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머리말 길 위에서 1 집의 시대가 가고 부랑의 시대가 온 건가. 존재의 집은 파괴되었다. 존재는 홈리스고, 존재는 노숙한다. 공장이 노동자를 내치고 학교가 학생들을 내치고 농토가 농민들을 내치고 정부가 국민을 내치고 나라가 이방인들을 내치면서, 집은 텅 비고 길은 꽉 찼다. 집과 직장, 정부에 대한 간밤의 꿈은, 새벽 몸서리치며 눈 뜬 곳이 길임을 아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우리가 잠깬 곳, 바로 길 위에서 이제 매일의 해가 떠오를 것이다. 집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 뜨기를 거부하는 이가 있다면, 길 위에서의 향수병은 암보다 치명적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모두 털고 일어나자. 길에서 먹는 법, 길에서 생각하는 법, 길에서 싸우는 법, 길에서 공부하는 법을 배울 때가 되었다. 이는 그 누구보다도 사유하는 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니체의 말처럼, 이제야말로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울 때이다. 2 이 책의 첫 문장은 2006년 봄에 시작되었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의 문장들은 내가 썼다기보다 나로부터 뛰쳐나갔다. 지난 2, 3년 간 한국 사회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어떤 불길한 조짐을 느꼈고, 몸 안 분자들의 난동을 겪으며 길거리로 나갔다. 더 이상 집 안에 있을 수는 없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성장해 온 신자유주의가 숙성을 마치고,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난 십여 년 간, 네 개의 정부 두 번의 정권교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발전과 숙성에는 어떤 단절도 없었다. 단지 그것을 책임지는 관리자들만이 달랐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그 숙성의 불행한 결과와 대면하고 있다. 환자가 덜 아픈 어제를 그리워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병이 어제 이미 시작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오늘 넘어야 하는 것은 어제 넘어야 했던 그것이다. 현 정부와 저강도 내전상태에 있는 대중들이 지난 정부, 지난 여당에 마음을 주지 않는 이유, 차라리 길거리에서의 머뭇거림을 선택한 이유는, 어제의 증세와 오늘의 증세를 왕복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대중이 부와 권력의 주변으로 밀려나고, 시간과 공간 그 어느 것도 보장받지 못한 불안한 존재로 전락한 것, 자기 나라 안에서 자기 정부를 잃은 내부난민으로 떠돌기 시작한 것이 과연 오늘의 일인가. 분명히 어제와 오늘은 규모도 다르고 수준도 다르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가 낳은 야수이고, 오늘은 지난 십년의 숙성이다. 3 내가 이 짧은 책을 쓰기 시작한 3년 전, 노무현 정부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겠다고 선포했다. 모두가 그 내용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정부의 테크노크라트들은 특전사 요원들처럼 기민하게 움직였다. 한편으로는 공청회를 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에 가서 협상 시작을 선포했다. 공청회는 규정상의 절차였을 뿐이다. 모든 게 요식이었고 모든 게 연출이었다. 자기 삶이 크게 좌우될 협상에서 대중들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나는 거기서 끔찍한 새로운 민주주의, 즉 ‘데모스demos 없는 데모크라시democracy’가 만화 속 거신병巨神兵처럼 태동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해 봄 새만금 개발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날 때도 그랬고, 평택 미군기지건설 방침이 정해졌을 때도 그랬다. 전 국민적 이해관계가 달려 있는 국책사업들은 조정이나 매개보다는 명령이나 통보 형태로 진행되었다. 왕이나 귀족이 아닌, ‘민중의 지배’demo-cracy를 의미하는 민주주의가 민중 없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민중을 추방하는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몇 가지 제도나 장치들의 이름에 불과하며 일종의 통치시스템 내지 통치기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자의적 군부 독재자를 물리쳤지만, 그 자신이 민중 배제적인 시스템이 되는 것을, 즉 시스템 형태의 독재가 탄생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최근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데모스 없는 데모크라시’, ‘통치시스템’ 내지 ‘통치기계’로서의 민주주의는 역설적이게도, 민주정의 전사前史인 줄 알았던 귀족정이나 군주정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시스템의 작동에 관여하고 있는 기술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시스템 작동의 키를 쥐고 있는 자들이 민주정의 이름으로 귀족정이나 군주정을 시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특정 분파가 민주주의를 장악하고, 민주주의가 특정 분파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느낌을 준다. 이명박 정부 아래서 이 경향은 더 노골화되었다. 분명 근대 민주주의의 공식에 따라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는 제도적으로 분화되어 있고, 언론의 권력은 권력의 ‘제4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막강하며, 시민단체의 권력 역시 역대 어느 정부보다 강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제도와 기구들은 현 정부 아래서 하나의 독재 기계가 되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현 정부의 정책들은 입안에서 실행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민중 배제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 정책들은 국민 의사를 대의한다고 간주되는 의회의 지지를 받으며, 무엇보다 사법부(특히 헌법재판소)에 의해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정부 정책에 대한 실재적인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진다기보다, ‘견제와 균형 시스템’에 의해서 정책이 추인되는 형식으로, 민주주의적 검증을 통과한 것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게다가 일부 시민단체들이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기구나 단체들을 고발하고 거기에 행정관청이나 사법부가 응하는 방식으로, 시민단체의 의견을 수렴하는 민주주의가 작동한다(방송이나 교과서 파동을 보라). 이제 비정부기구NGO와 정부기구GO의 구별은 여러 곳에서 흐려졌다. 이 끔찍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공론장을 주도하는 것은 언론들이다. 이들은 여론을 매개하거나 중개하기 이전에 여론을 주도하고 여론을 자임한다. 여론을 대의해서 언론인 것이 아니라, 언론이기에 여론을 대의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가 매개나 조정보다는 명령이나 통보 형식을 띠고 있다고 했지만, 어찌 보면 매개나 조정, 합의 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사라졌다기보다 명령과 통보, 추방의 체계 안으로 흡수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여전히 여야 정당들은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조정하고 합의를 이루어 낸다. 여전히 언론들은 여론을 매개하고 전달한다. 여전히 시민단체들은 운동을 조직하고 대의한다. 그러나 매개와 조정, 대의는 그 시스템에 의해 거부되는 사람들,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내려진 결정에 의해 배제되는 사람들을 산출하고 있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국민의 뜻을 받들지만, 그것은 국민 아닌 자들을 산출하면서이고, 합의와 협력을 이루지만, 그것은 ‘합의로부터 배제’되고 ‘합의를 통해 배제’되는 사람들을 산출하면서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벌어지는 이상한 상황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여야 간의 합의consensus는 대중과 정치권의 불화dissensus와 나란히 가며, 언론에 의한 여론의 독점적 매개는 그 매개를 거부하는 현상, 즉 미디어를 넘어선 미디어, 미디에이션을 거부하는 이미디에이션im-mediation, 직접 행동 미디어로 나타난다. 오랫동안 데모스 없이 권력을 키워온 시민단체들은 데모스들, 민중들의 사회적 투쟁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심지어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작년 촛불 시위는 이 모든 것들의 분출이었다. 4 이 책의 대부분은 ‘문 밖에서’ 쓰여졌다. 2006년 봄, 길을 나섰다. 반쯤은 참을 수 없어서, 반쯤은 이해할 수 없어서. 반쯤은 화가 났고 반쯤은 궁금했다.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전라도에서 서울까지 걸어오면서 매일 밤 세미나를 열었고 매일 밤 토론을 벌였다. 여기저기를 다녔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났다. 새만금 갯벌에 즐비한 시체로 늘어서 있던 백합 조개들도 보았고, 다 죽어가는 농촌의 60대 청년 부장도 만났으며, 바다를 잃고는 날품팔이로 복분자를 따러 가는 어부도 보았으며, 고등교육에서 밀려나는 가난한 아이들을 걱정하던 교사도 만났다. 단속추방에 쫓기던 이주노동자를 만났고, 철조망에 가로막혀 논 앞에서 절규하던 대추리의 주민도 만났고, 한강대교를 온 몸으로 기어가며 이동권과 활동보조인제도를 요구하던 중증장애인도 만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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