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서 문 이 책은 1623년 3월의 인조반정 후 명나라에 인조의 책봉을 요청하기 위하여 사신으로 갔던 이민성(李民宬) 일행의 여행을 기록한 「조천록(朝天錄)」의 국역본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중국과 외교 관계를 가져왔다. 그러나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외교는 오늘날과 같이 평등한 것이 아니었다. 중원의 지배자인 황제는 ‘천자(天子)’란 이름으로 천하의 주인 행세를 하면서 주변의 소수민족 국가에 복종을 강요하였다. 순종하는 국가의 지배자는 국왕으로 책봉하고 많은 시혜를 베풀었다. 이것이 전통시대 동아시아 특유의 ‘조공-책봉’ 체제였다.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은 주변 국가의 왕들은 자기 나라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쳤고, 이를 받은 황제는 그들 나라에 값비싼 회사품을 보내어 답례하였다. 동아시아의 국제 평화는 이렇게 유지되었고, 조공품과 회사품의 왕래는 국가 간의 공식적인 무역이 되었다. 중국 주변 국가들 중에는 순전히 중국 황제로부터 진귀한 물품들을 얻기 위하여 복속을 자처하는 나라도 많았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국왕들은 모두 중국의 북조와 남조, 그리고 수나라·당나라 황제들에게 조공하여 책봉을 받고 자기 나라를 다스렸다. 그들은 이를 위해 중국에 사신을 보내었고, 그들을 통하여 인도와 중국의 선진 문화가 전래되었다. 유교·불교·도교와 같은 고등 종교와 한자, 법령, 예법, 건축, 공예, 미술 등이 한반도로 유입되어 8세기의 황금 문화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중국의 송나라·명나라와 같은 정통 왕조에 대해 변함없이 ‘조공-책봉’ 외교를 지속하였고, 이것이 중국과 장기간 평화를 유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요나라·원나라·청나라와 같은 북방 이민족 국가들과는 처음부터 조공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침략을 받았고, 결국 그들의 강요에 의해 조공 체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명나라와의 조공 외교는 동아시아의 평화적인 국제 질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나라는 200년 이상 평화 관계를 유지하였고 국제무역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1592년의 일본 침략에는 합동 군사작전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조선 전기에 명나라의 북경으로 가는 사신들은 육로로 요동을 경유하여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1621년에 후금의 누르하치가 요동 지역을 점령한 후에는 육로로 갈 수 없었고, 평안도 철산 선사포에서 배를 타고 중국의 등주(登州)나 영원(寧遠) 지역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갈 6 7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로 사행’이라고 하였다. 1623년에 책봉주청사(奏請使)로 북경에 간 이민성 일행은 평안도 선천에서 배를 타고 산동반도의 등주와 제남 그리고 천진(天津)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갔다. 조선 왕조에서는 새 임금이 즉위하면 으레 명나라에 ‘조선국왕’의 책봉을 요청하였고, 명은 군말 없이 책봉 교서와 고명(誥命 : 임명장)을 발급해 주었다. 그러나 인조는 반정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명 조정에서는 이를 쿠데타에 의한 왕위 찬탈로 인식하여 책봉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민성 일행은 북경에서 인조반정의 실상을 해명하고 책봉을 얻어내기 위해 그야말로 피눈물나는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온갖 수모를 받으며 6개월간에 걸친 치열한 노력과 끈질긴 로비로 책봉을 인가 받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중국과의 외교에서 이때처럼 어려운 적은 없었고, 모든 사신들 중에서 이들만큼 사활을 걸고 투쟁한 적도 없었다. 이 책은 당시의 눈물겨운 노력 끝에 얻은 값진 외교 성과를 보여 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북경을 다녀온 사신들이나 수행원들이 남긴 여행기를 ‘조천록(朝天錄)’ 혹은 ‘연행록(燕行錄)’이라고 한다. 1636년 병자호란 이전 명나라에 다녀온 사신들의 여행기는 ‘조천록’이라고 하였고,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북경에 다녀온 사신들의 여행기는 ‘연행록’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명나라에 대해서는 ‘천자에 대한 조공’을 의미하는 ‘조천(朝天)’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청나라 황제에 대해서는 조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히 ‘연경(燕京 : 북경)’ 여행을 의미하는 ‘연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민성의 「조천록」은 조선 중기 한·중 외교사에 핵심이 되는 중요한 사료이며, 만 1년이 넘는 여행 과정에서 보고 들은 흥미진진한 중국 풍물과 여러 가지 에피소드는 문학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 조선 후기의 수많은 연행록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전통시대의 한·중 불평등 외교 체제와 조선 사신들의 피땀 어린 외교 투쟁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 오늘날 한반도 주변 4강을 비롯한 강대국들과의 외교에서 우리가 어떠한 정신과 협상력을 발휘해야 하는지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한문으로 된 이 책을 국어로 번역한 역자들은 오랫동안 ‘조천록/연행록’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왔다. 진지한 토론 끝에 이 책을 번역하여 간행하기로 결정하고, 작년 1월부터 수원의 한·중역사문화연구소에 모여 9개월간 강독과 토론을 하면서 번역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책은 우리 5명의 귀중한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자들은 전문 지식을 가지고 번역과 교정에 최선을 다하였으나 미비한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관심 있는 분들의 아낌없는 질정을 바란다. 이 책에서는 일반 독자들을 위해 어려운 한자 용어를 되도록 쉬운 현대어로 고쳐 썼으나, 특별한 경우에는 연구자들의 편의를 위해 각주를 달아 해설을 붙였고, 서두에는 원 자료에 대한 간략한 해제를 붙였다. 또 현지 답사에서 찍은 많은 사진들을 삽화로 넣었다. 한·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역자들을 대표하여 이영춘(李迎春)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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