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머리말 이 책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물음에 답하려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철학 혹은 철학자는 있는가? 빈번히 지성사적 전통의 찬란함과 유구함을 내세우지만, 저 물음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은 듯합니다. ‘있다’고 답하려면 꽤 오래전 역사를 들먹여야 하고, 최근의 역사에도 ‘있다’고 답하기는 어려우니 괴이쩍은 일입니다. 아무튼 한 권의 책이 될 만큼 수다를 떨었으면, 이 단순한 물음에 속 시원한 답을 했어야 마땅합니다. 미리 고백하자면,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조금이나마 답을 했다 하더라도 덜 여문 것입니다. 글쓴이들이 처음에 함께 공부하고 쓰려 했던 내용이 얼추 담기긴 했으니 일단락되었다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작 공부하며 글을 쓰9다보니 넘어야 할 산이 결코 낮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완결된 답이라기보다 답을 향해 계속 나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철학사를 포함하여 우리 지성사는 결코 짧지 않습니다. 유학은 물론이고 불교와 도교, 기타 관습의 경로로 이어지는 신념과 세계관 등까지 포함한다면 사실 그 시점始點은 추정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저 이렇게 얼버무리면 무난한 정도입니다. 우리 지성사는 아주 오래고 깊다고. 탁월한 승려도 있었고, 세계적인 유학자도 있었으니까요. 다만 어느 때부터인지 우리 지성사에는 선철도 명현도 없어졌습니다. 아주 없지 않았다면 그 수가 줄었다고 할까요? 아무튼 철학을 포함하는 지성사의 저변은 어느 순간부터 상당히 약화되었습니다. 다들 짐작하시는 대로 이 약화는 일제강점기와 더불어 시작됩니다. 어찌 보면 잘 납득되지 않는 일입니다. 일제에 의해 위세 높은 대학이 건립되었고 철학과도 설치되었으니까요. 독일을 비롯하여 서양철학이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체계적으로 전수되었고 졸업생도 제법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이른바 제국에 의한 학문교육 시스템의 근대화는 서구학문을 체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고, 해방 이후에도 이 틀은 급격한 변화없이 유지되어 어쩌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구철학이 대학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수되면서 전공자를 훈련·배출한 지 근 백 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 세월에 비하자면 우리가 이룬 철학적 성과는 그리 크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현실을 자양으로 다시 현실에 응답하는 ‘우리’ 철학의 흔적이 너무 미미한 까닭입니다. 남의 학문과 이론을 받아들임은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닙니다. 철학을 비롯하여 학문의 골간을 이루는 문제의식, 개념 등은 나름의 뿌리를 지닙니다. 역사나 정치, 제도, 관습, 종교는 물론이거니와 그에 기반을 둔 일상적 삶과 사건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방의 학문을 받아들임은 그러한 맥락 전체를 간파하기까지 참으로 지난한 과정이 됩니다. 낯선 나라에서 갈고 닦인 ‘말’, 이른바 추상적 개념을 다시 땅으로 끌어내려 어디서 자란 것인지 뿌리를 찾지 않으면, 도무지 그 같은 용어와 이론이란 밥에 섞인 돌처럼 쉽사리 삼켜 소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간혹 사람들은 식민지를 통한 ‘근대화’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역사적 변화를 앞당겼으니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성사의 저 같은 사정을 알고 나면 그렇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질적 학문의 체화에 걸린 시간과 노력을 뒤돌아보면, 결국 지성사적 변화란 ‘정가定價’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치러야 할 만큼의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식민지를 통해 학문적 근대화, 나아가 철학적 근대화의 기본적 틀이 갖춰졌다 하더라도 결국 이방의 철학, 그 대강과 전모가 드러나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근대 학문 및 교육 체제의 최초 도입 후 수십 년 간 제국적 색안경이 강력하게 작동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일본은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신성불가침한 대전제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에 위협이 될 소지가 있는 다양한 서구철학과 사상을 걸러내어 동경제국대학을 비롯한 근대대학 철학과의 커리큘럼에 반영했습니다. 이런 기조는 당연히 경성제국대학 철학과에 반영되었고요. 결국 우리 지성사에서 서구철학의 본격적인 수용이란 처음부터 일본적 스펙트럼에 의해 굴절된 것이었지요. 여기에 해방 이후에는 세계사적인 냉전체제와 국내 군사독재 틈바구니에서 이데올로기적 억압과 질곡으로 숨 막히는 서양철학 수용사가 지속되었습니다. 낯선 이론을 받아들이는 데 의당 치러야 하는 시간과 노력 외에 이데올로기의 가시밭길 사이를 헤매느라 우회했던 세월까지 더한다면 서구의 철학과 학문이 그나마 이 정도 정착된 일이 기적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결국 제국에 의해 근대대학과 철학과가 세워진 것이 서구정신의 요체를 이해하여 우리의 지성사적 전통과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일을 앞당겼다고는 결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외려 제국에 의한 학문과 지성의 지배가 본격화되면서 우리 지성의 역동성과 자율성은 급격하게 위축됩니다. 이 책에서 다룬 인물들 상당수는 유학자로 출발합니다. 즉 전통적 지성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지요. 하지만 격변의 역사와 현실 앞에서 스스로 달리 생각하고 달리 실천하고자 애쓰면서 독자적인 사유의 흔적을 철학사에 남기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서구열강이나 주변 강대국들의 위협적인 움직임을 감지하면서 전통적 지성사의 한계를 절감하고 새로운 사유와 실천의 기반을 창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권력이 학문과 지성의 세계까지 철저하게 지배하게 되면서 이러한 지성들은 외려 사라집니다. 이후 우리 학문의 역사, 철학의 역사, 지성의 역사란 서구정신을 갈래별로 받아들이는 일방적 수용의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지성사는 남의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결코 남이 주도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식민지 근대화’란 적어도 철학과 지성의 역사에서 형용모순에 불과합니다. 서구 근대의 가장 근본적 정신이 ‘자유’, ‘자율’ 등이라면 제국이 주도한 근대화는 우리 지성사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전개, 즉 ‘근대’적 전개를 오히려 철저히 가로막았기 때문이지요. 글쓴이들은 이렇듯 우리 역사만큼이나 뒤틀린 철학사를 아파하면서 이 책을 썼지만, 그런 통증을 생생하게 전달하기에는 미숙합니다. 이 책에서 다루지 못한 철학자들이 여럿 있으니 이 또한 부족함의 결과일 것입니다. 다만 향후의 정진과 보완을 약속하는일로 당장의 역부족이 장차 정녕 부끄러운 게 되지 않도록 하리라 다짐합니다. 끝으로, 글쓴이들의 작은 모교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여러 선배, 동학들의 후원과 가르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특히 이규성, 김교빈, 김재현, 이병수, 전호근 선생님께서 주신 조언과 격려에 각별한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아울러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주신 동녘출판사 이건복 사장님과 편집진에게도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2015년 봄, 이름 없이 스러져간 이들을 다만 기억해주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현대철학분과
목차펼치기접기
목차 ○ 머리말 ○ 8 한국의 ‘철학’과 한국철학의 ‘현대’ ○ 13 이병태 ‘철학’이란 말에서 낯설어지기 ○ 17 우리 철학사의 전환, 중세에서 근(현)대로 ○ 23 다르게 바라보는 ‘철학’과 ‘현대’ ○ 30 ‘현대’를 억압한 ‘현대’와 우리 철학의 가능성 ○ 34 전통사회의 동요와 새로운 사유의 출현: 성리학 비판과 평등한 인간관 ○ 45 구태환 조선후기 사회의 동요 ○ 47 현실중심적 학문관과 서양과학 수용 ○ 55 신분차별 비판과 평등한 인간관 ○ 62 이익 추구 긍정과 민생안정 대책 강구 ○ 70 새로운 사유의 맹아 ○ 74 최제우와 동학사상: 한울님을 모신 몸으로 산다 ○ 81 구태환 최제우의 생애와 동학의 발흥 및 전개 ○ 84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신다 ― 시천주 ○ 87 내 몸을 수양한다 ― 수심정기 ○ 99 평등한 새 세상의 주인이 된다 ― 개벽 ○ 103 동학의 한계와 의의 ○ 103 나철과 대종교: 역사적 실천을 통한 한얼의 회복 ○ 107 김정철 항일무장투쟁과 대종교 ○ 109 하늘, 땅 그리고 인간 ○ 110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 116 역사적 실천을 통한 한얼의 회복 ○ 119 새로운 철학전통의 정립과 역사적 실천 ○ 127 ○ ○ 박종홍과 국가주의: 강단 철학의 빛과 어둠 ○ 261 박영미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 263 서양철학의 수용, 향내와 향외의 지양 ○ 265 전통철학의 현대적 전승에 대한 자각 ○ 271 우리철학의 모색, 부정과 창조의 철학 ○ 274 국가권력과 결합한 철학, 일그러진 주체와 천명 ○ 276 함석헌의 ‘씨 철학’: 씨의 세계를 꿈꾸다 ○ 289 유현상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된 삶 ○ 295 존재의 중심, 세계인식의 주역으로서의 씨 ○ 298 역사의 격랑에서 뜻을 발견하다 ○ 299 씨에 의한, 씨을 위한, 씨의 정치 ○ 301 세계적 사유로서의 함석헌의 사상 ○ 303 우리 시대의 철학 ○ 317 이병태 철학의 고사, 철학의 흥행 ○ 319 수용사의 지속과 우리 철학사의 우보 ○ 322 역사적 현실과 달라진 수용사의 풍경 ○ 326 철학, 분열의 시대를 마주하다 ○ 331 글쓴이 소개 ○ 357 박은식의 민족주의적 양명학: 전통의 개혁을 통한 위기의 극복과 자주적 근대 모색 ○ 137 이지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 146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지켜야 하는 것 ○ 156 신학문으로서의 양명학 ○ 162 양지의 화신 ○ 162 전통의 회복: 민족적 위기의 극복과 근대적 개혁의 전망 ○ 162 신채호의 민중중심사상: 민중의 주체성과 절대자유의 정신 ○ 171 진보성 유자를 넘어서 민족운동의 삶으로 ○ 176 근대적 세계관의 형성과 ‘아’와 ‘비아’의 투쟁 ○ 177 민족에서 민중으로: ‘민중’이 ‘영웅’이다 ○ 181 신채호의 아나키즘: 민중(민족) 해방을 위해 ○ 184 영원한 자유를 위하여 ○ 191 신남철의 휴머니즘: 사회주의적 이상을 꿈꾸다 ○ 201 유현상 식민의 땅에서 자라 분단의 땅에서 잠들다 ○ 203 휴머니즘: 서양철학 수용의 철학적 토대 ○ 204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한 실천적 역사의식 ○ 210 신문화운동 주창과 휴머니즘에 기초한 사회주의적 이상 ○ 215 신남철 철학의 목표와 방법, 그리고 제국주의에 대한 진단과 패착 ○ 221 박치우와 위기의 철학: 철학의 당파성과 지식인의 실천 ○ 229 조배준 빨치산이 된 서양철학 1세대 ○ 231 실천으로서의 철학 ○ 234 파시즘에 대한 비판, 비판의 무기로서의 변증법 ○ 241 근로인민민주주의와 주체 ○ 250 해방 이후의 활동과 최후 ○ 250 ○ 박종홍과 국가주의: 강단 철학의 빛과 어둠 ○ 261 박영미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 263 서양철학의 수용, 향내와 향외의 지양 ○ 265 전통철학의 현대적 전승에 대한 자각 ○ 271 우리철학의 모색, 부정과 창조의 철학 ○ 274 국가권력과 결합한 철학, 일그러진 주체와 천명 ○ 276 함석헌의 ‘씨 철학’: 씨의 세계를 꿈꾸다 ○ 289 유현상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된 삶 ○ 295 존재의 중심, 세계인식의 주역으로서의 씨 ○ 298 역사의 격랑에서 뜻을 발견하다 ○ 299 씨에 의한, 씨을 위한, 씨의 정치 ○ 301 세계적 사유로서의 함석헌의 사상 ○ 303 우리 시대의 철학 ○ 317 이병태 철학의 고사, 철학의 흥행 ○ 319 수용사의 지속과 우리 철학사의 우보 ○ 322 역사적 현실과 달라진 수용사의 풍경 ○ 326 철학, 분열의 시대를 마주하다 ○ 331 글쓴이 소개 ○ 357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리뷰 남기기
로그인하면 리뷰를 남길 수 있어요.
리뷰 0개
아직 리뷰가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