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머리말 삶은 어차피 융합이다 최재목(영남대 철학과 교수, 융합인문학 주간) "진리는 새롭지 않다. 오류만이 새롭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최근 유행하게 된 '융합'이란 말도 그렇다. 우리 사회에서 무언가를 '구별할 가치가 있어' 새로 말을 사용하는 것이지 말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언어는 나(자아)의 때요, 얼룩이요, 흔적이다. 세계는 나의 때요, 얼룩이요, 흔적이다. 나의 흔들림-흐느낌의 흔적이 언어이고 세계이다. 융합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새로운 무언가를 갈망하면서, '흔들리고-흐느끼고' 있다는 것이리라! 사물이 있으니까 이에 대응하는 언어가 일일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가치가 있어서 이렇게 저렇게 구분할 필요가 있으니 언어가 생겨나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삶은 기존의 삶과 생활 방식이 많이 달라지고 있어서 이전과 현재를 구분(구별)할 가치가 있게 되었다. 융합이란 개념의 재발견은 우리 사회가 새롭게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언어가 있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언어가 생겨난 것이다. 눈이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눈이 생겨난 것처럼 말이다. 없는 데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을 '발명Invention'이라 한다면(無→有), 있는 데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을 '발견Discovery'이라 할 수 있다(有→有). 융합은 무언가 이미 있는 것을 발상의 재료로 삼아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에, 형식상으로는 발견에 해당한다. 하지만 새로 창출된 것이 이미 있던 것과는 다른 것이기에, 내용상으로는 발명이라 할 수 있다.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화학적 변화는 다른 것들과 만나는 데서 출발한다. 만나지 못한다면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학 내에서도 사회에서도,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융합이 대세이다. 융합적이지 않으면 잘 먹히지 않는다. 융합에 눈뜨지 않고는 먹고살기 힘들게 되었다. 살아남기 어렵다는 말이다. 창의적인 진로 개척도 어렵다. 그만큼 대중의 지성, 감각이 발달하였고, 사회 시스템도, 세계시장도 다각도로 변화하고 있다. 세상의 위대한 책들은 모두 '변화하라!' '변화에 부단히 적응하라!'고 가르치지, '변화와 맞짱 뜨라! 엇박자로 살아라! 거부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자기 것 지키기에 급급한 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바깥세상에 "이것이다!"라고 꼭 내세울 만한 '자기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아카데미 내부에 눈을 돌려보자. 전공-학과-학역學域의 벽이 얼마나 두꺼웠던가. 소통도 대화도 없었다. 교수도 학생도, 각기 자신의 영역-분야에만 골몰하고 집중하였다. 그것을 권위인 양 소명인 양 자랑해왔다. 타자들, 바깥의 변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과거에는 다들 그러했으니 대체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 사회구조였기 때문이다. 단일 메뉴만으로도 폐쇄 구역의 구멍가게에서는 잘 버틸 수 있었다. 맛이 별로 없어도 괜찮았다. 사람들이 우물 안 개구리라서, 아니 별 대안이 없어서라도 그냥저냥 눈감고 잘 팔아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그런 방식이 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랬다가는 망한다. 사물을 바라보는 사회와 대중의 눈이 높아졌고, 입맛도 엄청 까다로워졌다. 하루가 다르게 세련되고, 고급스러워져간다. 사물에 대한 안목이 분화되면 될수록 그 통합의 폭이나 방법 또한 훨씬 더 복잡다단해진다. 창의적이지 않고서는 살아남기도 어려워졌다는 말이다. 이런 사태는 안주하는 자에겐 불행이나 저주이지만 도전하는 자에게는 행운이고 절호의 찬스이다. 융합적 안목을 익히려면 확고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두고, 그것을 진전시키면서, 이것저것들 사이[間]에서 어울리며[際] 통하며[通] 잘 섞여 놀[遊]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융합의 유능함은 노는 능력, 즉 '유능遊能'이어야 한다. 유동-소요逍遙-횡단(크로스오버)-섭렵의 노하우를 통해서 물건, 시스템, 콘텐츠, 아이디어의 '묘합妙合', 즉 '최적화' 상태를 찾을 수 있다. 신의 한 수가 아니더라도 '딱 맞음'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이것은 자연과학적인 것이나 기술적인 것일 수도, 인문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 됐든 결국은 '딱 맞음'이 '딱 좋음'으로 진전된다. 종국에는 ‘미학적’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경지는, 컴퍼스처럼 우선 자신이 전공하는 지식의 영역에 '깊이 더 깊이' 발을 담그고서 그것을 관망-측정할 수 있는 다양한 영역을 섭렵-장악해가는 '유능'의 방법에서 얻을 수 있다. 어설프게 이것저것을 그냥 접맥시킨다고 해서 쉽게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나 저것만을 묵수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흔히 '한 우물만 파라!'는 말을 해댄다. 한편으로는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틀린 말이다. 깊이 파고들려면 넓게 시작해야 한다. 입구가 좁으면 깊어질 수가 없다. 물론 깊어지면 자동적으로 넓어질 수 있다. 그러나 깊어지면서 그 깊이와 위상을 객관적으로 짚어볼 수 있는 시야를 충분히 확보해두지 않으면 넓이를 장담할 수 없다. 자칫 우물에 갇히거나 영영 그 제한된 좁은 구멍 속에 푹 빠져버릴 수 있다. 어떤 일을 하든 반드시 되돌아 나올 길과 시야를 확보해두어야 한다. 그래야 우물 그 자체를 통찰하고, 나아가서 다른 우물들과 통하는 물길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한 우물을 잘 팔 수 있는 능력으로 다른 우물을 다시 파 내려가면 여러 우물끼리 서로 만나게 하는 방법도 자연 터득하지 않겠는가. '한 우물만 파라!'는 말은 옛날에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리다. 한 우물만 파가지고는 그 우물 자체도,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얻어낼 수 없다! 융합이란 말은 주로 영어의 '퓨전fusion', '컨버전스convergence', '칵테일cocktail', '하이브리드hybrid' 등의 번역어로 쓰여왔다. 이 단어들의 번역어를 찾는 과정에서 ‘융합’이란 말이 재발견된 것이다. 두 개 이상의 분야를 서로 접목시키거나 기존의 분야에 다른 분야의 특성이나 기술을 도입하는 방식은 이미 경제, 의료, 교육, 나노/바이오뿐만 아니라 학문의 전 영역에서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어차피 삶은 모든 것의 '연결'로서 이루어져 있다.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연결은 인간과 사회의 운명인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융합적인 셈이다. '녹다'는 뜻의 '융融' 자에다 '합하다'는 뜻의 '합合' 자를 붙인 융합이란 개념은, 글자 자체로 보면 뭐 특별할 것도 없다. 사전적으로는 '다른 두 종류 이상의 사물을 서로 섞거나 녹여서 하나로 합하는 것'을 말한다. '섞거나 녹인다'는 것은 '화和'-'통通'-'결結'-'혼混' 등의 글자와도 끼리끼리 모일 수 있는 이른바 '가족 유사성'을 갖는다. 그래서 융합은 통섭統攝/通攝/通涉, 통합統合, 합체合體, 혼합混合, 결합結合 등의 개념들과도 친하다. 그렇다면 융합의 동력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바깥에 산재해 있는, 이미 있는 사물들, 사건들의 숙련된 탁월한 연결을 통해서? 아니, 인간의 두뇌-의식 어딘가에 숨어 있는 비장의 고층古層을 찾아내는 이른바 의식의 지질학 혹은 고고학적 탐색을 통해서? 아니면 이 둘의 결합을 통해서? 어느 쪽이든 다 가능한 일이다. 요즘 대학마다 취업이 안 된다고 야단들이다. 학생들은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고 힘이 빠져 있다. 학생들과 대학들의 고민은 현재보다는 미래로 향한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수많은 일자리가 없어져버릴지 모른다는 전망마저 있다. 물론 새로 생겨나는 것도 많다. 득이 있으면 실이 있기 마련이다. 미래의 먹거리를 마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각, 발상법, 안목이 깨어 있어야 한다. 이 책은 '융합'을 주제로 깨어 있는 발상법을 다각도로 노크한다. 지난해(2015년) 영남대학교 기초교육대학에서는 젊은 학생들의 창의적인 발상을 돕는 새로운 교양 강좌를 만들었다. '스무살의 인문학'(1학기)과 '융합 인문학'(2학기)이다. 어쩌다 보니 능력 없는 내가 이 두 과목을 주관하게 되어 과목명도 직접 정하였다. 처음에는 어설픈 감도 있었지만 다행히 이 강좌들을 자문해주시는 교수님들이 계시다. 이분들에게서 많은 도움과 힘을 얻고 있다. 바쁘심에도 불구하고 늘 자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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