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펼치기접기
自序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올린다. 화성에서 이덕규 차례 自序 1부 自決·13 毒·14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16 칼·18 聖 핏방울·19 칼끝에 맺힌 마지막 눈물·20 천사의 가슴·23 탈출기·24 빛의 원액, 그 치명적인 毒·25 막차·26 숙박계·27 사소한 균열의 끝·28 그해 겨울·30 2부 풍향계·33 회오리바람·34 臟物·35 白蛇·36 사랑·38 어느 인형의 노래·40 火星에서 보내온 사진 한 장·42 구름궁전의 뜨락을 산책하는 김씨·44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46 손 들엇·49 우주복·50 성탄 전야·51 긴 水路의 끝, 늦가을물 한 자리·52 월광소나타·55 純度, 0.1퍼센트의 눈물·56 제목, 혹은 죄목도 모르고·57 꽃과 나비의 사상적 인과성에 관하여·58 누가 방귀를 뀌었나·60 허공의 사무원들·62 3부 誤差의 진실·65 박쥐·66 그때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지요·68 골다공증·70 자동히터·72 물 위의 발자국·74 孵化·75 호출기·76 이름 허물기·77 봉숭아 꽃물 번지는 저녁·78 고장난 풍향계가 가리키는 곳·80 흉터·81 텅 빈 둥지 속의 밥상·82 철새들 사랑·84 청정해역·86 4부 삽·89 한밤을 건너가는 밥·90 무지개를 놓치다·92 오래된 열쇠·94 경운기 속으로 들어간 아버지·96 어떤 장기 기증자·98 우족탕 한 그릇·100 개복숭아·101 별들·102 영웅일기·104 흙의 조직을 와해시키다·105 꺽정이 같은 수상한 날에·106 어처구니·108 우리집 식구 중에는 귀신이 더 많다·109 어떤 우물·112 揚水機·114 무지렁이·116 聖化·118 遺言·119 해설 | 홍신선 일탈과 탐색의 긴 도정·120 自決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뒷산을 오르다가 밤새 가만히 서 있었을 가시나무 가시에 이슬 한 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밤새, 아무 생각 없이 쿨쿨 잠만 잤을 아직도 잠이 덜 깬 그 가시나무 가시에 맑고 투명한 이슬 한 방울이 매달린 채 바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毒 오랫동안 독을 삼켜왔다 조금씩 조금씩 먹어온 독에 의해 나는 길들여졌다 이제 치사량의 독성이 나를 살게 한다 아니 그 독성을 치유키 위해 날마다 더 깨끗하게 정제된 독이 필요하다 이제 내 몸 속엔 독 이외의 다른 성분은 없다 나는 독이다, 밤새도록 허공에 떠돌던 절망의 투명한 미세 입자들이 모이고 모여 더이상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을 때 비로소 기척 없는 이른 새벽이 되어 지상에 내려앉는 독 그러나 쉽게 스며들지 못하는 독 무허가 판자촌 같은 누군가의 눈동자 속에 세 들어 잔뜩 웅크리고 앉아 가끔 맥없이 덜컹거리는 눈꺼풀 사이로 망연히 밖을 내다보는 독 이내 그렁거리며 몸을 푸는 독 그러다가 한순간 건널 수 없는 슬픔의 강을 훌쩍 뛰어넘기도 하는 나는 풀잎 끝에 맺힌 눈 흡, 뜨고 사라져가는 아침이슬이다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 뒷골목 아무렇게나 버려진 빈 깡통과 소주병들이 가끔 누군가의 발길질에 한 번 더 찌그러지거나 좀더 투명한 제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 산산조각이 나는 연습을 했다 어른들은 한여름에도 허기진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다녔고 담벼락엔 철 지난 흑백 포스터들이 반쯤 찢어져 무슨 쇠락한 이념처럼 펄럭였다 우리들은 그 뜻을 알려 하지 않은 채 자본의 전부인 구멍가게에서 불문의 서열을 세웠고 한낮 골방에 누워 속옷처럼 축축하게 말라가는 여자들에게서 언제든지 모든 것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조금씩 더 멀리 불야성의 거센 바다로 나아가 빛나는 야광체의 살찐 고기들을 향해 그물을 던졌다 그러나 그 불빛들은 좀체 걸려들지 않았고 좀더 세밀한 그물을 깁기 위해 늘 막배를 타고 멀미하듯 돌아왔다 더러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어느 날 쫓기듯 돌아와 좁은 골목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숨어들었다 흑백 포스터 위로 총천연색 구인광고물들이 수없이 덧붙여졌으나 여전히 그 뜻을 알지 못했고 어느새 빈 호주머니 속 익명의 슬픔에게 상처투성이인 손들이 습관처럼 불려들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내다버린 아직 식지 않은 연탄재 위로 뛰어내린 눈송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 어디쯤, 막다른 골목 쪽창 안으로 短劍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이 언제든지 모든 것을 철거당할 수 있는 희망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칼 그가 떠났다 막다른 골목 끝에서 한순간 휙 돌아서 아주 잠깐 반짝였던 그 눈빛이 법률상 검증받지 못하는 사생아의 내력이었다는 걸 깨달은 후, 그의 행방이 묘연했다 변화무쌍한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聖 핏방울 흰 눈 위에 떨어져 스며들던 핏방울을 기억한다 한 방울의 두 방울의 세 방울의……, 그 뜨겁던 분노의 씨톨들을 기억한다 기억한다, 그 하얀 어머니가 포근히 품었다 흔적 없이 날려보낸 빠알간 천사들을 기억한다 칼끝에 맺힌 마지막 눈물 심심하면 나는 칼끝을 보며 놀지 칼끝을 정면으로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흘러가는 뭉게구름이 보이지 그 위에 흰 양떼들이 노니는 게 보이지 더이상은 못 올라가지 나도 그냥 거기쯤 앉아서 놀지 누워서 놀고 뒹굴면서도 놀지 흰 양떼들이 던져주는 구름 과자를 받아먹으며 놀지 그래도 심심해 가끔 살찐 날개를 뒤뚱거리며 심부름 가는 양떼들을 불러앉혀놓고 노닥거리지 사막을 건너온 얘기를 해주지 모래바람 얘기를, 발 밑에서 독 오른 방울뱀이 울고 전갈이 내 등을 타고 오르고 내 머리 위로 대머리 독수리가 낮게 낮게 날며 내 눈동자를 노리던 얘기를, 관자놀이에 소름이 돋고 귀가 먹먹해질수록 눈을 더 크게 뜨고 칼끝을 노려보던 사막을 들려주지 더러는 그 칼끝에 맺힌 마지막 눈물에 대해 말해주지 그 마지막 눈물이 떨어지고 벌겋게 핏발이 선, 마른 강바닥을 건너온 사람들의 분노에 대해 얘기해주지 모든 헛된 꿈들이 처형되는 비명 소리를, 뒤틀린 기형의 꿈들이 거세당한 얘기를 들려주지 몇몇 꿈의 조직들이 암세포처럼 칼날에 묻어나와 현실이 된 얘기를 현실이 다시 꿈이 되는 얘기를 들려주지 칼끝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마침내 천둥이 치고 석 달 열흘 비가 내리고 비로소 칼끝이 열리어 나는 칼 속으로 들어갈 거라고 심심한 나는 칼끝에 앉아 아무것도 모르고 슬픔의 샘으로 물 길러 가는 흰 양떼들을 불러모아놓고 아슬아슬하게 놀고 있지 천사의 가슴 곱사등이 한 여자가 세찬 눈보라를 봉긋한 등으로 밀며 뒷걸음질로 걸어간다 마치, 아이를 잃고 퉁퉁 불은 젖을 칼바람에게 베어물리듯이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육체의 유일한 聖地, 인간의 등이 다름아닌 천사의 가슴이었다고 따뜻한 젖이 돈다고 길을 잃은 차디찬 조막손이 눈송이들이 그녀의 솟은 등을 파고든다 탈출기 그때 다급한 마음에 뛰어넘은 빈집 높다란 담장 너머 마당귀에서 보았다 가슴에 폭약을 장약한 채 눅눅하게 젖은 천 개의 손가락을 들어 불을 붙이고 섰는 백일홍 나는 왜 폭발하지 않는가 이미 삶의 안전핀 따위는 뽑아버린 지 오래, 자폭을 기다리는 그 늙은 혁명가처럼 당대의 눈물이 다 말라가면서 뜨거워지는 나는 한 알의 시한폭탄이다 그리하여 화약 냄새가 좋은 짐승처럼 눈물 젖은 시간의 도화선을 따라 실패한 청춘의 언덕 너머 지뢰처럼 묻혀 있는 不發의 씨앗들을 밟으며 나는 왔다 이제 때 없이 뒤통수가 환하다, 돌아보면 마침내 찬란하게 꽃피운 폐허! 내 마음의 국경선 철책에 나부끼는 저 찢어진 옷자락들이여 나는 지금 야간 화물열차를 타고 눈 내린 광야를 지나 먼 먼 북반구의 극점을 향해 달려간다 빛의 원액, 그 치명적인 毒 순천 교도소 쪽문이 열리고 그가 밝은 빛을 향해 걸어나왔을 때, 순간 완강한 햇살오라기…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리뷰 남기기
로그인하면 리뷰를 남길 수 있어요.
리뷰 0개
아직 리뷰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