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책머리에| 1980년대 중반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에서 역사학 세미나 과목들을 수강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막연히 서양사를 전공하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구체적인 목표는 없었다. 그런데 영국 튜더Tudor 시대에 관한 두 개의 세미나를 들으면서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접하게 되었다.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 앤 불린Anne Boleyn, 토머스 울지Thomas Wolsey 등 생소한 인물들을 알게 되었고, 400여 년 전 영국 의회가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의사 절차를 진행했었던 것을 확인하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다 당시 의회가 다루었던 안건들이 근대적 복지 정책의 형식과 내용을 갖춘 빈민법에서부터 재산 소유의 제한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근대적’인 것에 놀랐다. 서양사는 편의상 고대, 중세, 근대로 삼분한다. 언제 근대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르네상스를, 어떤 사람들은 프랑스혁명을 그 기점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영국사에서는 대체로 튜더 왕조(1485~1603)를 근대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근대 문명modern civilization은 어림잡아 지난 400~500년간 서양이 이루어온 문명을 말하며, 지성사적 측면에서는 합리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의회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국민국가가 그 요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초기early modern period는 근대사의 전반부로서 근대 문명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단계에 해당된다. 영국사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튜더와 스튜어트Stuart 시대, 즉 16세기와 17세기를 지칭한다. 근대 초기는 영국사를 전공하는 학자들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매달려 있는 시기이며, 한국에서의 영국사 연구도 이 시기에 관해서 가장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근대의 모습이 이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국정과 왕실 살림이 분리된 근대적 정부가 출현하고, 의회가 국정 운영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게 되며, 자본 집약적인 농업을 중심으로 자본 축적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이 바로 이때이다. 또한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과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 주도하는 과학혁명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필자가 근대 초기의 영국을 전공하게 된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감성이 풍부하고 치기 어린 정의감으로 무장되었던 고교 시절, 친구들과 유신에 반대하는 지하신문을 발행했다가 구속되어 감옥을 경험하면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고, 결국 그것이 영국의 근대 초기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원형을 찾는 여정으로 이어졌다. 그랬던 것이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학할 때, 당시 스탠포드 렘버그Stanford E. Lehmberg 교수의 권유로 ‘튜더 빈민법’의 입법 과정을 분석해 박사학위논문을 쓰게 되었고, 그 외연의 확장이라 할 수 있는 ‘빈곤과 사회복지’를 역사적으로 읽는 작업이 2002년 ??빈곤의 역사, 복지의 역사??의 출판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책 ??근대 초기의 영국??은 그동안 ≪서양사론≫과 ≪영국연구≫에 발표되었던 논문들을 수정·보완해 엮은 것이다. 제1부 ‘통치의 기술’에서는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왕권과 의회 운영을 주로 다루었다. 조세권, 관료제도, 상비군 등 통치에 필요한 물리적 수단을 가지지 못했던 근대 초기의 군주들이 상징적 권력을 창출해 신민들의 내부적 복종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분석했으며, 의회를 어떻게 자신들의 통치 목적에 맞게 운영했는지에 관해 기술했다. 이와는 별도로 튜더 의회의 독자적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도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헨리 8세 시대의 명재상이었던 토머스 울지, 토머스 모어, 그리고 토머스 크롬웰에 대한 두 영화 와 의 역사 인식을 살펴보고 영화와 역사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제2부 ‘경제와 사회’에서는 근대적인 복지 정책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는 ‘튜더 빈민법’이 제정된 배경을 경제적·사회적 조건에 따라 위기 입법과 정상 입법으로 분리해 두 범주의 입법이 내용 면에서 서로 어떠한 차이가 있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보다 큰 흐름 속에서 빈민법의 역사적 의미를 찾고자 시도했다. 또한 튜더 사회의 지식인들이 빈곤과 부의 불평등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해결책을 제시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자利子는 근대 초기의 영국이 물질적 기반을 확립하고 자본주의적 체제를 수용하기 위해서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였는데, 1571년 의회는 이자를 부정하는 절대적 도덕론과 경제적 효용론 사이에서 절묘한 타협안을 이끌어냄으로써 실질적으로 이자를 허용했다. 반反악덕대출법의 입법 과정을 분석한 부분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당시 영국인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의미가 있다. 마지막으로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영국에서 어떠한 차별적 대우를 받았는지, 그 차별이 지역적으로는 얼마만큼의 편차가 있었는지를 분석했는데, 다문화 시대를 맞은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제3부 ‘연구 동향’에는 20세기 튜더사 연구에서 찬란한 금자탑을 세운 제프리 엘턴Geoffrey Elton의 업적을 중심으로, 그가 이루어낸 성과와 학계에 미친 영향, 그리고 그의 유산을 살펴보았다. 그중 의회사에 대한 부분은 따로 떼어내어 어니스트 닐John Ernest Neale에 대한 엘턴과 그의 제자들에 의한 수정주의적 도전, 그리고 수정주의에 대한 재수정 요구 등을 추려서 연구 동향을 소개했다. 1993년 미국 미네소타의 겨울은 너무 추웠다. 특히 엘턴 경이 미네소타 대학교를 방문한 그날은 섭씨도, 화씨도 모두 영하 30도를 밑돌았다. 그날 엘턴 경은 두 시간가량 자신이 걸어온 학문의 길에 대한 특강을 했다. 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처럼 되어버린 필터 없는 ‘카멜Camel’ 담배를 피우며 강의를 이어갔는데 강의가 끝날 무렵에는 거의 한 갑이 다 없어질 정도였다. 금연 건물이었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고,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날 필자는 살인적인 추위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하고 건물 출입구 문을 반쯤 열어 상체만 바깥으로 내놓고 담배를 피우다가 경찰관으로부터 당장 끄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는 말을 듣고 영원히 담배를 끊었다. 엘턴 경과 필자의 처지가 대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오후 엘턴 경을 따로 만나, 쓰고 있는 논문에 대해 개인적인 지도를 받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튜더 시대의 의회 활동에 관한 연구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알려주었고, 무엇보다 학문하는 자세에 대해 가르침을 주었다. 학문적으로 큰 은혜를 입은 셈이다. 이 책을 정리하는 내내 엘턴 경과 렘버그 교수에게 진 빚을 생각했다. 기나긴 유학 시절, 큰 물질적 궁핍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시고 늘 애를 태우셨던 어머니, 여러모로 부족한 가장의 역할을 묵묵히 참아준 가족들에게 이 책이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빈곤의 역사, 복지의 역사??에 이어 또 한 번 미진한 원고의 출판을 흔쾌히 맡아준 도서출판 한울의 김종수 사장과 조인순 주임을 비롯한 편집진의 노고에도 감사드린다. 2015년 6월 서강 언덕에서 허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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