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책을 펴내며 눈앞의 문제로 생각이 복잡할 때 우연히 읽은 옛사람의 경험담이 고민의 빗장을 스르륵 풀어주는 경우가 있다. 역사 속 인물의 언행에서 나의 당면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때도 있고, 그 오래전 사람의 고민이 어쩌면 그렇게 내 것과 똑같은지 놀라기도 한다.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틀린 건 아니구나’ 하며 위안을 얻거나 용기백배할 때도 있다. 말하자면 제인 애덤스(Jane Addams)의 자서전 같은 걸 읽을 때 그랬다. 100여 년 전 미국에 살았던 한 여성 사회운동가의 삶은 오늘날 이곳 가난한 이들의 자주적 운동을 궁리하는 우리에게 분명 가슴 뛰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후대의 누군가는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이들과의 유대를 꿈꿀 것이고, 그렇다면 현 세대 운동가들의 이야기도 훗날 그들에게는 더러 쓸모 있는 읽을거리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1970년대부터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저소득층 주거지역에서의 공동체운동은 감히 전통이라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고유한 성격과 원칙을 갖추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리하여 연로한 선배 운동가들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이야기들이 망각의 세월 속으로 떠내려가기 전에 기록을 남겨보자는 데 뜻이 모였다. 2013년 가을, ‘빈민지역운동사 발간위원회’를 구성했다. 70대 어른이신 선배들부터 현업의 청년 자원활동가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이들이 참여했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이런 책이 나와야 한다는 데 모두가 깊이 공감했던 탓이다. 발간위원회는 단행본의 성격과 내용 등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윤곽을 그려나갔다. 우선 ‘마을공동체 운동’에 관심 있는 젊은층이 즐겨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만들자. ?마을공동체 운동의 원형을 찾아서?가 일찍부터 임시 제목으로 설정되었던 것은, 1970년대부터 빈민지역에서 벌여왔던 주민운동의 목적과 원리가 실은 오늘날의 ‘마을공동체 조직하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 오히려 과거 빈민지역 운동의 경험에서 지금의 공동체 운동가들이 배우고 차용할 것이 꽤 많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따라서 발간 주체에 ‘빈민지역운동사’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은 과거 빈민운동의 세세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게 아니라, ‘당시의 운동가들이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어떻게 했나’를 생생히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술의 초점은 운동적 사건에 관한 사실(fact)이 아니라 조직 활동을 한 사람(person)에 맞추기로 했다. 단순히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록한 일지가 모여 역사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설사 역사를 사실의 기록이라 정의한다 하더라도 모든 사실을 기록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타인의 경험에서부터 배우기가 우리의 궁극적 의도라면, 활동가 개인의 생각과 고민, 주민과 함께 도모하는 과정 속에서의 성공과 실패, 그러면서 얻은 교훈과 회한 등이 더욱 궁금할 터였다. 그래서 필자들은 활동가를 따라가면서, 그의 내면까지를 포함해서, 기술한다는 원칙을 상기하며 글을 써내려갔다. 하지만 이런 원칙이 이 책 전반에 걸쳐 철저히 준수되었는지는 자신하기 어렵다. 전업 활동가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던 지역에서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기가 비교적 수월했지만, 활동가의 밀도가 높았던 지역(예컨대 서울 관악 지역)의 경우는 누구를 인터뷰해서 기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부터가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자기 지역 운동의 역사를 다루었다는 책에 본인의 이름이 등장하는지, 얼마만큼 비중 있게 묘사되었는지가 당사자에게 고생의 보람을 안기기는커녕 자칫 서운함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록의 대상이 될 사람을 선정하는 작업은 때로 필자들에게 압박감을 주었다. 그럴 때마다 필자들로 구성된 집필위원회에서는 인물 선정은 전적으로 그 지역을 맡은 필자의 판단에 맡긴다는 원칙을 거듭 확인했다. 또한 사건과 인물의 수가 많고 복잡한 일부 지역의 경우에는 활동가에 대한 서술 비중이 다른 곳과 비교해 작을 수 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책에서 다룰 시간적·공간적 범주는 1970년대부터 2000년 이전까지의 수도권 일곱 군데로 정했다. 이른바 빈민운동의 유형 가운데 이제까지 많이 다루어졌던 철거반대 투쟁이나 노점상 권리 투쟁과 같은 이슈 운동을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일상적 주민조직 운동이 가장 활발히 일어났던 장소와 시기가 위와 같았기 때문이다. 전국을 포괄하지 못한 것은 우리의 역량상 불가피한 일이었다. 경기도 시흥의 철거민 정착촌, 성남시의 구시가지, 서울의 관악 지역, 노원·도봉 지역, 성북·강북 지역, 성동 지역, 인천 지역 등 일곱 군데를 선정했는데, 이 가운데 사건과 활동가의 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았던 관악 지역의 원고 분량은 다른 곳과 동일하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해서 두 명의 필자가 구역을 나누어 집필했다. 그러다 보니 원고의 쪽수도 자연히 다른 곳의 두 배를 초과했다. 실은 인천의 경우도 상대적으로 크고 사건이 많았던 곳임은 마찬가지여서 처음부터 두 명의 필자(인천 동구와 부평 지역)를 배정했다. 그러나 집필위원회가 전체 원고를 수합할 무렵, 인천 동구 지역의 원고가 완전 유실되었음을 발견했다. 예기치 못한, 참으로 애석한 사고였다. 이 책은 2부 ‘지역운동의 발자취’가 본론에 해당한다. 1970년대부터 세기가 바뀌기 전까지 가난한 주민들과 지역공동체를 만들고자 애썼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일들을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지금과는 30~40년의 세월을 격하고 있는 터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모르면 이해가 쉽지 않은 대목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본론의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사전 지식을 제공한다는 뜻에서 1부 ‘시대적 배경의 이해’를 앞에 실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보여주고자 네 가지 주제를 정해 역사적 사실들을 설명했다. 이 작업은 애초에 한두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니었기에 여러 사람으로 필진을 구성했다. 1부는 신명호, 이원호, 최종덕, 최영선 등 네 사람이 주제별로 나누어 쓰고 서로 검토했다. 2부는 신명호(경기도 시흥), 이명애(경기도 성남), 한재랑·박기홍(서울 관악), 우순영(서울 노원·도봉), 임재연(서울 성북·강북), 김준희(서울 성동), 이충현(인천 부평) 등이 각각 한 지역씩 맡아 조사하고 글을 썼다. 이 외에도 일일이 이름을 거론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분들의 노고가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했다. 앞서 말했듯이 발간위원회에 참여해주신 선배와 후배 조직가들의 극진한 정성과 응원이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표지에 쓰인 판화는 1990년대 중반 서울의 달동네인 신림동 낙골교회의 김기돈 목사가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교회 주보에 사용했던 그림이다. 가난한 민중의 삶의 애틋한 상징과도 같았던 이 그림은 저작권 개념이 약했던 당시에 무단으로 애용되던 작자 미상의 작품이었다. 빈민지역운동사 발간위원회는 이 판화의 원작자를 찾기 위해 민예총 소속 미술인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등 여러 가지로 노력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원저작권자가 이 책의 표지를 발견하게 되면 발간위원회로 연락주시기 바란다. 3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된 것만큼이나 그 과정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 이제 막상 책을 들고 보니 그동안 받았던 많은 기대와 관심에 부응하는 결과물이 되었는지 무척 걱정스럽다. 최대한 오차를 줄이기 위해 증언자들로부터의 검독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는 미진하고 불만스러운 구석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판단만을 최후의 기준으로 삼기로 거듭 결의했던 터라, 관점의 차이에 따른 질책과 비판은 우리 필진이 오롯이 감수해야 할 몫이 아닐까 한다. 부디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완성된 이 책이 우리나라 공동체운동의 발전에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서 간 사람들의 피땀 어린 경험이 오늘날 새로운 운동을 조직하는 데 활력소가 되리라 믿는다. 2017년 4월 빈민지역운동사 발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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