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서문 오래전 헬렌 켈러는 언제나 사람들은 그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헬렌은 이런 이야기가 별로 흥미롭지 않았으므로 곧 넌더리가 났다. 하지만 헬렌은 예의 바르고 참을성이 많았기 때문에 책과 기사, 인터뷰, 대담, 영화, 연극, 설교단, 연단 등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수없이 되풀이해왔다. 그래서 이 책을 쓰기 시작할 때에는 그 지루한 노정을 반복하는 대신 여태껏 아무도 쓴 적 없고 자기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쓸 수 없는 이야기를 써보리라 결심했다. 다시 말해 헬렌은 배경 상황에 대한 순차적인 설명은 되도록이면 줄이고, 자신과 자신의 스승인 앤 설리번 메이시의 관계에 대한 내밀하고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써보기로 했다. 헬렌 켈러가 젊을 때, 그러니까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회자될 때 성장한 사람은 이미 그녀에 대해 잘 알 테지만, 대공황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은 세대는 세월이 흐르고 전설이 덧입혀짐에 따라 기억이 희미해졌을 터이므로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개괄적인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자. 헬렌 켈러는 1880년 6월 27일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만 해도 정상이었으나 생후 19개월이 되었을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각과 청각을 잃었고,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외에 손상을 입은 신체 부위는 없었으나, 두뇌와 정신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천치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헬렌의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령 헬렌에게 생각할 수 있는 지능이 있더라도 그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헬렌의 정신이 멀쩡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었다. 헬렌은 그렇게 세상에 차단된 채,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허깨비 세계에 사는 유령이 되었다. 헬렌의 어머니가 찰스 디킨스의 《미국 여행기(American Notes)》를 읽다가 보스턴에 있는 퍼킨스 맹아학교의 새뮤얼 그리들리 하우 박사가 헬렌처럼 시각과 청각을 잃은 아이 로라 브리지먼에게 읽고 쓰는 법은 물론 지문자(指文字)로 정상인들과 의사소통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될 때까지 헬렌은 5년 동안 이런 상태로 아무런 희망 없이 지내야 했다. 그러나 그건 50년 전의 일이었고 보스턴은 터스컴비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켈러 부부는 당장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으나, 헬렌이 여섯 살이 되자 헬렌을 데리고 볼티모어에 가서 유명한 안과의사에게 진찰을 받게 했다. 그 의사는 다른 의사들처럼 헬렌의 시각과 청각은 영영 회복될 수 없다고 진단했으나, 워싱턴에 가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박사를 만나 헬렌을 교육할 방법에 관해 의논해보라고 조언해주었다. 벨 박사의 자문에 따라 켈러 씨는 퍼킨스 맹아학교에 편지를 보냈다. 하우 박사는 돌아가시고 안 계셨지만 그의 후임인 마이클 애나그노스 교장이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절차에 따라 졸업생 가운데 한 명을 보내주었다. 대단한 일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하우 박사가 로라 브리지먼을 가르친 이래 50년 동안 능숙한 교사들이 하우 박사의 교육 방식을 다른 시청각 장애아들에게 시도해보았지만 아무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더욱이 애니[‘앤’의 애칭] 설리번은 다른 교사와 견줘볼 때 그다지 준비된 편이 아니었고 스스로도 다른 교사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켈러 씨가 애니 설리번에게 일자리를 제안했을 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녀로선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애니 설리번은 당시 미국 동북부에서 가장 천대받는 사회 계급이었던 아일랜드 이민자의 딸로 1866년 4월 4일 매사추세츠 주 피딩 힐스에서 태어났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녀 역시 눈에 문제가 있었다. 어머니는 앤이 여덟 살 때 세 아이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2년 뒤 아버지는 세 아이를 두고 집을 나가버렸고 그 후로 앤은 아버지 소식을 듣지 못했다. 앤의 여동생 매리는 친척집에 보내졌고 애니와 일곱 살 난 남동생 지미는 튜크스버리에 있는 병약자를 위한 구빈원으로 보내졌다. 애니는 눈이 멀어서 집안일을 돌볼 수도 쓸모 있는 일을 할 수도 없었고, 지미는 결핵성 고관절염에 걸려 거동이 몹시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1876년 2월 구빈원에 들어갔는데, 5월이 되자 지미가 사망했다. 애니는 4년 동안 거기서 지냈다. 구빈원 밖에서는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극빈자들 외에는 친구가 없었다. 어느 날 설리번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학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교육에 대한 열망이 점점 커졌다. 그러나 쇠락과 질병의 구덩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구빈원의 부정부패가 물의를 일으켜 주 복지시설관리국에서 조사단을 파견했다. 조사단에서 먼저 앤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구빈원 원생들은 이 조사단의 단장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앤은 누가 단장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그들 쪽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샌본 씨, 샌본 씨, 저를 학교에 보내주세요!” 1880년 10월 퍼킨스 학교에 도착한 앤은 열네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손끝 촉각으로 글 읽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방학 동안에는 학교에서 돌봐주지 않았으므로 여름이 오면 보스턴에 있는 하숙집에서 일을 하며 지냈다. 하숙생한테 들은 정보를 토대로 매사추세츠 안이과 병원(Massachusetts Eye and Ear Infirmary)을 찾아간 앤은 8월에 브래드퍼드 박사한테서 왼쪽 눈을 수술받았다. 이듬해 8월에 오른쪽 눈도 수술을 받자 앤은 제한된 시간 동안 눈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시각을 되찾았다. 그러나 정상인들이 다니는 학교로 전학을 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6년 동안 퍼킨스 학교에서 공부한 뒤 1886년에 졸업할 때 애니 설리번은 졸업생 대표로 고별연설을 했다. 이제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준 셈이었으므로 나머지는 그녀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앤은 자신의 불리한 조건(교육받은 기간도 얼마 되지 않았고 우아한 생활을 접해본 경험도 전혀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불확실하고 믿을 수 없는 눈이었다)을 잘 알았으나, 시청각 장애아를 돌보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한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켈러 씨의 제안은 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제안이었다. 앤은 켈러 씨의 제안을 수락한 후 몇 달 동안 하우 박사의 브리지먼에 관한 보고서를 꼼꼼히 읽었는데, 시력이 좋지 않은 탓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앤은 퍼킨스 학교의 학생들이 선망하던 로라 브리지먼과 대화하려고 다른 교우들처럼 지문자를 배웠기 때문에 이미 지문자를 알고 있었다. 로라 브리지먼은 다른 생활에 적응할 수 없어 아직 퍼킨스 학교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시청각 장애인으로서 로라가 도달한 지점까지 올라간 사람은 없었다. 애니 설리번은 또 한 차례 눈 수술을 받은 데다 향수병으로 눈물 바람을 한 탓에 붉게 충혈된 눈으로 1887년 3월 3일 터스컴비아에 도착했다. 헬렌은 이날을 자신의 ‘영혼이 태어난 날’로 늘 가슴에 간직했다. 앤은 헬렌을 만나자마자 헬렌의 손바닥에 알파벳을 쓴 뒤 그 뜻에 맞는 행동을 해 보이고, 행동을 한 뒤 손바닥에 그 낱말을 쓰는 일을 되풀이했다. 아이는 영리하고 호기심 많은 동물처럼 똑같이 따라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정신에 도달하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3월 3일 못지않게 중요한 날인 4월 5일에, 유령 헬렌은 마침내 실재하는 세계와 접촉하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애니 설리번이 펌프 아래에 헬렌의 손을 갖다 대고 물을 끌어올리자 그 순간 아이는 물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물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손바닥에 선생님이 써주신 단어가 다름 아닌 물을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환희의 순간에 헬렌은 자신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를 발견했던 것이다. 이제 헬렌은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과 그 이름을 배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헬렌이 애니 설리번을 가리키며 물으면, 애니는 “선생님”이라고 손바닥에 써주었다. 이날부터 헬렌이 어찌나 빠르게 향상되었던지 교육자들은 곧 하우 박사보다 훨씬 훌륭한 교육자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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