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당비의 생각을 시작하며 서동진 민주주의를 형이상학적인 정치철학자들의 고담준론에 내맡겨두지 않으려면, 또 민주주의가 더 이상 현실 정치를 꾸미는 덧없는 수사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그것에 관해 계속 생각할 책임이 있다. 그 사유의 짐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민주주의가 겪는 기이한 운명을 망연자실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지금의 우리가 바로 그런 처지에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잃어버린 10년을 만회하겠다며 등장했던 이명박 정권은 집권 직후 미국산 수입 쇠고기 사태로 인해 정권퇴진까지 요구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연일 계속된 촛불집회에서 터져 나온 주장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촛불집회가 이명박 정권이 개시한 “우파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문제 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주요 언론 매체들과 지식인들이 다투어 쏟아낸 주장을 들어보면 촛불집회는 그저 잘못된 정책에 대한 저항을 넘어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전환시키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유명한 정치학자는 이것이 6월 항쟁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라고 추켜올리기까지 했다. 그것이 국민 주권을 확약하는 미증유의 정치적 사건이라는 주장이든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직접민주주의의 분출이라는 주장이든 아니면 근대 정치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정치의 범위를 뛰어넘어 생활정치로 발현된 것이라는 주장이든, 그 모든 의견은 민주주의에 관한 새로운 사고가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그리고 만약 그런 주장들이 옳다면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에 관한 새로운 실험을 목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반대할 이유가 전연 없다. 그렇지만 만약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면 어떨까. 그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사유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아니라 외려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변용하는 지점을 가리킨다면 어떨까. 그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제한 없이 제기되어야 하며 또한 그런 물음을 던지는 목소리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촛불집회가 당장 어떤 현실 정치적 효과를 갖고 있는가의 문제를 떠나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주조하는 사태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럴수록 이런 목소리에 열려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민주주의는 문제이다. 좀더 복잡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근대 정치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근본적 조건이다. 현실 정치의 객관적인 사태 내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정치를 인식 속으로 집어넣으려고 할 때마다 어김없이 그것을 정치로서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독재와 대립되는 어떤 특수한 정치 제도 가운데 하나인 것이 아니다. 외려 민주주의는 어떤 사회적 사태를 정치화한다는 점에서 근대 정치와 동의어일 뿐 아니라 나아가 정치 그 자체를 문제화한다는 점에서 정치와 정확히 외연을 같이한다. 정치가 언제나 특정한 사회적 현실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정치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실 정치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현실 정치를 단순하게 이미 주어진 사회적 이해를 조정하는 일로 환원한다면 정치란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많은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치란 사회를 관리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고, 이때 정치란 마감된다. 그러므로 정치는 언제나 자신을 이중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 이해와 의견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행위로서의 정치와, 이를 아렌트 식으로 표현하여 “좋은 정치”로 판별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가 동시에 발생하고 분기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중화된 정치를 함께 묶을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정치의 한 가지 종류인 것이 아니라 정치와 동시 발생적이다. 따라서 정치를 민주화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민주적이라고 알려진 정치적 제도나 절차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벌어지고 있는 정치를 다시금 문제 삼는다, 즉 문제화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정치의 이상적 규범이 아니라 엄밀한 뜻에서 정치를 급진화하는 몸짓 그 자체를 가리킨다. 혹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본연의 정치, 혹은 정치의 정치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정치가 자신을 이중화하는 과정 그 자체를 두 개의 분리된 실체로 사유한다는 점에서 잘못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이런 생각에 기댈 경우 근대 정치의 출현 조건이었던 민주주의를 시야에서 놓치게 된다. 민주주의를 떠나 정치를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정치를 형이상학화하고 마는 것이다. 한편 민주주의는 어떤 사회적 사태를 정치적 행위로 해석하고자 할 때 언제나 보이지 않는 배경처럼 작용하면서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어떤 대상으로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것은 말뜻 그대로 문제를 던진다. 이를테면 촛불집회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그것을 거의 강제적이라 할 정도로 민주주의와의 관련 속에 놓지 않을 수 없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이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한 행위로 정립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그것을 현실 정치와의 관련 속에서 인식하고자 하는 경우에서이든 어쨌든 민주주의는 물음으로써 다시금 찾아온다. 그리고 그것에 답하려는 몸짓은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마련된 어떤 정의를 참조하거나 전용하는 것이 아니다. 외려 그것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사유하고 조정하기 위해 우리가 수행하는 행위 자체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사회적 활동을 정치적인 것으로서 생각하려 할 때, 그런 사유 행위를 가리키는 이름이 된다. 그러므로 촛불집회를 둘러싼 논의 속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도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이다. 우리는 “민주화”라는 역사적 시기를 경유했고 그럼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특정한 상상력을 형성하고 또한 처분했다. 그 결과는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 혹은 염증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대립 속에서 전개되었던 현실 정치는 갑자기 민생정치란 공통의 정치적 이상으로 흡수되었고, 정치적 선택은 더 많은 민생정치 혹은 더 적은 민생정치 사이의 차이를 통해 가까스로 이뤄지게 되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현실 정치를 반성하기 위한 조건으로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다시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가 상상해왔던 정치를 다시금 사유하기 위한 거의 강제적인 상황에 봉착했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에 관한 사고가 짊어져야 하는 의무임을 다시금 확인한 셈이다. ‘당비의 생각’이 첫 번째 권으로 내놓은 이 책에서 크게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생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겨냥하는 물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그것은 이른바 민주화 체제가 마감되고 난 지금 그 민주화 체제가 생각하고 있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민주화란 이름으로 진행되었던 정치적 변형의 과정은 민주주의에 관한 특정한 정치적 상상력에 바탕하고 있었고 또 이를 강제했다. 그것이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형식적 민주주의의 완성이자 정치적 근대성의 완성이라 부르는 것이었든 아니면 급진적 사회운동 세력이 말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위한 정치적 기획을 은폐하는 허울에 불과한 것이었든 그것은 민주주의에 관한 우리의 상상력에 커다란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이를 묻지 않은 채 민주화 이후의 정치를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또 하나의 부분에서 우리가 다루려 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이 책의 후반부를 구성하는 글들이 다루려는 바를 굳이 요약하자면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를 사고하기 위해 우리가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쟁점들을 검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쟁점들을 다룸으로써 여기에 실린 글들은 민주주의에 관한 우리의 상상력을 확장하고 변형할 수 있다. 이젠 시쳇말이 되다시피 한 그러나 여전히 귀담아들어야 할 “민주주의의 재민주화”란 말처럼 민주주의는 새로운 정치적 실천을 위해 경유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상대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라는 순수하게 증류된 대상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적 행위와 함께 존재하고 기존의 정치적 제도를 통해 현상하며 또한 사회적 삶의 세계를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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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여는 글 이행의 문화정치학, 민주화 체제 이후 정치를 다시 생각한다 _서동진 1부 민주화 체제, 그 권력의 형상들 - 시장에서 지도자까지 CEO 대통령, 주식회사 코리아: 대한민국 정치, 경제, 사회의 변형 _홍기빈 사회 귀족 체제와 촛불 광장: 몸의 저항을 넘어, 공화국의 이상을 향하여 _홍세화 인민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신자유주의 시대의 ‘여론’과 ‘직접발언’ _이상길 민주주의와 주권: 부성적 권위의 종언을 둘러싼 몇 가지 고찰 _이성민 욕망의 민주화는 가족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1987년 이후, 가족 구조의 변화 양상들 _임옥희 민주화 체제 이후, 여성주의 운동의 변모 양상: 새로운 사회적 몸을 향한 불연속적인 연속의 탐색들 _조주현 포토몽타주 시대의 얼굴들Antlitz der Zeit, after August Sander _이영준 2부 당대의 정치가 자리하는 토포스들 - 다시 정치를 상상한다 소송하는 사회, 불평하는 주체: 정치적인 저항을 어떻게 주체화할 것인가 _서동진 자본주의라는 공포물에서 살아남기: 보험과 성형, 그리고 물화 _이택광 대학 속의 지식인,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지난 10년에 대한 고백 _김원 생산적 복지에서 능동적 복지로: 민중의 재생산 권리는 시장의 손에? _최예륜 민주화, 소통, 생명: 촛불혁명의 정리인류학을 위한 시론 _한보희 닫는 글 타인의 고통으로 지은 체제는 오래 지속된다고 해도 그 죽음의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다 _김진호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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