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jayu.org
커뮤니케이션 사상가들

커뮤니케이션 사상가들

강준만 (지은이)

인물과사상사·2017-03-06

  • 488쪽
  • 사회과학
  • KDC 331.6

로그인하면 내 서재에 추가할 수 있어요.

책 소개

머리말 : “커뮤니케이션은 노력할 때 가능해진다” 사상과 이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역사성을 상실하고 추상화되거나 신비화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주의나 주장이 그 시공간적 맥락과 상황에서 이탈해 떠돌아다니다 보면 현실의 이해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현실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와 관련, 흔히 ‘구조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vi-Strauss, 1908~2009)가 1960년대에 “오늘날 프랑스에서 이해되고 있는 바와 같은 의미에서라면 나는 구조주의자가 아니다”고 선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을 ‘구조주의의 아버지’니 뭐니 하고 부르는 것에 대해선 짜증까지 냈다. 왜 그랬을까?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엔 ‘구조주의’가 유행하면서 그 의미가 크게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커뮤니케이션학을 공부하면서 그와 유사한 문제에 자주 직면했다. 굳이 ‘왜곡’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실용적인 사상조차 ‘추상화’와 ‘현학(衒學)’에 의해 불명료하고 난해한 것으로 변질되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래서 나는 인물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사상과 이론은 그 출처나 배경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그 이해의 총체성을 위해 그 출처와 배경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매우 중요하거니와 재미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나의 그러한 관심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가 강조하는 이른바 ‘성찰적 사회학(reflexive sociology)’의 정신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이 성찰적 사회학은 부르디외 이전에도 많은 사회학자들이 제기한 바 있다. 예컨대, 앨빈 굴드너(Alvin W. Gouldner, 1920~1980)가 주창한 ‘성찰적 사회학’은 사회학자가 자신에 관해 알고 사회 세계에 있어서의 자신의 입장에 관해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요컨대, 여기서 성찰성은 지식의 생산자를 탐구하는 것이다. 굴드너에게 있어서 성찰성은 실천 가능한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슬로건의 성격이 강했지만, 부르디외는 좀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입장을 취한다. 예컨대, 그는 사회과학자에게는 자신의 소속 계급에서 비롯되는 무의식적 전제를 분석해야 할 과제가 부여된다고 주장하며 그 주장을 실천으로 옮겼다. 나의 주된 관심은 ‘성찰적 사회학’의 그러한 정신은 비단 ‘실천’뿐만 아니라 어떤 사상과 이론의 ‘이해’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데에 있다. 사상과 이론 중에서도 나는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이 많다. 커뮤니케이션에 주목하는 한 어떤 주제든지 다룰 수 있고 다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학생들에게도 리포트 주제를 잡을 때 전공 분야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무엇이건 좋으니 커뮤니케이션에만 집중해달라는 조건을 내건다. 사람들은 역사는 역사학자들이 쓰는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커뮤니케이션사를 전공한 내가 쓰는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에 방점을 둔다. 차별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런 ‘가로 지르기’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나의 소속 학과의 이름인 ‘신문방송학’만 보고선 내가 전공 이외의 분야를 건드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고정관념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엔 대부분의 대학들이 ‘신문방송학과’라는 이름을 좀더 팬시한 이름으로 바꾸었지만, 그 어떤 작명을 하건 가장 정확한 이름은 ‘커뮤니케이션학’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라틴어인 communis(공유)와 communicare(공통성을 이룩한다 또는 나누어 갖는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공통(common) 또는 공유(sharing)라고 하는 기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공통의 것을 갖게 한다(to make common)’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들이 서로 의미를 공유함으로써 이해에 도달하고 합의에 도달하고 거기에서 공동체의 규범으로서의 문화를 창출하는 걸 가리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 1921~1988)가 『커뮤니케이션스(Communications)』(1962)라는 제목의 책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내 생각엔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현실이 있고 그다음으로 현실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이 있다고 당연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 우리는 예술과 공부를 늘 2차적인 활동으로 간주함으로써 얕잡아 본다. 우선 인생이 있고 그다음에 인생에 관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는 식이다.……공부하고 묘사하고 이해하고 교육시키기 위한 노력은 우리의 인간성에 중심적이고 필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노력은 현실이 일어난 후에 2차적인 것으로 시작된 게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현실이 계속 형성되고 변화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것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배열들의 네트웍일 뿐만 아니라 배움과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인 것이다.” 미국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는 “모든 경영 문제의 60%는 부실하거나 잘못된 커뮤니케이션의 결과이다(Sixty percent of all management problems are the result of poor or faulty communication)”고 했는데, 이 정도면 결코 부차적이거나 2차적인 걸로 보긴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커뮤니케이션 사상가들??이지만 ‘커뮤니케이션 사상가’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 누구든 커뮤니케이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거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와 관행과 관련해 어떤 ‘업적’을 이루었다면, 그 사람의 커뮤니케이션 사상 또는 커뮤니케이션 사상과 관련된 행동은 탐구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커뮤니케이션 사상가는 바로 그런 탐구할 가치가 있는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인물 가운데에 어떤 인물은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사상을 직접 역설하기도 했지만, 어떤 인물은 단지 행동만 했을 뿐이다. 나는 그런 행동가들의 행동을 촉발시킨 생각이 무엇이며 그 행동을 둘러싼 환경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그들을 커뮤니케이션 사상가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사상가들은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 1889~1974), 조지프 매카시(Joseph R. McCarthy, 1908~1957),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 1911~1980), 자크 엘륄(Jacques Ellul, 1912~1994), 머리 에델먼(Murray Edelman, 1919~2001), 조지 거브너(George Gerbner, 1919~2005),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 1921~1988),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 1928~2016), 백남준(Nam June Paik, 1932~2006), 테드 터너(Ted Turner, 1938~) 등 모두 10명이다. 이 책은 20여 년 전인 1994년에 출간한 『커뮤니케이션 사상가들』의 개정판이지만, 사실상 새로 쓴다는 기분으로 많은 공을 들였다. 지난 20여 년간 이 10명에 대해 이루어진 각종 논의를 다 포괄하고자 했으며, 그래서 책의 분량도 처음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독자들께서 이 10명의 흥미로운 사상과 삶의 궤적을 감상하는 데에 동참한 게 유익하고 재미있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저자로서 더 바랄 게 없겠다. 커뮤니케이션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 이거 하나는 명심하면 좋겠다. “커뮤니케이션은 노력할 때 가능해진다(Communication works for those who work at it).” 2017년 2월 강준만

리뷰 남기기

로그인하면 리뷰를 남길 수 있어요.

리뷰 0개

아직 리뷰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