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칼에 찔리다 마음이 아플 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처에 아파할 때 칼날을 바라보았다 칼날 위로 무지개가 뻗히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 칼을 빼어들고 마음의 통점에 찌르자 심장을 뚫고 눈 깜박할 사이 말뚝처럼 박힌 칼 근육이 칼을 물고 파르르 떨자 모든 통점이 사라진다 칼 아래 산과 강이 눕혀지고 세상이 고요하다. 돌탑 언젠가는 아무데서나 뒹굴었으리 모가 나서 강물에 흘러내리기도 했으리 누군가의 돌팔매가 되어 피를 흘리기도 했으리 험한 세상 건너라고 징검다리로 강을 건너기도 했으리라 칼 같은 마음 무디기 위해 오래 강을 흘렀으리라 그러나 오늘 다시 긴장을 놓지 않고 한 단 한 단 서로의 어깨를 딛고 등을 짚고 일어선다 누가 건들면 쉽게 쓰러질 듯 바람 속에서 흔들리지만, 한 생애가 와르르 무너진다 해도 둥글고 부드러운 이마가 견고하다. 검은 비닐 봉지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한때 누군가의 짐을 담았던 검은 비닐 봉지 하나 한 번 뿐인 일회용 삶이지만 바람을 타니 하늘로 치솟았다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러자 다시 바람이 부는지 하늘로 치솟는 것이 마치 살아있는 새 같다 나는 언제 한 번 마음껏 부풀었다가 하늘에 오른 적이 있었던가 한 발짝도 지상을 떠나지 못하고 한 발짝도 집을 떠난 적이 없는 착하게 살아온 나는 허파에 바람이 들지 못해 공중에 뜨지 못한다 길을 가는 동안 차창 밖에서 하늘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일회용 소모품이 오늘은 잔뜩 바람이 들어 나를 약올리고 있다. 공벌레 대나무가 있는 숲길의 낡은 마루의 집 그 집에 여든을 넘긴 공벌레처럼 몸을 말린 노인 몸을 푼다 낡은 관절마다 움직일 때마다 소름 돋게 몸 웅크리는 기름기 말라버린 몸뚱어리 형형한 눈빛만 살아있다 장마가 눅눅한 구들장에 불이 들어오면 풀려지는 정신 가끔 손녀딸이 찾아오면 바라만 본다 정신의 끈 꼭 쥔 채 공벌레가 마루 위를 기어가고 있다. 매미 늦가을 오래된 느티나무에 말라붙은 매미 한 마리를 본다 겨우 한 철을 울기 위해 겨우 한 철을 날기 위해 한 십 년쯤 울음을 삼키고 지낸 매미의 일생을 본다 개미 떼가 붙어 소리를 해체하는데 이윽고 뜯어먹히고 남은 날개가 바람에 나풀거린다 그러자 갑자기 내 목이 아파오고 어깻죽지가 가렵다. 공원에서 비 갠 오후 쥐떼처럼 몰려와 벤치에 앉은 노숙자들 과거를 자랑질 하다 멱살 잡고 주먹다짐하는 소리 소란스럽다 텅 빈 뱃속에서 입으로 뿜어져 나오는 발바닥 같은 냄새 삶에 지친 자들의 눈빛 몸부림 친 세월의 흔적이 날카로운 칼날로 몸 구석구석 새겨져 외로운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밤마다 늙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고단한 삶을 위해 경배의 잔을 올린다. 비둘기의 안부 노래방 네온사인 간판 틈새에서 비둘기가 새끼 한 쌍을 키우더니 겨울이 오기 전 날아가 버렸다 채소 진열대에 앉아 움츠린 채 몸 말리는 장맛비에 흠뻑 젖은 비둘기 한 마리 목걸이 채워 날려 보냈다 시장 가는 길 쌀가게 앞에서 비둘기가 먹이를 찍고 나는 목걸이를 한 비둘기를 찾았다 공원 연못가 한적한 골목길 식당가 앞에서 비둘기가 하늘로 솟구칠 때 그 비둘기의 안부가 궁금했다. 초복 이후 보신탕 집 펄펄 끓는 가마솥에서 해골도 보고 해구신도 보았다 보신탕 집에서 본 해골이 간밤엔 불국사 3층 석탑이 되었다가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감이 되었다가 빨랫줄에 펄럭이던 허연 빨래가 되었다가 비슬산 산마루 쉬어가는 구름은 안개비 뿌렸다가 늦은 밤 소낙비로 변하여 허공을 때리고 미꾸라지 용 터는 소리에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지새웠다 보신탕 집에서 본 해골이 마침내 정원의 모과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잘 익은 모과로 달려있다. 다시 봄을 기다리며 겨울이 되면 벌레들 어디로 가나 궁금했는데 썩은 배추잎 사이에 시들시들 말라 죽었다 지난 계절 무성했던 것들 모두가 제 비단집으로 들어간 겨울날 늙은 벌레는 끝내 제 방을 갖지 못하고 썩은 나무 구멍속에 몸이 말라 있었다 강물도 겨울이 되면 얼음이 되어 흐르지 못하지만 봄이 오면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법이여서 다시 벌레들 살아오고, 넓은 강으로 깊어가는 내 물소리를 듣는다. 찻물을 끓이는 동안 TV안테나에 앉아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꺄우뚱 하는 비둘기의 분홍 발가락이 춥다 사내가 라면 두 봉지와 소주 한 병을 사가지고 슬리퍼를 끌고 종종거리며 골목으로 사라지고 눈보라는 점점 거세져서 마을 주변의 산들이 새하얗게 지워지는데 맞은편 옥상의 비둘기가 눈 속으로 이내 사라지자 가로수가 행인처럼 눈을 짊어지고 길을 간다 점방 안으로 아이가 들어오는 사이 눈발 몇 개가 따라 들어온다 아이가 새우깡 한 봉지를 사들고 눈 속으로 흐려지는 동안 난로 위에서 찻물이 끓고 있다. 겨울 겨울바람이 골목길을 휩쓸고 지나간 영하의 아침 신호등에 걸린 이삿짐 차 작은 냉장고와 이불 보따리 달랑 하나 싣고 목이 마른 가장이 물을 마신다 허기진 사랑을 마시고 흘러간 청춘을 마시고 바람난 세월을 마시고 목젖에 깊게 들이마시다가 신호가 바뀌자 이삿짐 차 다시 길을 가는데 밑도 끝도 모를 곳으로 바람은 또 한 번 호랑이 소리를 내고 사람들을 자꾸만 어디론가로 쫓아낸다. 영상 새벽 안개에 싸여 있는 달창저수지를 지날 때 어느 집 외양간에서 실려 나온 누렁소 한 마리 차량에 실려가며 큰 눈망울 끔뻑이며 눈물 흘린다 하얀 안개가 저수지 감싸며 피어오르고 앞산과 뒷산이 경계를 지우고 서로 껴안는 시간 새벽길에서 만난 농부는 바지에 이슬 젖은 채로 논두렁의 풀을 뜯는다 중국의 어느 시골에서 만난 누추한 촌부의 모습과 논둑에 앉아 고구마, 감자, 옥수수로 주린 배 채우던 가난한 그의 식구들도 떠오른다 죽을 때까지 노동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 내 고향이나 중국에서 만난 그들 모두 운명과 싸워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애처럽지만 눈물나게 고맙다. 철 드는 법 수박은 똥구멍이 작은 게 맛있게 잘 익은 것이라며 농부가 다가와 귀띔해 주지만 사람은 똥구멍이 커야 속이 막히지 않아 건강한 법 건강하기 위해서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야 하거늘 요즘 사람들은 너무 잘 먹어서 비만이고 잘 자지 못해 수면제를 먹고 똥구멍이 막혀 잘 싸지 못하니 수박처럼 잘 익지 못하는 것 달고 맛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바람과 햇빛과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노지의 수박처럼 가뭄에도 잘 자라야 하거늘. 남해 보리암 목탁소리 백팔 배 올릴 때 그대 떨어뜨린 땀방울 목탁소리 남해의 짜디짠 수평선이 된다. 낯선 명절 추석 연휴를 맞아 노동자들 고향으로 흩어졌다 일터에서 새벽을 맞은 남의 나라 명절에 검은 얼굴의 이방인들 차가운 방바닥에 웅크려 있다 사람들이 부모 형제를 만나고 있을 때 낯선 나라의 낯선 명절에 쓸쓸해진 이방인 몇몇 뜨거운 라면 국물에 속 뎁히며 이국의 명절을 맞는다. 시인의 손 오늘, 새벽강을 깨운다 아침 전깃줄을 흔들며 까마귀 울음소리도 깨운다 터벅터벅 관절을 깨우고 샛별과 일터를 깨운다 푸른 날의 청춘도 깨우고 시간당 4,500원의 노임의 노예근성도 깨운다 기름기 빠진 까칠한 손을 깨우고 저녁 미꾸라지 튀김을 집던 기억도 깨운다 그래, 세상은 온통 멍투성이 마셔 버리자, 그 생각을 깨우다가 밤하늘 푸른 빛의 혁명처럼 허공을 깨우다가 도시의 골목에서 어쩔 수 없는 울음을 삼킨다. 수탉 어둠을 밀어내는 외침 詩 써요 詩 써요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다시 들어 보면 詩 팔아야 詩 팔아야 들린다 처음에는 욕하는 줄 알았다 나는 詩를 쓴 일은 있어도 詩 한 편 팔아 본 일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전생에 나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우는 수탉이었다. 기도 겨울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잘 기억나지 않는 잘못에 대하여 잘못 살아온 날들에 대하여 기도 드렸다 육체가 아플 때 병원을 찾지만 마음이 아플 때 하느님을 찾다가 미로의 길 헤맬 때가 있다 한쪽 길은 올라가고 다른 길은 내려가고 그 중심에 오도 가도 못하는 서럽도록 아파 본 뒤 짊어진 짐의 무게를 가늠하며 내려놓는다 조금은 용서가 되었는지 홀가분하다. 국화차 바람 한 점 없는 오후 진돗개가 앞발을 포개고 잠들었다 책은 고요히 나를 넘기고 국화차 속에는 향기로운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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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시인의 말 1 칼에 찔리다 14 칼에 찔리다 15 돌탑 16 검은 비닐 봉지 18 공벌레 19 매미 20 공원에서 21 비둘기의 안부 22 초복 이후 23 다시 봄을 기다리며 24 찻물을 끓이는 동안 25 겨울 26 영상 27 철 드는 법 28 남해 29 낯선 명절 30 시인의 손 31 수탉 32 기도 33 국화차 34 도성암 남평문씨 할머니 2 36 남평문씨 할머니 38 독 39 감포 바닷가에서 40 집 41 소문 42 문인석 43 군화 44 고령 장날 45 금호강 새벽 안개 46 홍시 47 바닥 48 집시 여인 49 독, 혹은 보름달 50 교대근무 51 낙타에게 52 돌담의 담쟁이 53 심장 소리 듣는 밤 54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55 목숨 56 술 취한 새벽 3 소나기 58 소나기 59 승부역에서 60 쩔쩔 매다 61 가을비 62 강물 63 달밤 64 소나무를 바라보며 65 용두골 아침 풍경 66 약수터에서 법문을 듣다 67 참새 떼 68 꽃 피고 진자리 69 휘파람새 70 바람 71 소리길 72 향나무 73 독도 일출 74 참꽃 75 바다가 읽어주는 편지 76 대불자 77 소나기 78 순환 4 무화과나무가 있는 여관 80 무화과나무가 있는 여관 81 잉어 82 송골매를 닮은 눈 83 꽃 따러 갔다가, 꽃 따라 가버렸지요 84 가난한 날의 연가 86 추운 봄 87 허무 88 까꾸리 89 오래된 은행나무 90 차디찬 면발 91 바람부는 날 92 택배 93 달 94 때론 96 개실마을 97 보름달 98 안부 99 답답한 날 100 아버지의 자두나무 102 개 103 봄날, 뻐꾸기 우는 소리 104 은인 105 |해설|궁핍한 날들의 실존과 정신성/강경호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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