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서검도 논둑길에 천 년의 눈꽃이 피었다. 한겨울 꽁꽁 얼었던 얼음장이 깨어지고 뒤엉켜 바다로 흘러든다. 밀고 밀리며 떠내려 온 얼음이 섬 둘레를 가득 메운다. 어디에서 흘러온 얼음인지 알 수가 없다. 겨울의 시작은 섬을 건너 건너 또 건너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바다가 온통 폐허다. 외줄에 묶여 있는 여객선은 얼음 위에 앉아 있다. 육지로 향하는 발들이 선착장에 묶여 있는 동안에도 얼음은 끊임없이 섬으로 밀려든다. 선창가의 보따리들이 얼음 밑으로 가라앉는다. 얼음이 힘 빠진 여객선을 바다로 밀어낸다. 얼음이 잠자는 섬을 먼 바다로 끌고 간다. 바다는 사납게 울고 얼음덩어리들은 춤을 추어도 섬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겨울을 지키려는 바람이 아직도 바다를 휩쓴다. 발길 돌리는 논둑길에 천 년의 눈꽃이 피어있다. 서검도 ―북방한계선 선을 그어 바다를 갈라놓았다 쓸리고 밀리어 떠내려 온 조개들, 오고가는 숭어 떼들 국적이 따로 없다. 하늘은 구름이 갈라놓았다 새들에게는 갈라진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수없이 오고가는 하늘이다 새들도 국적이 없다 땅에도 선을 그어 갈라놓았다 살금살금 옮겨다니는 쥐들, 스르르 선을 넘나드는 뱀들 개미들은 선을 넘나들고 집도 짓는다 온통 내 땅이다 풀씨 하나 바람에 몸을 싣고 선을 넘는다. 국적이 바뀐다. 갯벌 갯벌 위로 짱뚱어가 고개를 들고, 툭 튀어나온 눈이 갯벌을 사냥한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집으로 들어가는 게들의 움직임은 순간 사라지는 물거품이다. 갯벌의 두둑한 둔부는 게들의 집이자 조개들의 안식처이고 낙지들에게는 피난처이다. 손바닥만 한 백합조개는 갯벌 속에서 속살을 뽀얗게 내보이고 있다. 갯지렁이가 속도를 내어 지나간다. 보드라운 갯벌이 발가락 사이로 속살을 내어준다. 하루에 두 번은 들고 나는 갯벌의 속살은 다주고도 모자라는 어미의 가슴이다. 짱뚱어의 날갯짓에 뻘 위에 널려진 고동에서 소리가 난다. 단단한 껍질 속에 숨어있는 소라는 짝짓기에 세월 가는 줄 모른다. 짱둥어는 눈을 감아준다. 갯벌의 끝은 섬이고 바다이다. 길 위에 널린 말들 말들이 집을 짓고 길을 만든다. 말들이 나무를 심고 새를 키운다. 말들은 토담이 되고 토담 속의 동화가 되고 동화 속의 별이 된다. 혀끝에 뱅뱅 돌아 나오는 말들은 구름이 되어 비를 내리기도 하고, 혀끝을 바람처럼 벗어난 말들은 낙엽 되어 구르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말들은 귓볼을 스쳐가는 바람이다. 잔잔한 술잔 속의 태풍이다. 말들은 토담 속의 아름다운 꿈이다. 고요한 꿈속의 한바탕 회오리다. 말들이 흔들린다. 사람들이 흔들린다. 풀잎처럼 세상이 흔들린다. 쏟아져 나오는 말들이 흔들리다가 휘돌다가 꽃잎처럼 밟혀 사라진다. 우물과 두레박 깊은 밤 우물 안은 아우성이다. 유유히 헤엄치던 개구리 꾹꾹 울고, 우물 안을 들락거리는 도깨비들은 동아줄을 타고 오른다. 작년 여름 빠졌던 고무신이 둥둥 뜬다. 밤새 시끄럽던 우물은 고요해지고 툭 떨어지는 두레박 소리는 개구리들을 깨운다. 두레박 속으로 물속의 알 수 없는 깊이가 들어온다. 두레박이 출렁거린다. 우물 속 세상소리가 두레박에 걸린다. 그녀의 얼굴과 구름의 그림자가 우물 속을 출렁거린다. 두레박에 그녀가 걸린다. 이리저리 휘젓는 두레박줄이 팽팽해진다. 우물 속 세상이 끌려나온다. 우물 밖 세상이 와글와글하다. 소래시장 갯골 희뿌연 안개가 물살 가르는 배를 삼킨다. 삼켜도 소화 되지 않는 힘차게 차오르는 몸사래. 낯선 얼굴과 손가락들이 낯익은 춤을 출 때마다 꼬리를 비튼다. 차가운 수조 안으로 온몸이 빨려 들어간다. 먼저 자리 차지한 강력한 저항에 뼈마디가 시큰거린다. 목젖까지 드러나는 좌판 여자의 붉은 입술에 경련이 인다. 속절없이 튀어오를 때마다 사정없이 쥐어 박히고, 무참히 가라앉으며 젖 먹던 힘 다해 꼬리를 비튼다. 고추장 냄새가 지독하다. 꾸물꾸물 사람들의 눈동자가 벌게진다. 월미도 안개가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도 끝으로 간다. 흐느적흐느적 뱃머리를 끌고 달을 향해 간다. 끝이 없는 옷자락을 끌고 파도에 미끄러지며 고백한다. 달은 차가운 바다 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안개는 낚싯대를 길게 드리운 채 다시 달을 기다린다. 마침내 달이 안개의 미끼를 물었다. 낚싯줄에 매달린 달은 마치 저녁 나들이다. 통통한 달의 뱃속에는 수많은 새끼달이 살고 있다. 온 바다를 물 반 달 반으로 채울 기세다. 용왕의 딸이다. 바다가 온통 달로 채워진다. 바다로 가는 섬 별이 물을 먹어 깜빡거린다. 달을 감싸안은 달무리 눈동자가 흐리다. 바람과 노을은 바다의 가슴을 출렁이게 한다. 어부는 배를 감춘다. 안개 걷힌 바다가 물비늘을 일으키고 있다. 섬의 바다는 넘실거리는 파도에 흔들린다. 어부의 노가 멀어져 가는 섬을 바라본다. 수건을 흔들고 있는 아낙네 몸짓이 구름에 가린다. 그물에 걸린 숭어가 그물코를 뜯는다. 그물을 끌어 올린다. 만선이다. 주름진 어부의 얼굴이 그을린 태양이다. 어부는 바다로 가는 섬이다. 그가 아닌 그, 그가 아니다. 그는 새벽을 열고 있다. 어제의 내일인 오늘의 새벽은 푸르다. 밤새 창문 밖을 서성이던 달도 푸른 빛이다. 그가 아닌 그의 낯빛도 푸르다. 열심히 자리를 보전하는 그가 아닌 그와, 매일 사표를 던지려고 하는 그가 아닌 그와, 의욕이 넘치는 그가 아닌 그와, 물 먹은 솜과 같은 몸을 가진 그가 아닌 그와, 넓은 아량의 미소를 가진 그가 아닌 그와, 시기와 질투로 뭉쳐진 그가 아닌 그, 그와 그가 아닌 그는 매일 싸우기도 하고 협상하기도 한다. 그가 아닌 그는 그의 수호신이고, 도깨비이고, 유령이다. 그가 아닌 그는 없기도 하고, 같은 옷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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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제1부 서검도 서검도 15 서검도―북방한계선 16 갯벌 17 길위에 널린 말들 18 우물과 두레박 20 소래시장 21 월미도 22 바다로 가는 섬 23 그가 아닌 그, 24 바다 그리고 바람 25 붉은 입술 26 해장국 27 늙은 고양이 28 잃어버린 맛 29 대해와 통해 30 맙소사寺 32 변형 거미 33 섬, 그리고 바다 34 제2부 아나파병원 아나파병원 37 슈퍼맨 38 대박의 꿈 39 쉰 나이의 아침 40 메마른 덩굴손 42 통돼지 날다 43 황색등 45 거울 속의 그 남자 46 돌지 않는 기어 47 혀가 꼬인날 48 불금 49 벽 속의 길 50 봄의 혈관 52 우여곡절迂餘曲寺 53 생生의 시간 54 늑대의 리더 55 제3부 쑥덕쑥덕 양심 59 골목길에 부는 바람 60 말이 말을 퍼올린다 61 고요한 대화 62 거미, 허공을 밟다 63 산과 눕다 64 그, 65 바람―박경리문학공원 66 봄, 일상 67 가면 68 나무의 등 69 벽 70 한 다리, 71 에에라 72 쑥덕쑥덕 73 가을 낙조 74 제4부 낮술 형제들의 삼국지 77 그의 공간 78 아버지의 장롱 80 가족사진 81 그녀의 달 82 새벽 83 다리가 너무 아프다―어머니 가신 날 84 해에게로 가는, 그녀 86 장독대 87 바람 부는 날 88 날개 90 그녀의 이불홑청 91 그 날 92 옥탑의 뜰 93 영원한 내 편 94 낮술 96 허니문 98 일몰 101 해설/백인덕:오 103 ―박하리의 시세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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