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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하일식

(재)강원발전연구원·2014-12-01

  • 역사
  • KDC 91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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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과거에는 궁예의 태봉국을 한국사에서 돌출된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궁예는 신라 골품제 사회가 붕괴되며 사회 모순이 깊어지던 과정에서 등장한 여러 세력 중 하나였다. 지방세력의 自衛조직이 결성되고, 혼란기에 등장한 武將세력이 이들을 아루르며 광역의 지배자가 되던 것이 호족의 시대였다. 궁예는 견훤과 마찬가지로 토착 기반이 없는 武將세력으로서, 군사 지휘 능력을 발휘하여 새 국가를 세운 인물이었다. 궁예는 신라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꾸린 군사조직은 신라의 조직원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관료조직 역시 신라의 것을 본받은 것이었다. 다만 일부 명칭과 기능이 새로운 것이었다.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창건한 왕건도 궁예로부터 이어받은 유산이 적지 않았다. ?훈요십조?에서 강조한 팔관회는 궁예가 송악에 도읍했던 기간에 거행하던 행사였고, 고려의 관료조직이 태봉으로부터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신라와 태봉, 고려는 단절되거나 돌출된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서 파악해야 합리적이다. 태봉도성은 처음부터 계획도시로 출발한 것이었다. 궁예는 도성의 주민을 충실히 하기 위해 청주로부터 많은 인구를 이주시켰다. 그리고 궁궐과 내성, 외성으로 이루어진 도성을 건설했다. 도성 안에는 많은 관청과 사찰이 있었을 것이며, 관리와 승려를 비롯하여 군사들의 수자도 상당했을 것이다. 또한 궁궐 앞에는 毬庭이 있어 국가 의례를 치르는 광장으로 이용되었고, 도성 안에 설치된 시장에는 외국 상인이 머물며 상거래를 하고 있었다. 태봉도성은 계획적으로 건설된 대도시였다. 그러나 궁예의 몰락과 함께 급속히 인구가 줄어들며 공동화되었고, 빠른 속도로 농촌으로 변화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헌사료를 통해 파악하는데 한계를 지닌 태봉도성의 공간과 문화수준은, 향후 남북공동 조사를 통해 고고자료를 확보함으로써 한층 진전된 연구가 가능하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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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요 약 문 ⅶ Ⅰ. 연구 배경 및 목적 1 Ⅱ. 신라 말의 혼란과 호족의 등장 3 1. 정국 혼란과 지방인의 불만 3 2. 농민 봉기와 체제 붕괴 6 Ⅲ. 궁예의 활동과 세력 성장 11 1. 궁예의 출신 11 1.1. 출신에 대한 논란 11 1.2. 궁예가 출가한 세달사 13 2. ‘후고구려’의 성립 16 2.1. 양길 휘하의 활동 16 2.2. 궁예의 자립 17 2.3. 왕건의 歸附와 송악 도읍 20 Ⅳ. 태봉국과 도성 23 1. 철원 천도와 도성 건설 23 2. 태봉도성의 공간과 생활 27 2.1. 후삼국의 각축전 28 2.2. 도성 내의 관청과 공간 29 Ⅴ. 정리 및 전망 37 참고문헌 39 궁예, 태봉 관련 주요 사료 41 Abstract 67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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