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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 경제학: 인간의 경제를 향한 인류학적 상상력

석기시대 경제학: 인간의 경제를 향한 인류학적 상상력

마셜 살린스 지음/ 박충환 (옮긴이)

(도서출판)한울·2014-10-15

  • 사회과학
  • KDC 3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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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서문 이 책은 총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일부는 지난 10년 동안 다양한 시점에 걸쳐 쓴 글이고, 나머지는 특별히 이 책의 출판을 위해 집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은 이른바 원시 사회와 경제에 관한 영리주의적 해석을 반박할 수 있는 인류학적 경제학을 구축한다는 바람에서 구상되고 편집되었다. 필연적으로 이 책은 ‘형식론적’ 경제이론과 ‘실재론적’ 경제이론 사이에서 전개되어온 최근의 인류학적 논쟁에 개입하게 된다. 경제과학 진영에 특유한 형식론과 실재론의 논쟁은 1세기가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의 내용은 보잘 것 없어 보인다. 마르크스가 애덤 스미스를 논박하며 근본적인 쟁점들을 밝힌 이래 크게 달라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Althusser et al., 1966, Vol. 2). 하지만 인류학의 형태로 이루어진 최근의 논쟁들은 논의의 초점을 일정 정도 변화시켜왔다. 출발 당시의 문제가 경제학의 ‘미숙한 인류학’이었다면, 오늘날은 인류학의 ‘미숙한 경제학’이 문제이다. ‘형식론 대 실재론’은 다음과 같은 이론적 선택으로 구성된다. 형식론은 정통경제학, 특히 ‘미시경제학’의 기존 모델이 원시 사회에도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하고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다는 입장이다. 실재론은 형식론이 근거 없다는 전제하에서 인류학의 연구대상 사회와 지적 역사에 좀 더 적합한 새로운 분석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포괄적으로 정리하면, 이 논쟁은 형식론적 방법에 입각해서 원시 경제를 현대 경제의 단순한 저발전판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영리주의적 관점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원칙적으로 상이한 사회들에 있는 그대로의 자격을 부여하는 문화론적 관점을 취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수렴된다. 이 논쟁은 아직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답은 두 입장의 중간 어디쯤인가에 존재한다’는 식의 낙관적인 결론을 이끌어 낼 근거도 없다. 이 책은 실재론적 관점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실재론의 전통적 범주들이 제공하는 바와 유사한 구조를 취한다. 전반부의 글들은 생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원초적 풍요사회?와 ?가족제 생산양식?이라는 장이 거기에 해당한다(후자를 편의상 제2장과 제3장으로 나누었지만 하나의 연속적인 논의를 구성한다). 다음 이어지는 장에서는 논의의 초점이 분배와 교환으로 옮겨간다. ?증여의 영(靈)?, ?원시교환의 사회학?, ?교환가치와 원시교역의 외교수완?이라는 세 개의 장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무엇인가에 대한 주장에는 그에 대한 반박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즉, 이 책의 이와 같은 배열은 다른 한편으로 더욱 은밀한 논쟁전략을 숨기고 있기도 하다. 제1장의 ?원초적 풍요사회?에서는 형식론의 용어들을 논박한다. 하지만 ‘경제’를 수단과 목적 간의 관계로 이해하는 통상적인 관점 자체에 도전하지는 않는다. 단지 수렵채집민이 이 두 개념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장에서는 경제적 대상에 관한 영리주의적?개인주의적 개념화를 분명하게 포기한다. ‘경제’는 행위의 범주라기보다 문화의 한 범주, 즉 합리성이나 분별성이라기보다 정치 및 종교와 동일한 차원에 있는 것이고, 개인의 욕구 충족 활동이 아니라 한 사회의 물질적 생활 과정으로 간주된다. 마지막 장에서는 경제학적 정통성에 관한 논의로 회귀하지만, 그 문제틀(problmatique)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제들(problems)로 돌아간다. 끝으로 미시경제학의 전통적 과제인 교환가치의 분석에 천착할 수 있는 인류학적 관점의 구축을 모색해볼 것이다. 이상과 같은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목표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단지 몇몇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인류학적 경제학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데 만족할 것이다. 형식론의 한 대변인은 최근에 발행된 학술지 ≪당대 인류학(Current Anthropology)≫의 지면을 통해 실재론적 경제학이 소멸했다고 유감없이 선언했다. 이 논쟁에서 낭비된 말들은 논쟁의 지적 중요성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 폴라니(Polanyi)를 위시한 학자들의 유명한 연구들이 예증하는 바와 같이, 실재론자들은 출발단계부터 엉망진창이었고 오류를 범했다. 6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그 오류가 어디에 있는가를 밝힐 수 있었다는 것은 경제인류학이 성숙하는 데 중대한 공헌이었음이 틀림없다. 쿡(Cook, 1966)이 대학원 시절에 쓴 논문이 논쟁을 깔끔하게 종결시켰다. ……사회과학도 일종의 사업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취약하고 무용하며 혼란스러운 가설들을 폐기처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고차원적인 혼란을 초래한 자들의 다음 세대가 또 다른 가면을 쓰고 경제에 관한 실재론적 관점을 다시 부활시킬 것이라고 예상한다(Nash, 1967: 250). 이 책의 논의는 부활한 것도 아니고 미미한 불멸의 흔적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지 약간의 실수가 있었기를 바랄 뿐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인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경우처럼, 실재론의 종말에 관한 보고들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었다. 여하튼 나는 실재론을 방법론적 형태로 직접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피하고자 한다. ‘경제인류학’의 최근 저술들은 이미 그러한 수준의 논의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그중 많은 논의가 긍정적인 의미에서 모범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체적인 효과는 모든 이를 원래 자신들의 편견 속으로 다시 가두어버린 데 불과했다. “자신의 의지에 반(反)해서 설득된 자는 여전히 동일한 의견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성은 불충분한 중재자로 밝혀졌다. 그러는 동안 논쟁의 청중들은 싫증이 나서 급격하게 감소하고, 이로 인해 주요 참여자들조차도 이제 논쟁을 그만두고 연구나 해야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점 또한 이 책이 담고 있는 정신 중 하나이다. 공식적으로 나는 스스로를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분야의 한 참여자로서, 이 책의 글들 자체에, 그리고 이 글들이 최소한 경쟁하는 다른 이론적 양식보다는 문제를 더 잘 설명해줄 것이라는 믿음에 의거해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이는 바로 모든 꽃들이 만발하도록 두고 어느 쪽이 진정한 열매를 맺을지 지켜본다는 식의 전통적이면서도 건전한 절차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적 입장이 나의 진정한 신념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이와 같은 종류의 인류학은 ‘사회과학’의 은유적 외피를 걸친 자연과학으로서 이론의 논리적 충분함뿐만 아니라 그 경험적 적합성에 관해서도 일정한 합의점을 도출해낼 수 있는 능력을 거의 보여주지 못해왔던 것 같다. 홉스(Hobbes)가 오래 전에 말했듯이, “진리와 인간의 이익이 서로 대립하지 않는” 수학과 달리 사회과학에서는 아무것도 명백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은 “인간을 비교하고 그들의 권리와 이해관계에 관여한다”. 따라서 “이성이 인간과 대립하는 만큼 인간은 이성과 대립한다”. 진리성이 아니라 두 입장 중 하나를 인정하는 것이 쟁점인 한, 형식론과 실재론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된다. 서구의 부르주아적 범주를 구현하는 형식론적 경제학은 국내에서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국외에서는 자민족중심주의의 형태로 번성한다. 형식론은 실재론과 대립할 때 부르주아 사회와의 뿌리 깊은 양립 가능성에서 큰 힘을 얻는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론과 실재론 사이의 논쟁이 두 이데올로기 사이의 대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초창기 물리학자와 천문학자들은 기성 교회의 도그마 아래에서 연구하고 신과 군주에게 의탁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이 책의 논의는 그러한 도그마가 융통성 있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라는 환상에서가 아니라 신은 공평무사하다는 점에서 그와 동일한 모순을 이용한다. 비록 형식론적 사고와 인류학적 사고 사이에 존재하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차이는 논의에서 배제될 것이지만, 이 때문에 이 책에 실린 글들의 결과적 중요성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실재론이 사멸했다는 말을 듣고 있고, 정치적으로 최소한 세계의 특정 부분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즉, 그 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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