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머리말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쯤, 대학 입시에서 나는 운 좋게 평소 실력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결심을 굳혔던 철학과로 진학할 거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알렸다. 이때 내 가족과 지인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반대했다. “그 정도 점수면 장래가 촉망되는 더 좋은 학과에 진학해야 하지 않겠니?”라는 게 이유였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불행히도 두 차례 전학을 해야 했고,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삼각함수나 미적분 같은 것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 그 결과 진도가 정해진 학교 시험에서는 무난한 성적을 받았지만, 모의고사 수학 성적은 100점 만점에 20점 정도밖에 안 되었다. 희망 학교 및 학과 난에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입력하고 시험을 보면 컴퓨터가 “학생은 30점 이상이 부족하니 포기하십시오”라는 분석 결과를 내놓곤 했다. 그래서 전에는 나에게 “서울대만 간다면 철학과라도 상관없다”고 했던 주변 사람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다. 난감했다. 하지만 “철학과에 진학할 수 없다면 서울대 자체를 포기하겠다. 아니면 대학 진학 자체를 하지 않겠다”며 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애초의 계획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가? 당시 전도유망한 학과에 진학했던 선후배와 동기들 가운데 상당수는 법조인이나 의사, 기자와 같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지위에 올랐으며, 두각을 드러낸 몇몇은 사회 전반의 흐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한번쯤 그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면서 당시의 선택에 대해 떠올리지 않았다면 이는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판단은 항상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뤄져야 하는 법이다. 직장을 선택하거나, 살 집을 고를 때뿐 아니라 반려자를 택할 때도 두드러지는 장점이나 단점만을 고려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장점과 단점을 전반적으로 견줘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택이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내가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철학과 진학 이후 20여 년의 학자생활을 정리하고 야인으로 돌아왔을 때도 나는 그와 유사한 태도를 견지했다. 달리 마음먹고 융통성 있게 대처했다면 어쩌면 대학교수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몇 번을 되풀이하여 생각해도 그것은 내 길이 아니었다. 삶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서 철학과에 진학했고, 그것을 풀지 못해 박사과정까지 마쳤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안정된 위치에 설 기회가 몇 번 더 있었지만, 나는 계속 다른 길을 선택했다. 내게 선택지에서 제외시켰던 것들은 나에게 어울리지도, 편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삶을, 그리고 사회를 전반적으로 바라보고 내 갈 길을 주체성 있게 결정하는 능력이야말로 내가 공부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것을 찾아 떠난 여행의 전도는 석사학위를 받고서도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는데, 박사과정 동안 아주 뛰어난 석학의 저서 두 권을 번역하면서 나는 그 목표의 상당 부분을 달성했고, 미련 없이 학자의 길을 떠나왔다. 주체적인 행복의 첫 번째 필수 요소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것에도 얽매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인생과 사회에 관한 여러 의문을 풀었으며, 주체성을 갖게 되었고, 세상을 보는 나름의 눈도 지니게 되었다. 그건 아마도 앞서 말한 이런저런 대가를 치른 덕분이리라. 그런데 학자로서의 삶은 내 마음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당나라의 명문장가인 한유韓愈가 “마음속에 뭔가가 쌓여 있으면 소리를 내게 되어 있다”고 말한 것처럼, 그 흔적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글의 형태로 제 목소리를 내곤 했다. 내가 쓴 두 권의 교양서와 몇 권의 실용서가 그렇게 태어났다. 뿐만 아니라 인문학을 통해 얻은 논리적 사고능력과 언어 구사능력은 내 삶 자체를 변화시켰다. 다양한 청중을 대상으로 강의하고, 글쓰기를 하면서 좀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길을 추구하다보니, 앞뒤가 꽉 막혔던 독단적인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좀더 유연해지려 노력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무력과 재력이 힘의 척도였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논리와 언어 구사능력이 그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말 한마디 때문에 유명 정치인들이 낙마하고, 거대 기업이 무너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적 지식과 논리가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인문학자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 어느 날 미국의 인터넷 기업인 IDG의 한국 지사에서 인문학 칼럼을 의뢰해왔다. 여태 출간했던 책에서는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풀어내고, 현실 속에서 인문학이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내 나름의 의견을 펼친 좋은 기회라 흔쾌히 응낙했다. 인문학의 정체성과 효용, 사회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법, 우리의 일상적 사고에 감춰진 오해와 진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법 등등에 대한 내용을 인문학자의 입장에서 가능한 한 쉽고 흥미롭게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3년여 동안 연재를 했는데, 그 결과물을 모아놓고 보니 내 마음속에서 좀더 많은 대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소망이 생겨났다. 그 소망이 다시 한번 이뤄지게 된 것은 내게는 참으로 행운이었다. 아끼는 후학인 이선열을 통해 글항아리 이은혜 편집장과 강성민 대표의 지우知遇를 받게 될 줄이야 예상이나 했겠는가? 쓸모없는 글이라 여기지 않고 대중과 소통할 기회를 주었을 뿐 아니라, 좀더 짜임새 있고 유려한 흐름의 책으로 출간되도록 도움을 준 글항아리 식구에게 고개 숙여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2016년 5월의 어느 날 밤 경기도 광주의 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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