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한국의 독자에게 한국어로 논문집이 나와서 너무도 영광이다. 동시에 다소 불안하다. 왜냐하면 이 책에 수록된 논문은 대체로 중국과 일본을 대상으로 삼았으며, 한국에 관해 직접 발언한 내용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현상의 면에서는 나의 ‘한국관’ 같은 것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국어를 할 줄 모르며 한국에 길게 체류한 적도 없다. 내게는 한국을 논할 만한 능력이 없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훌륭한 한국인 친구가 많이 생겨서 그들로부터 한국 사회의 독특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내게 그런 분위기는 ‘지식’보다 중요하다. 일본사상사를 연구한지 벌써 20년이 흘렀다. 내게 사상사 연구는 나의 삶 바깥에 있는 게 아니다. 어느 시기엔가 나는 ‘나와 일본사상’이라는 관계성을 자각하여 그것을 탐구하고 있는 중이다. 애초 나는 자신을 ‘외국사상 연구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외국인 일본의 사상을 대상으로 삼을 때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도 거의 생각해보지 못했다. 최초의 단계에서 연구는 말하자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나는 그저 일본사상의 매력적인 자원에 매료되어 되도록 깊이 파고들고 싶었을 뿐이다. 내게 사상이라는 것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국경이 없는 사상에는 역사의 맥락이 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야 ‘나와 일본사상’이라는 과제가 비로소 과제로서 성립될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주로 평론을 담았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동아시아의 상황은 격렬하게 변동하여 연구자가 지닌 기성의 인식방식으로는 변동하는 상황을 따라잡기 힘들며, 지적 생산은 말 그대로 위기에 직면했다. 한국과 북한 사이의 갈등과 교섭은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특히 3·11의 비상사태 이후 일본사회의 맨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중국도 여러 문제를 끌어안으며 ‘현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서양이론, 특히 미국산 이론에 친숙한 동아시아 연구자는 격렬한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고 분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상호 교류에 나설 경우 언제나 넘기 힘든 장벽에 부딪친다. 추상적인 이야기는 꺼내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누지 못한다. 논리정연하게 말할 수는 있지만, 모호한 대목은 피해간다. 요컨대 표면적인 문화 ‘교류’는 가능하지만, 문화의 벽 뒤로 숨겨진 미묘한 내용은 발신하지 못한다. 중국의 사상계에서는 현재 대(大)이론과 대서사가 유행이다. 그것들은 추상적으로 서술하는 지적 형태다. 물론 대이론 자체는 가치가 있으나 구체적 분석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생명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중국의 대학에서 박사과정 학생들은 대부분 구체적 분석으로부터 이론적 사고를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미 만들어진 이론의 결론을 빌려와 분석을 재구성하고 현실을 결론짓는다. 그 ‘이론’은 대체로 서양이론을 원형으로 하며, 중국 역사에 적용하면서 적당히 수정하는 식이다. 우리 동아시아 연구자에게 독자적 이론 생산이란 몹시 지난한 과제다. 선진국 지식인에게 승인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보이지 않는 헤게모니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잠재된 서양이론에 대한 콤플렉스도 지적 생산을 제약하고 있다. 특수성 추구에 관한 오해, 보편성이란 널리 여러 현상을 두루 아우른다는 오해는 동아시아에서 이론적으로는 서양화, 현실적으로는 본토화라는 풍조를 낳고 말았다. 그 결과 어느 샌가 우리는 서양 언어로 작성된 테제를 가지고서 대화하지 않으면 실어 상태가 되고, 서양 이론 없이는 그저 상식에만 기대어 현상을 분석하게 되었다. 가령 서양이론에 의지하지 않고 일본사상을 논할 때면 중국 그리고 한국과 무관한 ‘일본의 사상’을 상정하곤 하는데, 그런 사고방식이 ‘상식’의 대표적 사례다. 내가 종종 접한 사례를 들자면 “다케우치 요시미는 한국을 언급하지 않았다”며 그를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식이라면, 중국에 치중한 다케우치는 대국중심주의자로 비쳐질 것이다. 그런데 다케우치의 중국론은 결코 구체적인 중국만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오히려 구체적인 중국론(특히 루쉰론)을 통해 어떤 철학적 성질을 띤 문제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즉 서양에서 유래하는 ‘근대’라는 역사적 운동, 그 폭력을 받아들이면서 동아시아는 어떻게 자신의 주체성을 다져갈 수 있는지를 따져 물었다. 다케우치 요시미가 보여주듯 역사 속에서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동아시아에서 통찰력을 지닌 지적 생산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지적 생산이 반드시 이론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이론적 상상력과 창조성을 풍부하게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서양에 대립하기 위해 생산된 것이 아니며, 서양이라는 지역(이것도 하나의 정체(整體)가 아니라 다원적인 구성체지만)을 역사적으로 상대화하여 서양에서 등장한 가치 있는 지적 유산도 받아들인다. 다만 서양 역시 어디까지나 다원성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에 서양의 우수한 가치를 포함해 그것을 전제로 삼는 게 아니라 동양의 다원성과 마찬가지로 인류 사상의 일부로서 받아들인다. 일찍이 다케우치 요시미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강연에서 서양을 상대화한다는 발상을 내놓았다. 그가 루쉰을 주목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루쉰은 서양이론을 끌어다가 아시아를 해석한다는 통상의 방식을 철저히 깨부수었다. 물론 중국에서도 루쉰을 이론화하려는 연구가 한때 유행했지만, 그것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루쉰의 독특한 사상 유산을 계승하는 데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루쉰이야말로 이론(특히 수입된 이론 상품)에 의지하지 않고, 직관 경험에도 의지하지 않고, 통찰력으로써 경험을 재구성한다는 지적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 방식은 서양에도 있다. 니체, 벤야민 등은 모두 깊은 통찰력을 이론으로 가다듬지 않고 통찰력인 채로 제시해 세상에 공헌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결론을 인용하는 방식으로는 그들과 엇갈릴 뿐 제대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쉰도 다케우치도 그들의 담론 바깥에 존재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우리를 자신의 역사로 인도한다. 나는 그들로부터 ‘열린 동아시아’라는 시좌가 어떠한 것인지를 체득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을 그들에게 배워간 흔적으로서 독자들에게 바치고자 한다. 이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논문은 구체적 상황을 마주하여 작성했는데 모아서 읽어보니 뜻밖에 어떤 중심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모두 기성이론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눈으로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파고들어 안으로부터 사상 형성의 계기를 만들겠다는 전제 위에서 작성되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중국, 일본, 한반도 사이에는 일종의 ‘분단체제’가 존재했다. 그것은 분명히 한국과 북한 사이의 분단과는 다르지만, 어떤 의도적 단절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 단절의 현대판이 바로 냉전이며, 냉전 구조가 동아시아에서 성립할 수 있었던 뿌리 깊은 역사적 기반은 오히려 조공 시대의 ‘중심-주변’ 구조였다. 중심이었던 중국은 근대 이후 ‘근대화’의 위상에서 주변화되었다. 주변화 과정은 냉전 이데올로기와 합류해 중국 사회는 한국 사회나 일본 사회로부터 더욱 멀어져갔다. 그런 단절은 동아시아 공동체가 주창되는 오늘날 결코 국가가 나선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울러 우리 동아시아인의 일상 경험의 위상에서도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불가시한 단절은 문화의 벽에서 발생하여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어 왔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단절의 극복을 과제로 삼고 있다. 그리고 십 수 년 간의 지적 실천을 거치며 의지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님을 통감하고 있다. 단절을 넘어서려면 국가 단위의 발상을 해체해야 할 뿐 아니라 직관적 발상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한다. 다른 언어문화체에서도 유의미할 수 있는 사상의 계기를 특정 언어문화체로부터 추출해내려면 현상의 수준에서 논해봤자 소용이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식론의 수준에서만 보편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 중국인가 일본인가 한국인가는 부차적 문제다. 또한 나는 보편적인 것이라면 널리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보편성은 직접 가져다 쓸 수 있는 사상 상품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매개해 인류가 공통의 과제를 각기 다른 조건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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