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책머리에 카뮈전집 열세 권째로 희곡집 《정의의 사람들》과 《계엄령》을 한데 묶어 펴낸다. 독자들은 번역의 속도가 느리다고 성화지만 딴에는 무더웠던 여름방학 동안 보따리를 싸들고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땀 흘려 노력한 결실이다. 이젠 정말이지 숨이 차다. 그런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40년 가까운 세월 저쪽, 대학 재학 시절, 당시 이휘영 교수님의 예외적인 열정에 힘입어 《정의의 사람들》의 프랑스어극을 최초로 남산 드라마센터의 무대에 올렸던 기억이 새롭다. 카뮈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뜬 지 불과 몇 년 뒤인 60년대 초반이었다. 우리는 무더운 여름날 호떡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두툼한 외투를 입고 추운 모스크바에서의 드라마를 줄기차게 연습했다. 지금은 작고했거나 뿔뿔이 흩어진, 당시의 불문학 교수, 학생들이 이 ‘섬세한 살인자’들의 배역을 나누어 맡았다. 그때 대학 2학년이던 내게 돌아온 것은 부아노프의 역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때 부아노프가 뱉어냈던 긴 대사가 귓가에 쟁쟁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하는 거지요. 회의에 참석하고 상황에 대해 토의하고 그 다음에 실행 명령을 전달하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죠. 물론 그것도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건 뭔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로 목숨을 거는 거거든요. 그런데 시가지 위로 어둠이 스며들 때 뜨거운 수프와 아이들, 그리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아내에게로 돌아가려고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틈에 끼여, 팔 끝에는 폭탄의 무게를 느끼며 말없이 꼼짝도 않고 서 있는 것, 그리고 이제 3분, 2분, 몇 초만 있으면, 번쩍거리며 달려드는 마차 앞으로 뛰쳐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테러거든요. 그런데 지금 또 그 짓을 다시 한다고 생각하니 온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에요. 그래요. 전 부끄러워요. 주제넘게 너무나 높은 곳을 바라보았던 것 같아요. 분수에 맞는 곳에서 일을 해야죠. 아주 조그마한 자리에서 말입니다. 그런 일만이 저한테 어울려요. 1905년 러시아의 그 젊은 테러리스트들이 품었던 희망과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꿈은 어떻게 되었던가? 만약 그것이 이념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그 이념의 결말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젊은이들의 드라마가 겨냥한 것은 정치도 역사도 아닌 윤리였다. “인간적 한계”의 윤리였다. 그 “한계”를 넘어서버린 이념의 비극이 한국전쟁이다. 《정의의 사람들》은 전쟁을 가져올 이념의 미래에 던지는 일종의 경고였다. 그래서 그들은 소리쳤다. “심지어 파괴 행위에도 어떤 질서가 있고 한계가 있는 법이다.” 《계엄령》은 지난날 우리가 일용할 양식처럼 수없이 겪은 드라마다. 그러나 그 삼엄한 세계 속에서도 문득문득 꿈처럼 생각나는 것은 저 카디스 여인들의 노래였다. 페스트의 어둠 속에서도 지중해와 그 육체는 카뮈에게 사랑이며 빛이며 구원이었다. 그리하여 승리는 사랑의 비를 맞는 우리네 여자들의 육체의 모습으로 오는구나. 보라, 행복에 겨워 빛을 발하는 뜨거운 육체는 마치 벌들이 잉잉대는 9월 포도송이처럼 탐스러워. 그 배의 언저리에는 포도밭에서 거둬들인 수확물들이 쏟아지네. 취기 어린 젖가슴의 저 꼭지에서는 포도 따기가 한창일세. 아아, 나의 사랑이여, 욕망이 잘 익은 과일처럼 터진다, 마침내 육체의 영광이 흘러넘친다. 하늘 구석구석에서 신비로운 손들이 꽃을 건네고 황금의 술이 다할 줄 모르는 샘처럼 솟는구나. 이제 승리의 향연이다. 우리의 여인들을 맞으러 가자! 번역을 위한 텍스트는 로제 키요가 주석을 단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야드판 《연극, 이야기, 단편소설》(Gallimard, 1962)과 폴리오판 《정의의 사람들》 그리고 최근에 새로 나온 폴리오판 《계엄령》(1998)을 사용했다. 그리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폴리오판에 실린 피에르 루이 레의 《계엄령》 서문과 일로나 쿰의 저서 《연극인 카뮈》에 실린 《정의의 사람들》에 관한 논문을 뽑아 번역하여 실었다. 2000년 10월 안암동 연구실에서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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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사람들·계엄령 알베르 카뮈 지음 / 김화영 옮김 책머리에 5 정의의 사람들 11 계엄령 127 부록 281 《정의의 사람들》에 부친 서평 의뢰문과 소개의 말 / 알베르 카뮈 283 《정의의 사람들》 해설 / 일로나 쿰 286 《계엄령》 서문 / 피에르 루이 레 313 카뮈 연보 / 로제 키요 333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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