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서문 1991년 8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여성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증언에 나선 사건을 발단으로 군위안부를 둘러싼 전후 보상 문제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처음에 군위안부 문제의 주된 논점으로 등장했던 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는 군위안부를 징모徵募[국가에서 특별한 일에 필요한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일]할 때 “강제연행”이 있었느냐 하는 점이고, 둘째는 군위안부가 공창제도하의 “매춘부”와 같은 것이냐 하는 점이다. 이 두 가지가 주된 논점으로 등장한 것은 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개인 보상 운동이 전개되면서 이 두 논점이 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의 국가책임 유무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 논점인 “강제연행”을 둘러싼 논쟁은 주로 조선인 군위안부의 징모 형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강제연행”의 정의는 국가총동원법에 입각한 인적 동원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징모나 군인의 ‘노예사냥’과 같은 강제적 수단으로 이루어진 연행의 개념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한정된 징모 개념*에 바탕을 둔 군위안부의 정의는 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의 국가책임을 부정하기 위한 주장이었다. 구라하시 마사나오倉橋正直는 『종군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연구: 매춘부형과 성노예형』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군위안부에는 “매춘부형과 성노예형”이 있는데, 1939년까지는 “매춘부형”만이 존재했지만 1940경부터 태평양전쟁기에 “성노예형”이라는 새로운 유형이 생겨났고, 1940년경부터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이들 두 유형의 군위안부가 혼재했다. 그리고 군위안부가 양적으로 엄청나게 늘어나 조선 여성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게 된 것은 1937년부터 1939년 사이로, 이 시기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경제 논리에 따른 “매춘부형” 군위안부만이 존재했다. 이들 두 유형의 차이는 “연행되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는데, “성노예형” 군위안부는 “노골적인 폭력에 의해, 또는 사기를 당해 ‘강제연행’된 여성”으로 소수의 중국 여성을 제외하고 주로 조선 여성이며, 대만·관동주關東州 같은 곳에서는 징모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매춘부형” 군위안부는 “일의 내용이 군인을 상대하는 매춘임을 인지한 상태에서 생활을 위해 출정지에 온 여성”으로 대부분 일본 여성과 조선 여성이다. 또한 군위안소에 있었던 중국을 포함한 점령지 군위안부에 대해 “일본 측이 비인도적인 처사를 그리 많이 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종군위안부 문제는 조선 여성에 대한 처우만이 유독 특이한 것”이 되었다고 구라하시는 주장했다(倉橋正直, 1994: 50-108). 그리고 군위안부가 형성되기 이전에 “출정지에서 장병을 상대하는 매춘과 가장 관계가 깊었던 것은 공창제도하의 창기娼妓로, 예기藝妓나 작부酌婦는 연관성이 적었다”고 하면서 그녀들이 장병을 상대했다고 해도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경제 논리”에 따라 형성된 “매춘부”에 지나지 않으며, 별도로 “매춘부형” 군위안부가 있었으나 그녀들도 “경제 논리”에 따라 상황을 납득한 상태에서 군위안부가 된 여성들이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구라하시의 주장에는 각국 군위안부의 증언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이처럼 구라하시는 군위안부의 정의를 징모 방법에서만 찾았기 때문에 군위안부의 정의가 “노골적인 폭력”과 “사기에 의한 ‘강제연행’”으로 한정되어 있다. 다만 “사기에 의한 ‘강제연행’”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양자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또 취업 사기와는 어떻게 다른지가 분명하지 않다. 또한 구라하시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검토는 한결같이 군위안부와 매춘부, 즉 여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더욱이 군위안부는 시베리아 출병 후반기에 “민간 주도형”에서 군이 점차 전면에 나서는 “군 주도형”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들어갔다고 하였는데, “군 주도형”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게다가 “성노예형” 군위안부가 1940년경부터 새롭게 등장했다는 근거가 없어서 무엇을 기준으로 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구라하시는 군위안부 문제를 하나같이 “경제 논리”를 축으로 검토하였는데, 이 점에 관한 나의 비판은 본론에서 기술하겠다. 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의 국가책임과 군위안부의 정의는 “강제연행”과 같은 한정된 징모 형태와 징모 과정으로만 한정 지어 그 근거를 찾아서는 안 된다. 군위안부는 일본 정부·군의 통제 감독 및 협력을 기반으로 징모되거나 이송되어 군 상층부가 정책적으로 개설·운영·통제 감독했던 군위안소에 구속돼 성노예가 될 것을 강요당한 모든 여성을 지칭해야 한다. 두 번째 논점으로 들어가, 군위안소제도가 공창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논리가 있다. 즉 그 당시 공창제도하에 있었던 “매춘부”의 실상이 성노예였음에도 불구하고(山下英愛, 1994), 공창제도가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었다는 인식 아래 군위안부를 공창제도하의 매춘부와 동일시하여 군위안부 문제에 국가책임이 없다고 보는 논리이다. 그러나 과연 군위안소제도와 공창제도는 같은 것일까? 분명 일본군은 공창제도를 “이상적인” 제도라고 생각했다고 여겨지지만 점령지에서 공창제도를 실현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상하이에서는 중국 정부가 공창제 폐지에 착수하여 1929년 유곽을 폐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요리옥[기생을 불러 유흥을 즐기는 영업 형태] 작부 제도를 만들어 사실상의 공창제도를 유지시켰다(吉見義明, 1995a: 15). 군위안소제도는 공창제도와 같은 형태로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군이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에서 군위안소제도는 공창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군위안소제도와 공창제도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이에 덧붙여 그 당시 사회가 공창제도를 전반적으로 용인하고 있었느냐에 대해서도 검토의 여지가 있다. 일본의 폐창廢娼 운동 연구자인 오노자와 아카네小野あかね는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의 『종군위안부』에 대한 서평에서 “매매춘 문제와 종군위안소제도의 연관성 혹은 단절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논점”을 제시하고 있다(小野澤あかね, 1996). 이 서평은 군위안소제도와 공창제도를 비교하고 당시 공창제도의 사회적 역할을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우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노자와는 “공창제도와 군위안소제도는 관계가 없다”는 문제 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하고 있다. 첫째, “종군위안부제도 성립 과정에서 볼 때 매춘과 강간이라는 두 행위가 발상에서나 현실에서 이루어진 행위에서나 유사”하다. 이것은 “일단 매매춘 형태를 띤 위안소”가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납치 감금·윤간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적나라한 폭력 행위와 고문을 자행하는” 군위안소의 형태가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매춘과 강간이 그 당사자[*병사]에게는 유사한 행위”였음을 시사한다. 둘째, “강간 방지”의 목적도 있었던 군위안소는 “매춘으로 강간을 대체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매춘을 폭력적 성행위가 허용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평상시 인신매매와 이것을 공인하고 관리한 공창제도를 정당화하는 논거에 매우 자주 이용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 연구의 입장에서 보면 “보통 매매춘·공창제도, 종군위안부제도를 같은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군위안소제도는 “‘공창제도의 폐지가 검토되고 있던’ 사회의 추세를 거스르면서 군대에 의해 강력하게 전개”되었음을 오노자와는 지적하고 있다. 한편 징모에 관해 말하자면 공창제도에서는 “민간 주선업자들의 사기나 폭력적인 징집이 금지되었지만”, 군위안소제도에서는 “군 자체, 혹은 군의 명령을 받은 업자들의 사기나 강제적 징집이 두드러지게 많았다.” 이와 같은 오노자와의 지적대로 군위안소제도는 “여성의 인권을 지키려는 국제적 분위기”(吉見義明, 1995a: 167)와 공창제도의 폐지가 검토되고 있던 일본 사회의 흐름에 역행하는 형태로 실행되고 확대되었다. 또한 오노자와는 “주로 일본을 염두에 둔 발언밖에 할 수 없으니 불충분하긴 하지만”이라고 전제한 다음, 공창제도와 군위안소제도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공창은 내무성, 현縣, 영사관, 경찰의 관할하에 있었으나 군위안소는 군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공창제도와 군위안소제도가 갖는 차이점이라고 하기엔 그가 전제했던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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