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지로 본 조선 선비의 일상
단국대학교 한중관계연구소 (엮은이), 연구책임자: 李在鈴, 전임연구원: 權奇甲, 李忠九, 金在烈, 韓梓起, 林在完, 金明煥, 공동연구원: 朴性學, 金炫營, 趙東永, 金澈雄, 金弘九, 尹勝俊
다운샘·2024-01-08
- 367쪽
- 153×225mm
-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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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19세기 중후반, 동아시아의 오랜 사유체계에 기반하여 축적된 전통 사상과 제도들은 새롭게 유입된 서양의 사조와 문명에 의해 곳곳에서 균열을 일으켰다. 이때로부터 자운(紫雲) 이중구(李中久, 1851~1925)가의 고문서는 축적되기 시작하여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제 병합된 시기까지 총 1만여 건에 이른다. 이 자료는 이중구를 중심으로 조부 이재립(李在立, 1798~1853), 부친 이능덕(李能德, 1826~1861), 아들 이석일(李錫日, 1886~1950), 손자 이인원(李寅源, 1923~?)까지 여주 이씨 경주파의 5대에 걸쳐있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12대손 자운 이중구는 정제(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수학하며 학행과 덕망으로 사림의 중망(重望)을 받았던 이능덕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후손인 동부승지 김진형(金鎭衡)의 딸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이재립도 1840년(헌종 6) 문과에 급제하여 초계문신(抄啟文臣)을 거쳐 선전관,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역임하기도 했던 학식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1851년(철종 2) 9월 22일 광암리(匡巖里)에서 태어난 이중구는 1888년(고종 25) 식년시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1894년(고종 31)에 홍문관부교리 겸 서학교수(弘文館副校理兼西學敎授)에 제수되었다. 그는 세상이 혼란해지자 귀향한 후 학문에 매진하며, 선고(先考)의 유집을 정리하고 친족들의 일을 돌보다가 1925년 3월 향년 75세로 사망하였다. 1백여 년 동안 한 가문이 집안의 모든 문서를 소장하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다. 특히 간찰(簡札)의 비중이 높은데 발신자와 수신자가 서로의 소식과 안부 등을 주고받는 것으로 생활 제반 사항에 대해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때문에 간찰은 당시의 사회와 문화뿐만 아니라, 선비들의 일상을 알 수 있는 일차 자료이다. 그러나 사료적 가치가 높으나 간찰의 경우, 흘려 쓰는 초서(草書)로 이루어져 이를 탈초(脫草), 해제(解題)한 후 연구단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문 인력과 시간이 소모된다는 점에서 접근이 용이(容易)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2017년부터 단국대학교 한중관계연구소(소장 이재령)가 《이중구가 5대 고문서》를 대상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분야 토대연구지원사업에 선정되어 5년간 탈초·해제작업을 수행하였다. “서간문에 기초한 조선후기부터 구한말까지 민간 생활사 자료 DB 구축 –경주지역 李中久家 五代 古文書 資料를 중심으로-”란 과제명으로 축적된 이 연구 결과물들 가운데 조선 후기 선비들의 일상과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글들을 뽑아 두 권의 책으로 국역하였다. 첫 번째는 왕가·관리·독립운동가·사림의 편지로 분류하였고, 두 번째는 시사 문제와 적서(嫡庶) 시비 및 과거·혼사 등으로 나누어 그 시대상과 선비들의 인식에 접근하였다. 이 책에는 이중구가의 고문서를 기반으로 19세기 중반이후 급변하던 국내외 상황과 향촌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 및 대응, 전통과 근대의 갈등, 수용, 변용 등 주요 내용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중구가의 고문서가 지닌 학술 가치와 역사적 함의는 다양성에 있다. 내용과 형식, 그리고 관련 인물의 다양성은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를 살아가는 향촌 사회의 진면목(眞面目)을 여실히 보여준다. 첫째, 다양한 문건으로, 본 연구팀이 지난 5년 동안 수행한 《이중구가 5대 고문서》의 탈초·해제 및 DB자료화 작업은 바로 조선 후기 민간생활사의 진가를 잘 보여준다. 8천여 건의 고문서에는 그동안 알고 있던 선비사회의 겉모양을 뛰어넘어 감추어진 이면의 세계, 음지의 세상사, 향촌 지식인들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문건은 이중구 집안이 살았던 경주와 옥산서원(玉山書院)이라는 지역을 떼어 놓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 조선의 향촌 지식인인 선비들이 가졌던 사회적 관심사와 범주를 벗어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천하를 울린 명문, 선비사회가 이룩한 서원(書院)의 소통 방식인 통문(通文), 시대의 병폐를 거론한 상소문(上疏文), 교지(敎旨), 시회(詩會)에서 지어진 시(詩), 잔치의 초청장, 장례 동안 오행(五行)에 근거한 금기(禁忌)를 적은 문서, 훌륭한 선생의 덕을 추숭하기 위해 형성된 유계(儒契) 기록, 조상의 덕행을 빛내려 명문장가의 솜씨를 빌어 지어진 글, 호적(戶籍), 혼인이나 손자가 태어났을 때 미래를 살펴보는 사주팔자(四柱八字) 풀이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새로운 제도가 정착되며 나타나는 여러 형태의 공문서, 일왕 생일에 행해진 지역민의 축하연, 개성 인삼상회에서 보낸 광고지, 당시 판매된 담뱃갑, 산의 지번에 따른 도형 등등의 것들도 있다. 또 사람이 태어날 때 겪는 산모의 진통, 관혼상제의 절차가 성현이 세운 씨줄을 바탕삼아 변화된 현실에서 조화하는 날줄을 만나볼 수도 있다. 열 살이 넘어서면 혼맥(婚脈)을 만들기 위해 기울이는 양쪽 집안의 정성이 맞닥뜨려 어느 때는 거절하는 핑계, 어느 때는 성사에 필요한 주변 인맥의 동원을 위한 편지들에서 미사여구가 동원되고 있는데 이런 문서들에는 해학적 요소가 깃들어 있다. 기존의 전적(典籍)에서 전해진 것이 아닌 일상에서 생성된 우리말이 한문의 외피를 입은 것도 있다. “종무적병(終無適餠)”이란 ‘끝내 적병(適餠)이 없다.’라는 뜻인데 우리말의 “입에 맞은 떡이 없다.[無適口之餠]”는 것을 줄여 사용한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문건에 다양한 문장이 어우러진 것이 이중구가 5대 고문서의 가치이다. 둘째, 다양한 형식으로, 이중구가의 간찰은 조선조 서간문 형식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말 그대로 간찰 박물관이다. 한지에 모필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정갈하게 써진 한 장의 간찰은 어느 시점부터 변화가 더해지며 켜켜이 쌓였다. 이중구가의 간찰 형식을 분류해 보면 거의 삼십여 가지에 이른다. 이런 다양성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한자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 형태로 이번 연구에서 얻어진 최고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뿐 아니라 간찰에 곁들여지는 피봉(皮封)을 고종 21년(1884년) 우정총국(郵政總局)이 문을 열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들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근대 우편제도 이전의 피봉에서 보이는 겹으로 싼 정중함, 발신인과 수신인을 적는 위치, 발신인과 수신인을 쓰지 않은 경우 피봉을 만들지 않고 편지의 여백으로 피봉을 만드는 등의 여러 형태들이 있다. 우정총국이 문을 연 뒤까지도 여전히 옛 피봉 형식이 고수되는가 하면 일부 계층에서 새로 제정된 제도를 인용하면서 옛 피봉 형식을 따르는 모습 등에서 오랜 전통과 관습이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이중구가 5대 고문서에 쓰인 글자들이 모두 초서라서 읽어내는데 쉽지 않지만 중국이 간체자를 만들어 쓰기의 고통을 덜어내듯이, 우리 선조들의 문자 생활에서도 이런 혁신을 도모한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다. 예컨대 자형(字形) 생략형으로 毛(모)는 耗(소식 모), 复(복)은 復(회답할 복), 余(여)는 餘(나머지 여)의 자획을 생략한 글자로 쓰이고 있다. 자음(字音) 통용형의 卜(복)은 鰒(전복 복), 宜(의)는 醫(의원 의)의 음을 차용해 쓴 글자들이다. 자훈(字訓) 차용형의 薪(섶 신)은 국어의 훈독(訓讀)에서 ‘섶’을 ‘섭’으로 적용한 예이다. 셋째, 다양한 사람이다. 이중구를 전후로 5대가 경주에서 회재 이언적을 받드는 옥산서원의 주인으로 인식되었기에 이 집에 오가는 편지는 당연히 이에 걸맞은 인물들일 수밖에 없다. 조부 이재립은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아버지 이능덕은 영남 일대에서 이름을 떨친 유치명의 제자였으며, 이중구는 교리라는 정5품(正五品) 벼슬을 지냈다. 그렇기에 교류의 폭이 넓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경화(京華)의 왕족(王族)과 사족(士族)들이 있다. 왕족으로는 대원군의 맏아들 완흥군(完興君) 이재면(李載冕)의 장자이자 고종의 조카로 태어나, 할아버지 대원군과 민씨의 척족 세력이 타도되며 들어선 친일 정권에 의해 두 차례에 걸쳐 국왕으로 추대되려다 실패한 이준용(李埈鎔)이 대표적이다. 그는 안타깝게 친일로 생을 마감한 불운한 왕족이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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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펴내며 3 1. 시사(時事) / 15 01. 작성자 불명, 1894년 6월 14일 조선 주재 각국 공사(公使)와 영사(領事)의 회동담론 초고 17 02. 대조규개(大鳥圭介, 1833~1911) 1894년 6월 26일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 (大鳥圭介)의 가증스러운상주문(上奏文) 28 03. 곽종석(郭鍾錫, 1846~1919) 외 6인 1896년 2월 7일 조선의 선비들 일본의 죄를 세계에 천명하다 34 2. 시비분쟁(是非紛爭) / 45 (1) 병호시비(屛虎是非) 04. 도남단소(道南壇所), 작성일 불명 도남단소에서 답변한 통문(通文) 47 05. 병산도회소(屛山道會所), 작성일 불명 병산도회소에서 보낸 통문(通文) 53 06. 작성자, 작성일 불명 병호시비(屛虎是非)의 위차(位次)에 대한 양쪽 논쟁 58 07. 작성자, 작성일 불명 만송정(萬松亭)에서 낸 통유(通諭)에 대한 답변 63 08. 김훈(金壎, ? ) 1892년 10월 17일 김훈이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보낸 편지 형식의 통문(通文) 71 (2)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후손의 적서시비(嫡庶是非) 09. 작성자, 작성일 불명 옥산서원(玉山書院) 사변(事變) 전말(顚末) 기록 74 10. 작성자, 작성일 불명 《잠계유고(潛溪遺稿)》의 서문 수정 문제 88 (3) 손이시비(孫李是非) 11. 작성자, 작성일 불명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학문이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의 영향을 받음 95 12. 작성자, 작성일 불명 상주(尙州) 도남서원(陶南書院)에서 옥산서원(玉山書院)에 보내는 통문(通文) 102 13. 조유해(曺有海, ? ), 작성일 불명 반계 최씨(盤溪崔氏) 문중, 작성일 불명 옥산서원(玉山書院)에 보낸 통문(通文), 조유해가 옥산서원(玉山書院)에 보낸 단자(單子) 112 14. 작성자, 작성일 불명 고산서당(高山書堂)에서 동강서원(東江書院)에 보낸 두 번째 통문 117 15. 유교영(柳喬榮, 1854~1920) 1905년 3월 25일 손이시비(孫李是非)의 심각함 124 3. 과거(科擧) / 129 16. 인우(寅瑀, ? ) 1860년 5월 25일 과거 응시의 정당성에 대한 심경 토로 131 17. 이재립(李在立, 1798~1853) 1834년 11월 14일 국왕의 환후 회복을 축하하는 경과(慶科)의 과거 날짜 공고와, 복합상소(伏閤上疏)의 이면(裏面) 139 18. 이재립(李在立, 1798~1853) 1831년 2월 2일 과거 응시에 필요한 비용과 시관(試官)에 관한 정보 및과거 뒤의 숨은 얼굴 148 19. 작성자, 작성일 불명 과거 응시를 위해 팔도에서 모여든 선비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반촌(泮村) 157 20. 이재립(李在立, 1798~1853) 1853년 1월 10일 과거 급제를 위한 치밀한 물밑 작업 160 21. 이재립(李在立, 1798~1853) 1840년 4월 8일 과거 급제의 영광과 벼슬길 166 22. 이응상(李凝祥, ? ) 1840년 3월 28일 과거 급제 뒤의 인사치레 비용 171 23. 유치숭(兪致崇, 1804~1878) 작성일 불명 과거 급제 뒤의 행사인 응방(應榜) 175 24. 승낙(承洛, ? ) 작성일 불명 과거 급제 뒤의 응방(應榜)에 필요한 천복(淺服)과광대 동원 179 25. 김진하(金鎭河, 1801~1865) 1840년 4월 18일 과거 급제 뒤의 과도한 지출 폐단 182 26. 최해면(崔海冕, ? ) 1891년 8월 23일 과거에 떨어진 자의 비통한 심경 188 27. 작성자, 작성일 불명 과거 급제 뒤의 분관(分館)에 따른 치열한 경쟁 192 4. 혼사(婚事) / 195 28. 김규화(金奎華, 1837~1927) 1899년 1월 3일 김규화와 이중구(李中久, 1851~1925) 집안의 통혼(通婚) 197 29. 작성자, 작성일 불명 혼사 연길단자(涓吉單子) 200 30. 김연덕(金然德, ? ) 정해년(丁亥, ?) 3월 24일 딸의 혼사에 연길(涓吉)과 신행(新行) 일자 202 31. 김용복(金容復, 1857~1933) 1898년 9월 9일 입에 맞는 떡을 찾는 자녀의 혼사 일 206 32. 이중구(李中久, 1851∼1925) 1898년 11월 6일 한 집안 두 아들의 혼사 210 33. 김규화(金奎華, 1837~1927) 1899년 9월 20일 신부가 처음 시집에 들어갈 날짜의 신중한 선택 214 34. 김면동(金冕東, 1855~?) 1899년 12월 21일 시집간 딸아이를 시중들 늙은 여자 종 219 35. 김진하(金鎭河, 1801~1865) 3월 14일 사위의 처가 방문할 때 타고 올 말에 대한 장인의 걱정 224 5. 전염병 외 기타 / 229 36. 장인이 사위에게, 1860년 7월 26일 전국적으로 번진 전염병의 공포 231 37. 안익상(安翊相, ? ) 1920년 7월 25일 일제 강점기 경상도 지역에 번지는 전염병 238 38. 장인 사견(士見)이 사위에게, 무진년(戊辰, ?) 11월 27일 마을을 휩쓴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 242 39. 외할아버지[外祖]가 손자에게, 작성일 불명 이웃집에 찾아든 전염병에 대한 경계심 244 40. 권응기(權應夔, 1815~?) 1854년 9월 10일 묘소 소재지의 수령에게 산송(山訟) 청탁 250 41. 최현식(崔鉉軾, 1854~1928) 1893년 3월 23일 동학(東學)이 들불처럼 번지다 255 42. 김익모(金翊模, 1858~1935) 1899년 2월 20일 시사(時事)와 물가에 대한 걱정 259 43. 김천수(金天洙, 1860∼?) 1900년 3월 7일일 상 기호품이 된 담배 263 44. 김대식(金大埴, ? ) 1900년 3월 18일 일본인이 철로를 만든다는 핑계로 길가 땅을 점령하다 267 45. 김건동(金建東, ? ) 1901년 12월 12일 편지에 오른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위패 도난 사건 273 46. 박재화(朴在華, ? ) 1902년 11월 12일 인생사에서 아들 결혼과 손자를 보는 경사 278 47. 김면동(金冕東, ? ) 1903년 3월 13일 사돈에게 전하는 딸에 대한 걱정 282 48. 이석일(李錫日, 1886~1950) 1939년 4월 27일 근대 조선의 사회 변화 287 49. 서병오(徐丙五, 1862~1935) 작성일 불명 부인네들의 옷 짓는 일 291 50. 조병식(趙秉式, 1823~1907) 작성일 불명 충청감사의 시각으로 본 동학도(東學徒) 295 ◆ 찾아보기 301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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