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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역 니체의 말Ⅱ

초역 니체의 말Ⅱ

시라토리 하루히코 편역 (옮긴이), 박미정 (옮긴이)

삼호미디어·2014-01-29

  • 철학
  • KDC 16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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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책의 선율에 대하여 전작 《초역 니체의 말》의 기저에 흐른 사상이 ‘자신에 대한 존경심’, ‘삶의 기쁨’, ‘자기 극복’이었다면 본서의 기저에는 ‘삶의 창조’, ‘고난의 수용’, ‘높은 것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다. ‘삶의 창조’란 매일 반복되는 삶의 방식을 자신의 의지로 하루하루 새롭게 만들어나감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대에는 굳이 만들어나가지 않아도 하루는 자동적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며, 같은 장소에 가고, 같은 것을 하고, 늘 하던 일을 적당히 해내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고, 위험한 일에는 몸을 사리고, 능숙하게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면서 안정되고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만족스러운 인생이라 여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할까? 그처럼 완벽히 보호되고 만족을 가져다주는 인생이 과연 현실에 존재할까? 존재한다손 치더라도 금세 사라져버릴 신기루 같은 착각일 뿐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현실의 인생에 안정이란 없다. 인간의 삶은 유동적이다. 흔들리고 불안정하며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 사람의 기분조차 배 속에 음식이 있느냐 없느냐로 180도 달라지는데 하물며 생활과 인생은 어떠하랴. 니체는 이 같은 인간 삶의 불안정을 살아 있음의 본질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러한 유동적인 변화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제시했는데, 그것이 ‘Werden’이다. 독일어인 이 말은 사물이나 사람이 무언가로 되어가는 것, 변화하는 것, 성장하는 것, 태도를 바꿔가는 것에 널리 사용된다. 니체 관련 번역서는 이를 ‘생성’으로 번역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생성의 나날들이다. 힘에 이끌릴 것인가, 퇴락할 것인가, 만들어낼 것인가, 게으름을 부리며 퇴행할 것인가, 획득할 것인가, 잃을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버릴 것인가, 기를 것인가, 죽일 것인가……. 정체도, 적당한 유지도 불가능하다. 늘 동적이다. 그것이 인간의 하루하루가 지닌 현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하루하루와 삶의 면면을, 꿈을 향해 자신의 결단으로 능동적으로 창조해나가야만 한다. 즉 자신을 부단히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치 세포가 침묵 속에서 생과 사의 창조를 반복하듯 말이다. ‘고난의 수용’이란 문자 그대로 인생의 고난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삶에서 맞딱뜨리는 고난은 재해도 벌도 아니다. 고통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에게 반드시 수반되는 것이며, 니체는 그 필연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고난을 수용하고 어떻게든 극복했을 때 인간은 변화한다. 낡은 자신으로부터 ‘탈피’한다. 그럼으로써 그전과는 삶의 풍경이 달라진다.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며, 감회도 달라진다. 자기 자신이 완전히 변화한다. 생성의 과정을 한 단계 거쳤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이루거나 창조해내는 경우에도 고난과 장애는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 고난과 장애를 뛰어넘지 않으면 무엇도 만들어낼 수 없다. 고난 없이 천재가 된 이는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고난은 사람을 성장시키고 살아갈 용기를 준다. 결론적으로 고난은 강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의 ‘생성의 나날’에 없어서는 안 될 은총과 같은 것이다. ‘높은 것에 대한 의지’란 인간이 가진 능력의 극한까지 도달하려는 의지를 말한다. 여기에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닌 자신만을 위한 고독한 고결함, 범상치 않은 적극성이 담겨 있다. 만약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세속적 탐욕에 함몰되어 버리면 자신이 딛고 있던 땅은 탐욕에 힘없이 점령당하고, 높이 있는 것에 대한 의지는 멀리서 차갑게 빛나는 별처럼 요원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높은 곳을 바라보는 것은 생성의 과정에 있는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면 결국 타락하고 쇠퇴할 수밖에 없다. 애매한 상태로 완충지대에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인생의 본질이란 유동과 생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완충지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않으면 세상의 탁류에 쓸려갈 뿐이다. 더불어, 높은 곳을 향하기 위해서는 험준한 낭떠러지를 등반할 때와 다름없는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고통은 그만큼 자신을 성장시키고 보다 많은 쾌락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 쾌락은 이 삶을 살게 되어 다행이라고 여기는 긍정과, 종국에는 모든 세상사와 풍경을 긍정하는 것마저 아우른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명명한 ‘성스러운 긍정’이다. 니체가 시종일관 자극적인 사상만을 전개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저서에는 섬세한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편린도 담겨 있다. 그러한 부분들을 《생성의 무죄》에서 몇 가지 인용하려고 한다. “정오에 울려 퍼지는 마을 탑의 종소리는 경건한 마음과 굶주림을 동시에 깨닫게 한다.” “작은 마을의 골목길을 비추는 휴일의 햇빛과 같이,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눈이 녹아내린 깊은 골짜기는 창백한 낯빛을 띤다.” “숲의 시냇물 곁을 걸을 때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선율이, 강하게 흔들리는 다채로운 소리가 되어 울려퍼진다.” 당시 사람들이 남긴 편지나 기록에 따르면 니체의 성품은 온화했다고 한다. 목소리는 조용하고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타인에게 그런 인상을 풍겼을지언정 그의 내면은 대쪽 같았던 것 같다. 니체는 비참하고 남루한 삶을 그저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수동적인 삶을 혐오했다. 생생히 살아 있는 자신, 고난을 극복하는 강인한 의지와 생성하는 삶의 세계관을 피력한 니체. 타오르는 무언가를 품고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들을 결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을 생의 철학자를 그려보며 글을 마친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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