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여러분, 내 방귀맛 좀 보이소! - 한대수의 『침묵』 규방 속의 지식들과 차례로 혼음(混淫)하기 - 『헤르메스』 구경거리의 노예들이여, 자신의 열정을 해방하라! - 『스펙타클의 사회』 20세기 건축의 위대한 삼위일체설 - 『건축을 향하여』 고흐는 정말 ‘탁월하지만 황폐한 정신이상자’였을까? -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매혹될 수밖에 없는 스타의 신화학 - 『제임스 딘 - 불멸의 자이언트』 3장 시, 음악에 섞이다 스스럼없는 쾌락을 좇는 암고양이들 - 황인숙과 블론디 깨지기 쉬운, 그러나 그 어떤 상처보다 두텁게 - 기형도를 떠올리게 하는 뮤지션들 떠도는 바람에게 건네는 말, 숨은 신의 노래 - 말라르메와 킹 크림슨 깨진 ‘유리’ 거울 속, 초록의 고무 괴물의 노래 - 성기완과 비욕 고통이 커지는 순간, 사랑도 폭발한다 - PJ 하비와 박서원 적멸과 허무, 그리고 ‘삶에의 의지’ - 벤 하퍼와 박정대 삶의 어두운 내면을 밝히는 죽음 같은 고독 - 르베르디와 아랍 스트랩 죽음의 살냄새를 풍기는 뜨겁고 애절한 노래들 - 파스와 톰 웨이츠 짧은 체험, 영원한 죽음의 노래들 - 본느프와와 머큐리 레브 심연에서 막 출격한 ‘영혼의 공습’ - 트라클과 모르핀 천상의 설원에서 쏟아지는 소리의 결정(結晶)들 - 시규어 로스에 대한 단상 4장 영화를 위한 변명 헛헛한 웃음 속의 삶에 대한 뼈저린 성찰 - 〈고다르 영화제〉 인간을 왜곡하고 억압하는 가짜들에 대한 강한 도발 -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정신적 전통과 충돌하는 치밀한 반인간학 - 〈크래쉬〉 재기발랄한 유머로 뭉쳐진 반사회적 도발 - 〈버팔로 66〉 시끄러운 침묵을 만드는 의식의 실험실 - 〈멀홀랜드 드라이브〉 아우라를 상실한 예술 속, 젊은 화가의 꿈과 좌절 - 〈바스키아〉 시뮬라크르화된 세계 속의 ‘현실적인 착각’ - 〈아바론〉 우리의 불행이 무지개 너머에서 온 외계인 탓이라고?! - 〈지구를 지켜라〉 5장 칼럼 랭보에게 보내는 편지 시를 부르는 미래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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