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1 더 이상 노를 저을 수 없었어요. 손에는 물집이 생기고, 등은 타들어가고, 온몸이 아파왔지요. 한숨 속에, 맥없이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갔어요. 바다에 핀 꽃처럼, 아네모네처럼, 브라질 근해의 해파리처럼, 긴 머리를 흩뜨리며 천천히 팔을 저어 낯선 섬을 향해 헤엄쳤죠. 해류를 거슬러 노를 젓듯이 한참 헤엄쳐나가자 갑자기 해류에서 벗어났고 파도에 휩쓸려 만을 지나 해변에 닿았어요. 저는 뜨거운 모래 위에 드러누웠지요. 오렌지색 해를 쬐며 (유일하게 가지고 나온) 페티코트를 입은 채 몸을 말렸어요. 피곤했지만 감사했어요. 구조된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듯이.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어요. 구름인 줄 알았는데 환한 광채를 이고 한 사람이 서 있더군요. “표류됐어요.” 저는 마르고 쉰 목소리로 말했어요. “표류됐어요. 혼자예요.” 그러면서 손을 내밀었어요. 남자는 제 곁에 쪼그려 앉았어요. 흑인이었어요. 헝클어진 고수머리와 낡은 속바지를 빼면 알몸인 흑인. 몸을 일으켜 앉아 그의 편평한 얼굴과 작고 생기 없는 눈, 넓적한 코, 검지는 않지만 진한 잿빛의 먼지를 덮어쓴 것 같은 메마른 피부를 찬찬히 뜯어봤어요. 포르투갈 말이 통하는지 “아구아”라고 말하고는 물 마시는 시늉을 했지요. 그는 대답은 하지 않고 마치 저를 잡아서 요리할, 파도에 휩쓸려온 물개나 돌고래쯤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어요. 옆구리에는 창을 끼고 있었는데, 순간 저는 ‘잘못 왔어, 식인종이 사는 섬에 온 거야’라고 생각하고는 고개를 수그렸죠. 그가 손을 뻗어 손등으로 제 팔을 만지더군요. 제 살을 조사하나보다 생각했어요. 이럭저럭 숨이 잦아들면서 저는 차분해졌지요. 그에게서는 물고기 냄새, 무더운 날의 양모 냄새가 났어요. 계속 그렇게 있을 수만은 없어서 일어나 다시 마시는 시늉을 했어요. 아침 내내 노를 저은데다 전날 저녁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물을 마신 뒤라면 그가 저를 죽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요. 흑인이 일어서더니 제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더군요. 그는 온몸이 욱신거리고 뻣뻣해진 저를 모래 언덕 너머, 섬의 구릉 안쪽으로 올라가는 길로 안내했어요. 막 올라가려고 하자 찌를 듯한 아픔이 느껴졌는데 발뒤꿈치에 끝이 까만 긴 가시가 박혀 있었어요. 가시를 뽑고 문질렀는데도 뒤꿈치는 금방 부어올랐고 아파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걸었지요. 그는 업어주겠다며 등을 내밀더군요. 하지만 그가 가냘픈데다가 저보다 키도 작아 보여, 선뜻 업히지 못하고 머뭇거렸어요. 그러나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 한쪽 발로 껑충거리며, 그의 등에 기댄 채 페티코트를 걷어올리고 턱으로 그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밀쳐내며 산허리를 올라갔지요. 이렇게 이상하게 껴안는 자세가 그를 두려워하는 제 마음을 가라앉혔어요. 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지는 않았지만 저는 제 뒤꿈치를 찔렀던 가시뭉치들이 그의 발바닥 아래서 뭉개지는 것을 봤어요. 여행기를 많이 읽은 독자들에게는 ‘무인도’라는 말이, 부드러운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조난당한 사람의 갈증을 풀어주는 실개천이 흐르며 잘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그늘진 숲이 있는, 그리고 집으로 데려갈 배가 올 때까지 꾸벅꾸벅 졸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는 그런 곳을 떠올리게 할 거예요. 하지만 제가 표류한 섬은 전혀 딴판이었지요. 꼭대기가 편편한 거대한 바위산은 한 면만 빼고는 사방이 바다에서 불쑥 솟아 있고, 꽃도 피지 않고 잎도 지지 않는 칙칙한 수풀더미가 여기저기 박혀 있었어요. 섬 외곽에는 갈색의 해조류가 무성하게 자라 파도가 칠 때마다 해변으로 쓸려왔고, 악취를 풍기며 옅은 색의 커다란 벼룩 떼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어요. 사방에서 개미들이 왔다갔다했는데, 바이아(오늘날의 살바도르. 브라질 중부 해안에 있는 오래된 항구 도시`―`옮긴이주)에서 보았던 것과 같았고, 모래 구릉에는 또 다른 해충이 살고 있었어요. 발가락 사이에 숨어들어 살을 파고드는 조그만 벌레였지요. 프라이데이의 두꺼운 피부도 그 벌레에겐 소용없었어요. 발이 갈라져 피가 났지만 그는 개의치 않더군요. 뱀은 보지 못했지만 도마뱀은 많았어요. 녀석들은 햇볕을 쬐려고 대낮에도 나돌아다녔는데, 어떤 녀석은 작고 민첩했고 어떤 녀석은 크고 느려터졌으며, 턱밑의 주름은 놀라면 쉿 소리를 내며 부풀어올라 번들거렸어요. 저는 그 중 한 놈을 잡아 자루에 넣어 파리를 먹이며 길들이려 했었지요. 하지만 죽은 고기는 먹지 않아 놓아줄 수밖에 없었어요. 원숭이(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할게요)와 새가 있었는데, 새는 참으로 많았어요. 참새들(그냥 그렇게 불렀어요)은 수풀 이곳저곳을 짹짹거리며 하루 종일 날아다녔고, 갈매기와 가마우지 떼는 바다 쪽 절벽에 자리잡고 있어, 절벽의 바위를 배설물로 하얗게 만들어버렸어요. 바다에는 거북과 물개, 온갖 물고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짐승들을 벗삼아 지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그 섬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미 의미가 충만한 인간의 말에 익숙해진 뒤에 어느 누가 까악까악, 짹짹 하는 소리와 비명 소리, 물개 짖는 소리, 윙윙대는 바람 소리에 만족할 수 있겠어요? 마침내 우리는 산등성이 끝에 다다랐고 짐꾼은 멈춰서 숨을 돌리더군요. 저는 편편한 구릉에 와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야영지 같은 곳이 있었어요. 사방으로 출렁이는 바다가 뻗어 있었고 동쪽으로는 저를 떠나보낸 배가 돛을 올린 채 멀어지고 있었지요. 이런 와중에도 마실 물 생각이 간절했어요. 물을 마실 수만 있다면 지금 어떤 운명에 처한다 하더라도 상관없었죠. 그곳 입구에 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검은 피부에 수염이 덥수룩했어요. 저는 몸짓을 섞어가며 포르투갈 말로 물을 달라고 했지요. 그는 흑인에게 손짓을 했는데, 순간 저는 그가 유럽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요. 브라질에서 배운 포르투갈 말로, 영어를 할 줄 아는지 물어보았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이윽고 흑인이 물 한 그릇을 가져다주었어요. 저는 물을 마셨고, 그는 물을 더 가져왔어요. 그것은 제가 이제까지 마셔본 물 중에 가장 맛있었어요. 그 낯선 이의 눈은 녹색이었고, 햇볕에 바랜 머리카락은 밀짚 색이더군요. 나이는 예순 정도 된 것 같았어요. 여기서 일단 그의 모습을 그려보지요. 그는 템스 강의 뱃사공이 입는 것 같은 짧은 가죽조끼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속바지, 생가죽으로 만든 원뿔형의 큰 모자와 모피로 된 겉옷에 단단한 샌들을 신고 있었어요. 벨트에는 작은 나뭇가지와 칼을 차고 있었고요. ‘배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쫓겨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지요. 다행히 자비로운 선장이 섬에 내려놓아 그곳에 살던 흑인을 하인으로 삼은 정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수전 바턴이에요. 저기 떠나가는 배의 선원들이 저를 바다에 버렸어요. 그들은 선장을 죽이고 제게 이런 짓을 했어요.” 배 위에서 모욕을 당할 때에도, 선장의 섬뜩한 시체와 함께 배에 실려 파도 속에 버려졌을 때에도 울지 않았지만, 이때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맨땅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아픈 발을 감싸고 어깨를 들썩이면서 아이처럼 울자, 이 낯선 이(물론 말한 바 있는 크루소)는 저를 불쌍한 한 인간이라기보다는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온 한 마리 물고기인 양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어요. 크루소가 어떤 복장을 하고 있었는지는 이미 이야기했지요. 이제 그의 거처에 대해 이야기할게요. 편편한 구릉의 한가운데는 집채만한 바위 덩어리들이 있었어요. 크루소는 바위 사이의 귀퉁이에 기둥과 갈대로 오두막을 지었는데, 갈대를 잎과 함께 기둥의 안팎으로 정교하게 엮어서 지붕과 벽을 만들었더군요. 돌쩌귀 식으로 움직이게 만든 문이 있는 담이 크루소가 자신의 성이라 부르는 삼각형 모양의 거처를 이루고 있었어요. 원숭이의 손이 닿지 않는 담 안쪽에는 쓰디쓴 야생 상추밭이 있었지요. 앞으로 듣게 되겠지만 이 상추는 물고기, 새알과 함께 이 섬의 유일한 음식이었어요. 오두막 안에는 크루소의 유일한 가구인 좁은 침대가 있었고, 바닥은 맨땅이었어요. 프라이데이의 침대는 처마 아래 깔린 거적이었어요. 눈물을 닦으면서 저는 크루소에게 발에 박힌 가시를 뽑을 만한 게 있는지 물었지요. 그는 한쪽 끝이 넓고, 거기에 어떻게 뚫었는지 알 수 없는 구멍이 뚫린 생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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