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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위대한 미메시스

역, 위대한 미메시스

황병기

(주식회사)글항아리·2014-10-30

  • 철학
  • KDC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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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서문 인문학의 모든 기호와 상징은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자연의 영역이 아니다. 신 아래 자연과 인간이 대적하듯이, 자연은 자연의 원리대로 움직이고 인간은 인간의 윤리에 따라 살 뿐이다. 인간의 발명품은 인간의 소유물이듯이 『주역』도 인류가 발견한 인간만의 기호와 상징의 체계로 이해된다. 따라서 『주역』은 다분히 불완전하며 한정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역』의 세계가 태생적으로 자연을 모사한 데서 구성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이미 무언가를 본뜬 것인 한에 있어서 자연과 동일할 수는 없다. 이는 바둑 두기에 비유할 수 있다. 바둑 두기는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우주론에 바탕하고 있다. 제작자는 판을 방형方形으로 하여 땅을 본뜨고 돌을 원형圓形으로 하여 하늘을 본떴다. 그러나 그 원형의 바둑돌을 방형의 판 위 임의의 장소에 옮겨놓으며 바둑 두는 사람은 천지를 모상하여 두는 것이 아니다. 돌과 판이 자연을 모상하여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바둑 두기는 인간의 행위일 뿐이다. 따라서 역학이 자연학과는 별개라고 말해서도 안 되겠지만, 자연학 그 자체로 간주하는 것은 더더욱 적절치 않다. 『주역』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연구되었다는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소수림왕 2년 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를 교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서周書』 및 『구당서舊唐書』 「열전列傳」에는 고구려에 오경五經·삼사三史 등의 서적이 있었으며, 백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효경』 『논어』 등과 함께 『역경』을 전했다고 한다. 신라에서도 국학國學에서 『주역』을 가르쳤으며, 설총薛聰은 방언으로 구경九經을 읽고 가르쳤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더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대체로 삼국은 모두 『주역』을 강의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로 어떤 주석본이나 판본이 어떤 경로로 전해졌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고려시대에는 6대 성종 때에 국자감國子監을 두고 경학박사經學博士를 설치했으며, 문종 때 최충崔忠(984~1068)은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중시했다고 전한다. 윤언이尹彦?(?~1149)는 『역해易解』를 썼고, 『고려사』 「우탁열전禹卓列傳」에는 “우탁(1263~1342)은 경서에 통하고 더욱 역학에 깊어 복서卜筮가 모두 적중했다. 『정전程傳』이 처음 전래되자 동방에 아는 이가 없었는데, 우탁이 문을 닫고 한 달 남짓을 참구參究하여 해득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니 이학理學이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또 『고려사』 공민왕 19년 조에 과거에서 『주역』 시험에 정자程子·주자朱子의 주注와 고주古注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탁 무렵에 『이천역전伊川易傳』이 전래되어 퍼지기 시작했고, 고려 말 공민왕(1330~1374) 무렵에는 이미 『이천역전』 『주자본의朱子本義』를 비롯하여 송宋 이전의 고주들을 가지고 과거시험을 치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 이전의 고주는 왕필주를 중심으로 한 『주역정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주역』 연구는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이 쓴 『주역천견록周易淺見錄』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특히 주자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세종 원년(1419)에는 『성리대전性理大全』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 등을 수입하여 이학의 연원으로 삼았다. 세조 때에는 왕명으로 주희의 『역학계몽』에 대한 해설서인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1495)가 편찬되었고, 그 뒤로도 유빈柳斌(1520~1591)의 『고산역도孤山易圖』(1576), 퇴계의 『계몽전의啓蒙傳疑』(1557), 이덕홍李德弘(1541~1596)의 『주역질의周易質疑』,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역학도설易學圖說』과 『참위설經緯說』, 김방한金邦翰(1635~1697)의 『주역집해周易集解』, 서명응徐命膺(1716~1787)의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 김석문金錫文의 『주역도해易學圖解』(1697), 이현석李玄錫(1647~1703)의 『역의규반易義窺斑』, 조호익趙好益(1545~1609)의 『역상설易象說』 등의 역학 저작이 나왔다. 정조 때에는 경연에서 토론한 내용을 엮은 『주역강의周易講議』(1783)가 간행되었고, 실학자의 연구로는 이원구李元龜의 『심성록心性錄』, 이익李瀷(1681~1763)의 『역경질서易經疾書』, 정약용丁若鏞의 『주역사전周學四箋』(1808), 『역학서언易學緖言』(1820) 등의 주석서가 나왔다. 우리나라의 『주역』 연구 성과 가운데 특이한 부분은 『주역』에 대한 현토懸吐 작업을 들 수 있다. 『주역』에 토를 달아 읽었다는 것은 『주역』을 본격적으로 우리의 것으로 소화해서 전수했음을 의미한다. 『주역』에 대한 구결 작업으로는 이미 신라시대에 설총이 방언方言으로 9경을 읽고 가르쳤다고 하는 기록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고려 말에 권근이 역경에 토를 달았다고 하고, 세종은 경서의 구결사업을 명하여 최항崔恒·서거정徐居正 등이 참여했으며, 세조 12년 『주역구결』이 완성되었다. 이후에도 구결 작업은 계속되어 조목趙穆(1524~1606)은 퇴계의 질정을 받아가며 1596년 『주역』의 구결을 완성했고, 이이李珥(1536~1584)도 연보에 주역 구결을 저술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선조 때(1585)에 칠경七經의 언해가 완성되었는데 주역언해는 『정전程傳』을 위주로 했다. 한편 선조 때 최립崔?(1539~1612)은 주희의 『주역본의朱易本義』를 위주로 한 『주역본의구결周易本義口訣』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퇴계 이황은 주역의 구절을 우리말로 설명한 『주역석의周易釋疑』를 지었는데, 이것을 발전시킨 언해 번역 사업이 진행되어, 선조 때에 사서삼경 언해가 간행되었다. 『주역언해』는 『주역대전周易大全』에 의거하여 최립·정구鄭逑·홍가신洪可臣·한백겸韓百謙 등의 참여로 이루어졌는데, 정이의 『역전』과 주희의 『본의』가 다 사용되었다. 조선 말엽에는 정주역학을 벗어난 새로운 기풍이 일어났다. 김항(1826~1898)은 정역팔괘도를 그려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설명했고, 이병헌(1870~1940)은 캉유웨이와 교유하면서 금문今文 역학을 연구했다. 그리고 이달(1889~1958)은 『주역』과 홍범을 깊이 연구하고 이를 우리 고유의 단군사상과 결합해서, 당시 한국의 현실을 설명했고 새로운 역법을 제창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주역』은 신비에 싸여 있고, 해석에는 관점들이 난무한 상황이다. 조금 더 『주역』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해석의 방법론을 중심으로 글을 편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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