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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브뤼노 라투르, 홍철기

(도서출판)갈무리·2009-05-02

  • 사회과학
  • KDC 33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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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한국어판 서문 한 회사가 시장에 제품을 내놓았을 때, 제품에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면, 그 회사는 흔히 공개적으로 회수조치(rappel)를 단행한다. 이 조치는 제품을 폐기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거니와 당연히 시장점유율을 감소시킬 목적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제품의 질이나 사용자의 안전에 대한 우려를 소비자들에게 표명하는 주도적인 조치를 취하고 언론의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가능하다면 너무나 성급하게 결정을 내린 제품의 생산을 연장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내가 근대성에 대한 회수라는 표현을 쓰고자 할 때 이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다. 그것은 당연히 최초의 원칙들로 회귀한다는 보다 일상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나에게만 고유한 의미에서, 근대성의 작용의 낯섦, 즉 흔히 그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그 낯섦에 대한 탐구라는 의미도 공명하도록 만든다. 인류학에 대한 나의 공헌은 단 하나의 문구로 요약된다. 그 구절은 정확히 말해서 30년 전 아비장(Abidjan)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같은 날 썼던 것인데, 나는 그때 캘리포니아에 있는 로제 기유맹(Roger Guillemin)의 실험실에 가서 “과학적 실천에 민속지학(ethnographiques)의 방법들을 적용하기” 위해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기로 결심했다. 나는 왜 이 짧은 문구가 인류학적(anthropologique) 기획에 대한 나의 관점에 그토록 큰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30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지나온 길을 매우 쉽게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즉 사회인류학, 혹은 문화인류학은 문화들을 다루는 반면 물리학, 혹은 생물학적 인류학은 자연을 다뤘다는 것. 따라서 오래 전 이 시기에 통약불가능한 두 방식으로 세계를 연구할 수 있었음―그러나 교육에서나 인류학을 제시하는 통상적인 방식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당히 유효한 상태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는 가려져 있고, 장식이 되어 있으며, 덮여 있는 따뜻한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벌거벗겨져 있고, 냉정하고 심지어 얼어붙어 있기까지 한 방식이다. 말하자면 하나는 은유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직설적인 방식이다. 야생의 사유와 계몽된 사유는 때때로 서로 아름다운 화해에 도달하거나 무지개 빛깔을 발하는 간섭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들 사이에 지속적인 접점을 갖지는 않는데, 전자가 후자를 형형색색의 망토로 덮어버리지만 그것은 사물의 차가운 본성에는 낯선 형태의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과학적 사유의 역사를 연구할 수는 있다―그리고 프랑스 인식론도 당연히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러한 연구 프로그램은 계몽된 사유를 더욱더 확실히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성의 자유로운 실행에 결부된 비합리성, 상징적 의미, 은유, 이데올로기의 이 잔여물들로부터 계몽된 사유를 ‘해방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왜 과학이 상대적으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이데올로기와 구분되는지를 인식론 덕분에 언제나 더 잘 알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에 나는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우리가 중심적인 문화들을 분석한다고 할 때는 지나치게 거만하고, 그렇지 않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사회를 연구하는 기획을 수행할 때에는, 그 사회의 주변부를 갉아먹는데 만족하고 중심에 있는 핵심을 공격하지 않음으로써, 지나치게 공손하다는 것이다. 그 핵심이란 바로 이성, 자연, 그리고 예컨대 내가 세 자매, 혹은 공동의 세 신성성이라고 부르는 것들인데, (기술적) 효율성, (경제적) 수익성, 그리고 (과학적) 객관성이다. 따라서 나는 조금 더 조정된 균형, 즉 마치 브레누스의 검을 내리치듯이 미리 저울을 기울이지 말아야 하는 그러한 균형점을 염두에 두고 접근방식들의 ‘대칭성’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즉 한쪽에서는 더 자제하고 다른 쪽에서는 더 과감해야 한다. 실제로 이것은 민속지학의 동일한 방법을 ‘백인’과 ‘흑인’에 적용하고, 계몽된 사유와 ‘야생’의 사유에 적용하는 셈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사유’라는 개념 자체를 지독히도 믿지 않는 셈이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나는 내가 예기치 못한 수많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 그런 모험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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