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이성과 감성》을 통해 생각해보는 인간이 성숙해가는 과정 번역 작업을 할 때 갖는 내 나름의 습관이 있다면, 번역하는 작품의 시대와 공간 속에 살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번역할 때뿐만 아니라 책을 읽을 때도 그런 편인데, 아무래도 번역을 할 땐 이 상상력이 더욱더 활발해지기 마련이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나는 19세기 영국의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다는 상상을 하려 했다. '하려 했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여기에 '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웬만한 독자들은 짐작했을 것이다. 매일 아침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전 '나는 19세기 영국 시골에 살고 있고, 엘리너와 메리앤 옆집에 사는 그녀들의 노처녀 친구야'라고 주문을 외워보지만, 한참 작업을 하고 있노라면 자꾸만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의 복닥거리는 현실로 넘어오곤 했다. 19세기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21세기로 넘어오는 이 타임머신 여행은 작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 속 세상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사는 21세기의 내 생활과 생각, 내 주변에서 흔히 보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엘리너를 보며 내가 아는 이성적인 친구 누구누구를 떠올렸고, 메리앤을 보며 역시 내가 아는 감성 풍부한 친구 누구누구를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제인 오스틴을 여자 셰익스피어라고들 불렀던가 보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해 연애와 결혼이라는 주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의 가장 흥미로운 주제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늘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하며, 결혼과 연결될 땐 그 사랑이 더욱 진지하고 절박해지니까. 더구나 결혼만이 자신의 생계를 유지시켜줄 유일한 수단이었던 19세기 여성에게 사랑은 더욱 절실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잘못하면 《오만과 편견》에서 샬럿처럼 사랑은 뒷전이고 먹고살기 위한 수단으로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기 십상이니 말이다. 그 작품에서 샬럿의 태도를 보고 어떻게 친구가 차버린 남자를 냉큼 주워 일사천리로 결혼해버릴 수 있냐고 질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시 여성의 지위를 생각해본다면 샬럿의 행동을 함부로 손가락질할 수 없으며 샬럿은 그만큼 절박했다. 그녀의 모습은 19세기 영국 여성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배경에서 《이성과 감성》의 엘리너와 메리앤의 처지를 이해하며 이 소설을 읽는다면 그녀들이 상대 남자를 사랑하는 과정이 얼마나 용감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단순히 연애소설이라고만 규정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겉으로 표방한 것은 연애소설일는지 몰라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사랑이라는 본질을 찾으려는 용감한 과정이 날카로우면서도 점잖은 유머와 풍자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 작품 《이성과 감성》 역시 제인 오스틴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주제로 했으며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하지만 이번에 작가는 이 뻔한 줄거리를 이성과 감성이라는 두 커다란 잣대로 재단했고, 당시의 사회상과 인간의 심리를 한 땀 한 땀 섬세하게 수놓았다. 《오만과 편견》에 앞선 처녀작인 만큼 전체적인 얼개가 다소 처지는 감이 있지만, 캐릭터의 심리 묘사만큼은 오히려 더 예리하다. 이 작품은 이성이 올바르냐 감성이 올바르냐를 말하려 하기보다는 이성과 감성의 적절한 조화, 그 접점 지대를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성을 대표하는 엘리너와 에드워드는 그들의 이성 때문에 하마터면 영영 헤어질 위기에 처하지만,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감성적인 용기 덕분에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그에 비해 감성을 대표하는 메리앤은 자기 감성에 도취되어 윌러비를 사랑하지만 결국 배신을 당한 후 자신의 내면을 돌이켜보게 되고 한 단계 성숙해진 모습으로 브랜든 대령과 결혼한다. 이렇듯 삶의 좌절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이성 혹은 감성이라는 한쪽으로 치우쳤던 본성은 더욱 성숙해져 마침내 적절한 접점 지역을 찾아간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엘리너와 메리앤의 성장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두 아가씨가 성숙하는 과정이라는 커다란 기둥 외에도 주변 인물이 보여주는 소소하지만 사실적인 인간 군상의 모습 또한 이 소설의 큰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존과 페니 부부, 수다스럽고 오지랖이 넓어 엘리너와 메리앤을 귀찮게도 하지만 한없이 마음 넓은 제닝스 부인, 허영과 양심 속에서 허우적대며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하고는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는 존 윌러비, 에드워드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교활한 행동을 마다하지 않는 천박한 루시 스틸 등, 인물 개개인의 특징이 매우 뚜렷해 작품의 재미를 한층 더한다. 이 작품의 재미를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19세기 영국 사회를 엿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00년 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떠했는지 책을 통해 들여다보면서 자연스럽게 알아간다면, 탄탄한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뚜렷한 개성, 각자의 심리를 파악하는 재미를 더욱 배가시키리라 생각한다. 현대 소설에 비해 고전 소설은 확실히 그 전개가 느리고 은근하다. 어쩌면 그 점이 독자들을 고전과 멀어지게 하는 요소가 될지 모르지만, 날카롭고 직선적인 느낌의 현대 소설에 비해 낮은 구릉처럼 완만하고 에둘러 표현하는 고절 소설의 맛을 알고 나면 오래 묵은 장이나 향이 깊은 차처럼 두고두고 고전을 찾게 되리라 믿는다. 개인적으로 연애소설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오만과 편견》에 이은 이 작품을 과연 애정을 갖고 작업할 수 있을지 처음엔 꽤나 걱정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라 욕심을 내 작업했고, 그 과정에서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 왜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게 되어 뿌듯하고 기쁘다. 내가 알게 된 기쁨을 독자들도 같이 누릴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며, 단지 연애소설이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작품 안에 깃들어 있는 소소한 재미와 깊이도 함께 느낀다면 책을 읽으면서 더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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