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1 “ 맙소사,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시체 안치소? ” 기분 좋게 꾸벅꾸벅 졸고 있던 로테 고우드리안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 다. 자신이 나이가 들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기면 상태에서 깨어난 그 녀는 속눈썹 너머로 보이는 어느 퉁퉁한 여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처럼 맨몸에 연청색 천연 소재 가운만 하나 걸친 그 여자는 등 뒤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은 채 두 줄로 놓인 빈 간이침대 사이를 뒤뚱거리며 걸어오더니, 로테가 있는 침대를 지나 어둑한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랜 지병에 시달려온 로테는 완전 새것 같은 시 트 위에 노쇠한 몸을 누이고 있었다. 여자가 다시 지나가자, 로테는 본능적 으로 미끄러지듯 침대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바로 그때 여자가 불쑥 내뱉은 그 뜬금없는 한마디, 그건 독일어였다. 독일어! 여기 이 온천 휴양지, 광장이 나 공원마다 1, 2차 대전으로 스러진 영혼들을 새겨 넣은 기념비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 이 도시에 독일인이 무엇 때문에 온 걸까? 휴양원이라면 그 나 14 라에도 널려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곳 온천에? 로테는 눈을 감 은 채 주름진 하얀 실크 블라인드 너머, 온천 휴양원 건물 차양과 안마당 쪽 에 모여든 비둘기의 구구거림에 억지로 귀 기울이려 애썼다. 그렇게 머릿속 에서 떨쳐내려 했지만 로테는 계속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거슬렸다. 그 여 자는 로테 바로 맞은편 침대로 가더니 시트를 아주 요란스럽게 젖혔다. 그리 고 침대 위에 앉아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고는 보란 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 었다. 마침내 여자가 규정대로 자리에 눕고 얌전해졌음에도, 로테는 그녀가 만들어내는 침묵조차 거슬렸다. 로테는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감이 배 속에 서 목구멍으로 슬금슬금 기어올라왔다. 전날, 얼굴만 겨우 내민 채 토탄 욕 조에 푹 잠겨 있던 때에도 지금과 같은 정신적인 메스꺼움이 밀려들었었다. 로테는 뻣뻣한 관절들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시큼한 토탄 열기에 몸을 맡 기고 있었다. 그때 불안정한 메조소프라노로 옛날 동요를 흥얼거리는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와 욕실 안에 떠돌았다. 그 노래, 칠 십 평생에 처음으로 자신의 의식을 뚫고 들어온 그 노래 때문에 그녀는 불안 과 흥분이 희미하게 뒤섞였다. 그건 섭씨 40도의 토탄 욕조 속에 들어앉아 있는 병약한 노인네라면 당연히 경계해야 할 감정이었다. 심장마비 같은 위 험은 갈색 진흙 속에도, 이리저리 떠다니는 덩어리들과 작은 알갱이들, 그리 고 반쯤 썩은 잔가지들 사이에도 도사리고 있을테니까. 더 이상 열기를 참을 수가 없었던 그녀는 금속 욕조 속에서 간신히 일어나 비틀거리며 섰다. 초콜 릿색 액체가 그녀를 피막처럼 뒤덮어 몸의 울퉁불퉁한 굴곡들을 감춰줬다. 마치 이미 죽어서 땅속에 묻힌 것 같군, 그녀는 생각했다. 곧 머리를 감겨주 러 올 여자가 이런 해괴한 몰골을 보면 겁을 집어먹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구부리고 양손으로 욕조 가장자리를 단단히 움켜잡고 는 다시 진흙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노래가 딱 멈췄다. 느 15 닷없이 시작되었던 것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마치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 던 옛 기억이 불현듯 가물거리다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처럼. 그 독일 여자는 간이침대에 진득하게 누워 있지를 못했다. 몇 분 후에 그 녀는 다시 발을 질질 끌면서 낡은 마룻바닥을 가로질러 미네랄워터 두 병과 플라스틱 컵이 놓여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로테는 자기도 모르게 여 자가 하는 행동을 열심히 지켜보았다. 마치 자기가 그녀를 계속 감시해야 하 는 듯이. “ ‘ 실례합니다만, 부인 ’… ….” 여자가 느닷없이 로테를 돌아보며 학교에 서 배운 듯한 서투른 프랑스어로 들릴 듯 말 듯 물었다. “ 이 물을… … 마셔 도… … 되나요? ” 만일 로테가 프랑스어로 대답했더라면 이야기는 그걸로 깨끗하게 끝이 났 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얼떨결에 독일어로 대답했다. “ 네, 마셔도 돼요.” “ 아 그렇군요! ” 물 마시려던 걸 까맣게 잊어버린 듯, 여자는 반갑게 독일 어로 답하면서 로테가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독일 분이시군요! ” “ 아뇨, 네, 아니… ….” 로테는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미 도화선에 불이 붙은 뒤였다. 그 여자는 타닥타닥 불꽃이 타들 어가는 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그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 생김새나 몸의 외형은 전반적으로 넓적하고 둥글둥글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 다. 물러서지 않으려 하는 늙은 발퀴레*처럼, 그녀는 로테의 침대 발치에 그 늘을 드리우며 멈춰 섰다. 그러고는 로테를 내려다보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오딘을 섬기는 처녀 전사들. 16 물었다. “ 어디 분이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 로테는 입에서 충동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애써 되삼키며 답했다. “ 네덜란드요.” “ 하지만 독일어가 완벽하던데요! ” 여자가 포동포동한 두 손을 쫙 벌리면 서 말했다. “ 태어나긴 콜로뉴에서 태어났어요.” 로테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 그래요? 나도 콜로뉴에서 태어났는데! ” 콜로뉴, 쾰른.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내부, 절대적인 침묵 이외에는 아 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휴게실 안에 그 도시의 이름이 계속 울리자 로테는 콜로뉴가 저주받은 도시, 그곳 출신이 아니었더라면 더 나았을 곳, 한 민족 의 오만함에 대한 벌로 괴멸되어버린 도시라는 사실이 잠시 떠올랐다. 문이 열렸다. 뭔가에 정신이 팔린 중년 남자가 어기적거리며 들어왔다. 그 는 침대 하나를 골라 시트 속으로 소리 없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흐릿한 빛 속에서 남자의 데스마스크만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다. 그 독일 여자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다시 원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여자 는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 로비에서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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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부 인테르벨룸 2부 전쟁 3부 평화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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