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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집 예찬

나무 집 예찬

김병종 (글), 김남식 (사진)

(도서출판)열림원·2014-11-27

  • 문학
  • KDC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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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프롤로그 ? 시간의 우물 뭔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서 보면 그것은 어느새 과거가 되어 저만치 흘러가고 있다. 너나없이 시간이 빨리 간다고들 아우성이다. 추억할 것은 많아지는데 꿈꿀 시간은 적어진다. 우리네 삶을 광속으로 몰아가는 요물, 컴퓨터, 스마트폰. 그것들이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가 되어 인간에게 쉼 없이 시간의 채찍질을 가한다. “바쁘다 바빠. 빨리 가라.” 한다. 웬델 베리Wendell Berry라는 문필가를 좋아한다. 대학교수이자 작가인 그는 어느 날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시골에 집 한 채를 짓고 들어앉아 농사를 짓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면서 “컴퓨터를 쓰는 것이 혁신이라면 그것을 쓰지 않는 것은 더더욱 혁신”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그는 숲 속 작은 집에 살면서 빼앗기고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돌려 받는다. 그렇다고 너나없이 훌훌 털고 일어나 이 광속의 문명 열차에서 내릴 수는 없다. 모두가 웬델 베리가 되어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럴 용기도, 여유도 없다. 다만 번쩍번쩍 지나가버린 생애의 시간들을 아쉬워할 뿐이다. 가끔 TV에서 흑백 다큐멘터리 필름 같은 것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대체로 눈물이 찔끔 나오는 연민 같은 것이다. 허다한 결여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되뇌게 되는 것을 보면 인간은 미래를 기다리며 과거를 그리워하는 어정쩡한 존재인 것 같다. 가끔씩 의학, 공학 등 내가 종사하고 있는 예술 분야와는 영 멀게 느껴지는 쪽의 학자나 교수 들을 만나 어울리다 보면 얻어듣는 것이 많다. 그중에 특별히 흥미를 자극하는 것들은 주로 인간과 문명의 미래에 관한 예측들이다. 그런데 화려한 청사진처럼 보이는 이 미래 예측들은 예술 동네에 몸담고 있는 내가 보기에는 우울한 것들 투성이다. 유전자 메모리칩이니 뭐니 하는 것이 상용화되어 그것만 보면 개인사, 가족사를 순식간에 일별할 수 있다고 한다. 끔찍한 일이다. 혼기를 앞둔 젊은이나 그 집안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유전자 정보를 서로 챙겨보게 될 거란다. 그것도 그 옛날에 ‘양반’, ‘상놈’ 하며 족보를 찾던 것보다 더 재빠르게. 메모리칩에는 개인, 가족, 조상에 관한 일체의 정보가 저장되어 있어 당사자의 질병, 지능지수, 적성 같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모의 가리어진 이력은 무엇이며 할아버지, 할머니는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는지까지 일목요연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고모부가 탈세를 한 죄, 외삼촌이 병역기피를 한 죄도 나와 있고말고다. 회개의 개념 같은 것이 자리할 틈이 없다. 저질러지고 기록되고 나면 끝이다. 그런 식이다 보니 자연 머리 좋고 집안 좋고 건강 좋고 학벌 좋고 좋고 좋고……의 조건들을 두루 갖춘 이들만이 결혼도 하고 가정도 갖게 될 거란다. 사랑도 결혼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뒤섞여 알콩달콩 살아가는 세상 구조가 바뀌어버린다는 것인데, 더 혀를 내두르게 되는 것은 수명, 건강, 생식 등에 관한 예측이다. 앞으로 수십 년 내에 대체로 110세 안팎의 수명을 누리면서 누구나 한두 가지씩의 장기들은 줄기세포에 의해 교체하게 된단다. 사랑하는 남녀가 옷을 벗고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말에 신인류의 젊은이들은 이마를 찌푸리거나 책상을 치면서 웃을 것이라는 대목도 있다. 무슨무슨 캡이나 안경 같은 것을 쓰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면 몇 배나 더 강렬하고 몇 배나 더 완벽한 쾌감과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으니, 서로 몸을 맞대어 체온을 나누는 오늘날 같은 사랑의 방식은 “원시적이며 저급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죄르지 루카치의 말이었던가, 문명의 과도한 속도는 영혼의 진보적 타락이라는. 오늘날 인간이 그리는 인간의 미래상은 그런 점에서 도처에 축복이 아닌 재앙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현란한 문명의 광휘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래, 그때가 좋았어. 조금은 어수룩하던 그때 말이야. 좋은 줄 모르고 살았던 그때가 좋았어, 너무 좋았어. 그때, 그 2014~2015년 무렵 말이야…….” 광속으로 내닫는 시간에 떠밀려 가며 대책 없이 당하기만 할 것인가. 방법이 있기는 하다. 문명의 기기가 주도하는 시간을 따라만 갈 것이 아니라 한 번쯤 햇빛과 바람과 빗방울의 시간 쪽으로 눈과 마음을 돌려보는 것이다. 됐다고 본다고, 한가한 소리 하고 있다고 핀잔하는 당신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안다. 알고말고다. 그래서 이 한옥 에세이를 쓰기까지 오래 망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은 나무 집 한 채가 던져주는 사적 느낌들을 공적으로 논리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말이 좀 거창해졌지만, 내 느낌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나무 집에 배어든 시간과 햇살이 어떻게 삶을 어루만지는지 들려주고 싶었다. 작은 한옥 함양당에는 작은 오디오가 하나 있을 뿐 TV나 컴퓨터가 없다. 그 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일주일을 보낸 것 같은 시간의 질량을 느끼게 된다. 나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나무 집에 한번 시간이 고여 들면 좀체 빠져나갈 기색이 없다. 수련 위에 얹히는 낮닭의 울음소리처럼 길고 한가하게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다. 천천히 새벽이 열리고 아침이 오기까지 시간은 더디 오고 더디 간다. 창호에 햇살이 푸짐하게 비쳐 오기까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간단하게 조반을 챙겨 먹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산책을 한 번 하고 와도 점심때까지는 턱없이 멀다. 장터에 가서 국밥을 사 먹고 동네 목욕탕에 들렀다가 가게에서 이것저것 사가지고 들어온다. 산그늘이 내리고 실내의 빛이 나무 틈으로 서서히 빠져나가고 나면 평화로운 저녁이다. 도시의 삶에서는 증발되어버린 지 오래인 저녁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오죽하면 모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을 드리겠다는 구호를 내걸었겠는가. 그 어떤 거대 담론보다도 그 구호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저녁으로부터 밤까지가 또 멀고 길다. 마당에 나와 하늘도 바라보고 동네도 한 바퀴 돌아보건만 아직 어두운 밤은 아니다. 식탐이 있는 나지만, 자의 반 타의 반 저녁에는 소식(素食)을 하게 된다. 서울 집에서 아내가 챙겨준 것들은 동나고 그렇다고 이것저것 번다하게 나 혼자 잘 먹자고 챙길 염도 없는 것이니 자연 그렇게 된다. 다시 음악을 듣고 자정이 지나기까지 내리 읽는다. 이렇게 한 일주일 읽다 보면 자투리 시간을 틈타 거의 일 년쯤 걸려 읽을 양을 한꺼번에 읽게 된다. 이처럼 한옥에 고인 시간의 우물은 퍼내도 퍼내도 계속 차오른다. 결코 고갈되는 법이 없다. 나는 시간부자가 된다. 그러니 시간을 늘려 살고 싶다면, 광속의 시간에 저항하고 싶다면, 나무 집으로 갈 일이다. 고요히 시간이 내리는 그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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