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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침묵의 시간

지크프리트 렌츠 (지은이), 박종대 (옮긴이)

사계절출판사·2010-03-22

  • 문학
  • KDC 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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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옮긴이의 말 20세기 최고의 극작가로 꼽히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마리 A에 대한 회상」이라는 시에서 사랑의 덧없음을 노래한다. “푸르른 구월의 그날”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의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오래전 한 여인을 깊이 사랑한 적이 있다. 그때는 그 사랑이 천년만년 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흘러 누군가 그 사랑이 어땠는지 묻는다. 솔직히 말해서, 얼굴도 모르겠고 이름도 마리 A인지, B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사랑이 어땠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자두나무 아래에서 그 여자와 키스를 했던 기억은 남아 있다. 그것도 키스 그 자체의 감미로움 때문이 아니라 키스를 하면서 언뜻 올려다본 하얀 구름 때문에 기억할 뿐이다. 자두나무는 그대로 있을까? 여자는 일곱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지 않을까? 시는 다음의 구절로 끝난다. 그러나 그 구름은 아주 잠시 피었을 뿐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벌써 바람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 시에는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있다. 당시는 유물론과 관념론이 첨예하게 대치하던 시절이었는데, 시인은 이 시로 관념론자들을 통렬하게 조롱한다. 관념론자들은 이 세상에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신이 그렇고, 역사 법칙이 그렇고, 인간성이 그렇고, 또 사랑이 그렇다. 그러나 보라, 너희가 영원하다고 믿는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고 부질없는 것인지. 잠시 피었다 지고 마는 구름보다 못하지 않은가?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영원히 그 사람 곁에 머물며 그 사람만 바라볼 줄 알았지만, 세월이 지나면 허무할 정도로 금방 식고 잊고 마는 게 사랑이다. 시쳇말로 사랑도 움직인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이 시를 읽으면서 악동 같은 해학과 송곳처럼 예리한 비판에 무릎을 쳤다. 아무리 절절 끓던 사랑도 시간 앞에서는 무뎌지기 마련이라는 이치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렌츠의 이 작품을 읽으며 또다시 무릎을 쳤다. 이번에는 정반대의 이유에서였다. 그래,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 ‘시간’이라는 놈의 변덕 때문에 사랑이 식는 것이라면 그 시간을 중지시키는 방법이 있다고! 절정의 순간에 사랑을 끝냄으로써 그 절정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거야. 이루지 못한 것, 손에 넣지 못한 것의 애틋함이 만들어내는 사랑의 영원성이었다. 이 소설이 그랬다. 발트 해 연안의 한 작은 도시, 사람들이 여전히 베니 굿맨과 레이 찰스의 음악을 듣고, 골목에서는 거리의 악사가 배럴오르간을 끌고 다니고, 유로화 대신 마르크화를 사용하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는 것으로 미루어 시간적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이삼십 년 전은 될 듯하다. 이곳에서 고등학교 13학년 학생과 영어선생님 사이에 사랑이 싹튼다. 들켜서도 발설해서도 안 될 금단의 사랑이다. 벌써부터 사회적 편견과 다른 많은 현실적 난관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그 사랑이 불의의 죽음으로 급작스럽게 끝맺는다. 그로써 사랑은 침묵으로 지켜져야 할 둘만의 비밀스런 영역 속으로 들어간다. “나뭇진이 굴러떨어질 때 모르고 그 밑에 있다가 같이 빨려 들어”가 이제는 영원히 호박(琥珀) 속에 함께 있게 된 모기처럼, 혹은 그 모양 그대로 화석이 되어 버린 표석의 생물처럼 두 사람의 사랑이 기억 속에 선연히 새겨진 것이다. 이 소설은 교사와 학생, 성장 중인 사람과 성장한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식의 유치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금지된 사랑은 ‘순수하고 애절한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빌려온 모티브일 뿐이다. 끝으로 절절한 사연을 냉정할 정도로 차분하게 그려 나가고, 절제된 감정 표현으로 ‘순결한 에로틱’이 무엇인지 보여 준 노작가의 감성에 경의를 보낸다. 2010년 2월 박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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