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프롤로그 _ 내가 있었던 그곳에 당신이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어렴풋이 기억하는 아주 어린 시절에도 일기라는 것을 써본 적이 있다. 날짜를 적고, 오늘의 날씨와 오늘의 기분을 표시하고, 오늘은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했다고 기록하는 것이 일기라고 배웠다. 선생님께 검사받기 위해 일기를 썼다. 나만 보는 일기장을 가진 것은 조금 더 커서부터였다. 엄마에게도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마음을 예쁜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고 자물쇠를 걸어 아무도 보지 못하게 서랍 속에 꽁꽁 숨겨두었다. 그 곳에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할 나의 바보 같고 설익은 마음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외로움, 막막함, 분노, 불만, 두려움, 걱정 따위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어른 비슷한 것이 되어갔고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다. 마음에 쌓인 것을 종이에 털어놓지 않아도 버리는 법을 알게 되었다. 자물쇠를 걸어두지 않아도 감정을 잠가버리는 방법을 알았다. 혼자 살게 되니 비밀의 서랍이라는 것도 필요 없어졌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흘려보냈고 그렇게 몇 년이 더 흘러, 정말로 ‘어린’의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어른의 속마음이란 처절하다. 일의 어려움, 결핍의 고통, 사람관계에서 오는 상처와 혼자일 때의 고립감. 그 모든 것들이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지독해진다. 그러다 어느 때인가는 세상의 불공평함 앞에 분노를 넘어 무력감이, 책임져야 할 인생의 무게 앞에 막막함을 넘어 공허함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처절함이 절박해지는 까닭에, 더더욱 사소한 순간 속에서 행복을 찾게 된다. 따뜻한 차 한 잔, 아늑한 공간과 좋은 음악, 겨울이 끝나는 듯한 봄바람, 우연히 다가오는 설렘, 연인의 목선 위로 흐르는 달콤한 내음. 그런 것들의 가치를 깨달아간다. 그로 인해 살아갈 힘을 낸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일기를 쓰는 일이 필요한지 모른다. 내 마음을 가장 솔직하게 담아내는 일기장에 비관적인 이야기들뿐이라면 그 얼마나 슬픈 삶인가. 일기를 쓰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따뜻하고 가끔은 행복하다고 웃게 되는 순간들이 내 삶에 생각보다 많이 채워져 있음을. 이 책은 내가 페이스북에 ‘봉현의 일기그림’이라는 이름으로 올리고 있는 그림과 글을 골라 묶은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이다. 그림으로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해나간다. 그렇지만 어떤 목적 없이 나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나의 또 다른 직업은 글을 쓰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본질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기에 글 쓰듯이 그림으로 일기를 썼다. 불특정한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공개했던 일기였지만 나는 마치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라고 외면하며, 서랍 속에 숨겨둔 일기장에 쓰듯 솔직하게 나의 이야기를 남겼다. 어린 시절 어느 때, 책상 위에 일기장을 펼쳐두고는 엄마에게 말하고픈 속마음을 일부러 보여줬던 것처럼, 우스운 마음인 것 같다. 누군가 나의 일기를 보고 공감하며 함께 웃고 울어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나만 이런 것이 아니다, 라는 위안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일기를 보는 당신이,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관음의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마치 당신의 일기를, 당신의 시간을 내가 대신 기록해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당신의 공감에 위안을 느꼈듯이, 당신의 마음을 나도 알아주고 싶다. 내 일기그림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있다. 무료함과 혼란이 번갈아 나타나고 노란 꽃이 피었다가 하얀 눈이 내린다. 행복해서 시간이 멈추었다가 괴로워서 시간이 빨리 흐르기도 한다. 걷고 움직이고 먹으며 살아가던 2년간의 모든 공간과 시간을 담았다. 모든 그림에 내가 있다. 내가 앉았던 어떤 자리, 지나갔던 어느 골목길에 언젠가 당신이 있었을 수도 있다. 어딘가에서 우리가 스쳤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모른 채 같이 살아가고 있다. 삶이 무료하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특별하지 않은 시간과 뻔하디 뻔한 감정들 속에서 일기장에 남길 만한 특별한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살아있는 기쁨이니까. 나 또한 그러했다. 그런 마음으로 긴 일기를 써왔다. 지금 나의 일기장이 당신에게 닿아 우리의 인연이 이어졌다.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이지만, 당신 또한 그런 마음이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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