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머리말 고독한 존재여, 우리 모두는 빈센트 반 고흐다 “한 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현재 시각 새벽 4시. 저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자판을 두드립니다. 빈센트 반 고흐,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2014년 가을을 이렇게 온전히 바치고 있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합니다. 그는 37세의 나이에 외로이 세상과 이별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자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합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감동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죽은 지 120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의 한 남자는 이 새벽에 일어나 그가 남긴 그림을 보고 감동하면서 그를 추모합니다. 이 자체가 신비함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그 신비함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지요.”(2014.?10.?27.) 그렇다. 나는 이런 마음으로 2014년 여름과 가을 3개월을 온전히 빈센트 반 고흐를 위해 바쳤다. 그의 그림 900여 점을 샅샅이 감상했고, 그의 편지 수백 통을 읽었고, 그와 관련된 수 많은 자료를 점검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그의 그림과 관련된 한 주제가 정리되면 이른 새벽을 이용하여 글을 써나갔다. 한 편 한 편이 완성될 때마다 떨리는 심정으로 내 글을 기다리는 친구들을 떠올리며 페이스북(이하 ‘페북’으로 줄인다)에 글을 올렸다. 연재는 49회에 이르러 막을 내렸다. 직업적 문필가가 아닌 내가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기한 일이다. 달리 말할 게 없다. 나로서는 혼신의 힘을 경주한 결과였다. 미술평론이란 분야에 발을 디뎠던 적이 없던 비전문가의 글을 전문가들이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혹시나 세상에 이런 유치한 고흐 그림 이야기도 있구나 하면서 콧방귀나 뀌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그런 평가에 괘념치 않기로 했다. 나는 평소 예술을 포함한 인문학의 분야는 누구나 공부하면 자신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인문 지식이란 결코 전문가에 의해 독점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나는 최선을 다해 이 글을 썼다. 반 고흐의 그림과 인생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니 그 어떤 평가가 두렵겠는가. 지난(2014년) 8월,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이것은 이 책 본문 제39화에서 언급한, 네이퍼와 그레고리가 쓴 고흐에 관한 새 전기 의 페이스북 페이지(page)다-를 발견했다. 무심결에 ‘좋아요’를 눌렀더니 페북에서 일주일이면 두세 번 고흐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그 그림 중에는 내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볼 때마다 탄성을 질렀다. 고흐가 이런 그림도 그렸단 말인가? 그림에 감동했고, 한편으로는 평소 고흐 그림에 대해 좀 안다고 했던 내 실력의 초라함도 함께 느끼는 순간이었다. 처음 몇 번은 내가 느낀 감동을 간단히 적어 그림과 함께 공유했다. 그런 것을 몇 회 거듭하면서 어느 순간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새롭게 빈센트 반 고흐를 연구하고, 그것을 성실하게 글로 옮겨, 페이스북 친구(이하 ‘페친’으로 줄인다)들과 공유하자! 이렇게 해서 나의 는 새로운 궤도로 진입했다. 초반 몇 회는 한 점의 그림만을 설명하는 방식이었지만 곧 주제별로 다수의 그림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고흐가 남긴 그 많은 그림 중 극히 일부만 다루다가 제풀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가급적 많은 그림을 독자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 매회 200자 원고지 5~6매 정도의 간단한 설명이 금세 10매 이상으로 바뀌었고, 고흐 관련 자료가 책상에 쌓임에 따라 20매로, 20화 이후에는 30매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주제에 맞는 고흐 그림을 찾아냈고, 그림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경우에는 그의 그림이 아닌 다른 화가의 그림이나 사진도 찾아 내 글과 함께 포스팅했다. 나는 기존의 고흐 관련 책을 참고하고 때로는 내 글에 인용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내 시각에 따라 그림을 설명하려 노력했다. 서점에 가면 고흐에 관한 책들이 널려 있는데, 독자들이 내 글을 읽을 이유가 조금이라도 있으려면 무엇인가 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3개월 동안 원고지 800매에 가까운 를 쏟아냈다. 어떤 주는 30매에 달하는 글을 주 5일 연재하기도 했다. 매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하는 자세로 마음을 정돈하고 자판을 두드렸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신들린 듯 글을 썼다. 마치 고흐가 마지막 70일을 보낸 오베르 쉬르 우아즈(오베르)의 여정을 내가 반복했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고흐는 오베르에서 그 짧은 기간을 살면서 매일 한 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 그것도 작품 활동 중 가장 큰 그림을 거기에서 그렸다. 절정의 붓질이었다. 그 기가 나에게도 전달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그간 쓴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면서 내 이야기를 조금 정리해보고 싶다. 우리에게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그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의 그림은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글을 쓴다고 할 때, 아무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글을 쓴다고 해도, 글 전체가 남의 이야기일 수가 없다. 적어도 내 글은 그렇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나의 성장 배경과 현재의 삶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고흐의 그림 이야기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고흐가 고독한 사람이었다면, 나 또한 고독한 또 한 사람의 고흐-고흐 아닌 고호? 호랑이띠인 나의 다른 이름은 고호(孤虎)다!-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을 보면 남의 그림이 아닌 내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것은 이 글을 읽어온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고흐다! 삶의 고독, 이것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문제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숙명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현대의 고독은 과거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현대는 이 고독이 구조적으로 심화되는 게 특징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 공장노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노동의 소외 현상이 일어났다. 내가 물건을 생산하지만 그것은 나와 관계없다. 노동의 소외가 한 세기 이상 계속되더니 이제는 정신의 소외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세상은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모든 의사는 네트워크 속에서 소통된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살을 맞대며 상대의 체온을 느끼는 일은 희귀한 현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전기가 끊어지는 순간 모든 것을 잃는다는 두려움 속에서 산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에 심각한 소외감을 안겨준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제 일과 정신에서 소외되면서,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상의 고독감을 느끼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고흐는 그런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그에게서 동병상련을 느낀다. 37년을 살면서 그가 세상으로부터 당한 멸시와 능멸, 그로부터 나온 좌절과 분노, 절대적인 고독감은 우리가 느끼고 살아갈 운명의 축소판이다. 우리도 얼마나 세상과의 관계에서 멸시와 능멸을 당하는가. 우리는 그런 세상에 대해 얼마나 좌절하고 분노하는가. 가족과 친구가 옆에 있다 해도 그것을 바꾸지 못한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고독한 존재다. 고흐의 그림은 고독한 그의 내면세계, 아니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우리의 내면세계를 시각화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린 그림에 대해서 잘 몰라도 그의 그림을 보는 순간 직관적으로 감동한다. 우울함, 적막함, 분노, 슬픔…… 이런 감정들이 그의 그림에 배어 있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안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울어준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예술은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알면 많이 보이고, 보이는 만큼 더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고흐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의 그림은 아무것도 모르고 봐도 감동적이지만 그 배경을 이해하면 더욱 감동적이다. 내가 지난 세달 간 그의 그림에 의미를 붙인 작업을 해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고흐 그림에서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 고흐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리뷰 남기기
로그인하면 리뷰를 남길 수 있어요.
리뷰 0개
아직 리뷰가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