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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정치

공포 정치

프랭크 푸레디 (지은이), 박형신 (옮긴이), 박형진 (옮긴이)

(주식회사)이학사·2013-03-30

  • 사회과학
  • KDC 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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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머리말 이제 당신은 우리가 창조하고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깨닫기 시작하는가? 그것은 옛 개혁가들이 상상했던 어리석은 쾌락주의적 유토피아들과는 정반대이다. 공포와 배반과 고통의 세계, 짓밟고 짓밟히는 세계, 세련되어짐에 따라 덜 무자비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무자비해지는 세계. ─조지 오웰, 『1984년』 공포 정치가 서구 사회의 공적 생활을 지배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서로를 겁주고 또 겁먹은 것처럼 보이는 데 매우 능숙해졌다. 오늘날 우리는 공인公人이 겁을 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음을 세상에 공포함으로써 우리가 공인과 의견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명한다. “나는 부시가 정말 무섭다.”거나 “나는 블레어가 하려는 일이 너무 겁난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그들의 견해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부터 아이들에 대한 불안에 이르기까지, 무서워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용인되는 잘난 체하는 행동이 되어, 이제 삶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이러한 현상의 차원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논평자들은 공포 정치를 ‘관행화’한다는 이유로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자주 비난한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관행은 한 특정 정당에 국한되지 않는다.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듯이, 그러한 관행은 정치 계급 전체에 내면화되었고, 공적 생활 속에 제도화되었다. 공포 정치는 공적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 고갈exhaustion of politics 의식과 비참여disengagement가 만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공적 생활 일반 그리고 특히 정치는 그 의미와 목적의식을 상실할 위험에 빠져 있다. 이것이 단지 직업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간과되기 쉽다.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와 의심은 궁극적으로 서로에 대한 냉소주의와 의심을 의미한다. “나는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거나 “나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와 같은 진술들은 단지 공적 생활로부터의 퇴각을 합리화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러한 진술들은 심각한 운명론적 의식을 전달하고, 정치가 무의미한 활동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감상들은 공인들의 악행에 대한 불가피한 반응이 아니다.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뢰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제거하거나 심지어 체계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식으로 정치인들에 대응해왔다. 오늘날 사람들은 공적 생활에 흥미를 잃거나 참여하지 않는 식으로 정치인들에 대응할 가능성이 더 크다. 이것이 바로 비록 2001년 총선보다 약간 많은 사람이 투표하기는 했지만, 2005년 영국 총선 동안 일어났던 일이다. 정치인들과 논평자들은 계속해서 공포 정치를 내비쳤다. 그리고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들었다. 만약 정치가 실로 무의미하다면, 우리는 분명 모든 것을 두려워할 자격이 있다. 근대 시기에 정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일정 정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했다. 18세기 계몽주의 이래로, 정치는 운명 정복 프로젝트와 결합되었다. 이 과정이 물려준 중요한 유산 중의 하나가 인간이 외적으로 부여된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질병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게 되었다. 보다 소수의 남성과 여성만이 불행을 신의 뜻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그들의 삶이 바뀌고 개선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이 정치를 받아들인 까닭은 그것이 선택의 자유를 약속하고 미래에 대한 대안적 노선들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중 대부분은 여전히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건강관리에 무수한 돈을 쓰고, 노화 과정을 늦추려고 시도하고, 심지어 외모를 바꾸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 수백 또는 수천 마일을 여행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개별적 상황이 나아갈 방향을 통제할 수단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공적인 일을 통제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오히려 정치 고갈 의식이 공적인 일들을 지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추세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사람들을 변화의 주체라기보다는 변화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다. 이 책은 공적 생활의 고갈이 어떻게 인간임personhood에 대한 계몽주의의 이상의 쇠퇴와 나란히 발생하는지를 고찰하고, 이 둘 간의 상호작용이 공포 정치에 동력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목적은 단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지배적 방식에 맞서는 것이다. 지배적인 해석 방식은 정치적, 사회적 비참여가 만연한 체제가 유발하는 문제들을 인정하고 그것들에 대처하려 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문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가 더 성숙한 민주적인 정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중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내려는 경향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자주 끔찍한 공적 생활의 상태를 직관적으로 감지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상태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많은 논평자가 무관심이 하나의 문제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행동주의, 새로운 정치 또는 새로운 사회운동을 발명하거나 발견하고자 시도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참여의 의미를 확대하여, 인터넷 채팅 그룹의 회원, 환자 자조 집단, 또는 탄원서의 서명을 시민이 지닌 최고의 덕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이 책은 이러한 반응을 부정되는 정치politics in denial로 특성화한다. 부정되는 정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우선 첫째로, 그것은 정치의 적실성을 부정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정치 행위의 여지가 거의 없는 곳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둘째로, 그것은 깊숙이 참호를 구축하고 있는 정치적 비참여의 분위기가 실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나는 정치 엘리트 분파들이 전파한 이러한 현실 안주 의식과 순응주의 의식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기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세상이 완전히 암울하지만은 않다. 문화적 운명론과 정치적 문맹의 계기들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일관되게 자신이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열망이 실현될 수 있음을 계속해서 증명하는 한, 우리가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 되기는 어렵다. 이 책은 인본주의를 인간화하는 관점이 운명론에 대한 교정책이라고 주장한다. 만연한 운명론 문화와 맞서는 방법은 인본주의적 계몽운동의 유산을 보호하고 그것을 더 인간화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현재의 연약한 견해보다는 인간임에 대한 보다 도전적인 서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공적 생활의 고갈은 또한 근대 시대의 많은 주요한 정치적 범주의 적합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은 좌파와 우파 같은 개념들이 거의 내용이 없고 그것들의 용법은 주로 수사적 성격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전前정치적 시대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류와 개인에게 할당하는 역할이다. 인간임에 관한 근본적인 관념들이 변화에 대한 태도와 미래 향방을 틀 짓는다. 오늘날 진보적 전망은 개인의 자율성, 자유의 행사, 위험 감수, 과학적, 사회적 실험에 대한 긍정적 사고방식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과거 인류 문명의 업적들을 유지하고 미래에 대해 열려 있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운명의 거부와 다름없는 이러한 시각은 공포 정치를 거부한다. 많은 사람이 내가 이 책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도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조시 애플턴, 사빈 로일, 헬렌 서얼스, 믹 흄은 계속해서 나에게 흥미 있는 많은 소재를 공급해주었다. 초고에 대한 트레이시 브라운의 논평은 내가 몇몇 논점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컨티뉴엄출판사에서 나를 담당하고 있는 편집자 앤소니 헤이네스는 처음부터 이 프로젝트를 크게 뒷받침해주었다. 이들 모두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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