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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매혹한 철학

시대를 매혹한 철학

야무차

삼호미디어·2017-02-15

  • 300쪽
  • 철학
  • KDC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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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책머리에 | 철학이란 본디 유치한 생각과 과대망상에 가까운 억지를 ‘뻔뻔스럽게 주장할 때’ 성립된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시대를 매혹한 철학》이지만, 일본에서 출간된 원 제목은 ‘열네 살부터의 철학’이다. 우선은 이에 얽힌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이 책은 니체를 시작으로 하여 데카르트와 칸트, 헤겔, 샤르트르, 비트겐슈타인, 레비스트로스, 데리다 등 이름만 들어도 그 철학적 위상과 무게가 압도적으로 와닿는, 대철학자들이라 불리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감히 나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그 위대한 철학자들이 ‘열네 살 아이’와 같은 수준이었음을 단언한다. 철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해 “철학이란 사실은 간단하다.”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핵심을 먼저 말하자면, 철학이란 본디 유치한 생각과 과대망상에 가까운 억지를 ‘뻔뻔스럽게 주장’할 때 성립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열네 살의 수준인가, 그것이 궁금할 수 있겠다. 열네 살이라 하면 정확히 중학교 1학년이다. 즉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있던 ‘어린이의 상식’ 즉 ‘어른은 옳다, 선생님은 훌륭하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다, 전쟁은 좋은 나라와 나쁜 나라가 싸우는 일이다’ 등의 상식이 그야말로 붕괴하는 시기다. 그래서 스스로의 생각으로 나름의 가치관을 구축하는 시기이기도 한데, 사실 철학도 이와 다름없다는 거다. 철학_오랜 상식을 의심하여 이전과 전혀 다른 관점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창조하는 학문 실제로 앞서 말한 철학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열네 살의 소년처럼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냈다. 그 가치관은 너무나 획기적이어서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점차 상식의 변화를 이끌어냈고, 어느덧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철학 사상으로 회자되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철학이 탄생한 배경이 그 철학자들이 특별히 명석하고 성숙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는 그 반대다. 말했다시피 그들 대부분은 ‘열네 살 수준의 발상’의 소유자로, 오히려 그 때문에 당시의 상식을 깨뜨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열네 살 수준의 발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지.”라는 야단에 “그래요? 그럼 선생님이 죽으라면 죽어야 하나요?”라고 반문하는 사고다. 철학자의 사고도 이와 비슷하다. 상식의 눈으로 보기에 ‘극단적으로 유치한 발상’ 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발상에서 세상의 상식을 뒤엎을 만한 철학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짚고 넘어가 보자.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사실은 틀렸음을 깨닫는 것, 열네 살 무렵에 누구나 경험하는 사건인 ‘상식의 붕괴’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이때 예상되는 기본적인 반응은 ‘타협’, ‘반항’, 그리고 ‘철학’이다. 가령 유아 또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에게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해.”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 또래의 아이라면 필시 아무 의심도 없이 순순히 “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는 당연한 상식이며 주변 친구들도 모두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는 커 가면서 깨닫는다. 선생님도 어디까지나 한 인간에 불과하며, 항상 좋은 선생님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존의 상식과 가치관이 붕괴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그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아이는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째는 타협이다. 기존의 상식이 완벽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에 반항해 봐야 아무 이득이 없으므로 타협하고 받아들인다. 즉 성인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렇군요. 선생님께 거역하면 안 되죠.” 둘째는 반항이다. 그 상식이 불완전한 것은 명백하므로 거기에 따를 필요가 없다. 즉 불량아, 무법자가 되기를 선택한다. “웃기지 마. 난 선생님 말 따위는 안 들을 거야.” 타협과 반항은 방향은 정반대이지만 결국은 같은 선택이다. 즉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 좌냐 우냐, 그런 차이에 불과하다. 이른바 보통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상식의 붕괴에 대처하지만 세상에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세 번째 선택지인 철학을 고른다. 이 선택지를 고르는 사람은 소위 괴짜라 불리며 세상과 어긋난 감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어긋나기는 했기만 엉터리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다만 극단적이다. 착실한 어른이라면 타협할 문제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돌진한다. 예를 들어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말에도 그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그 문제에 답하기 전에 우선 ‘세계 최악의 교사’가 있다는 상황을 상정해 보자. 만약 그 교사가 죽으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그것도 모자라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에 그런 교사는 없다고 반박하고 싶겠지만, 그들은 이런 극단론을 잘도 끄집어낸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전개해 나간다. “물론 무차별 학살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이야. 그렇다면 역시 선생님의 말을 항상 따라야 하는 건 아니겠군.” “그건 교사와 학생의 관계보다 ‘인간으로서의 올바름’을 우선한다는 뜻이잖아. 그런데 그거야말로 ‘학생이 선생님의 말을 듣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 아닐까?” “그렇지만 나는 선생님한테 그런 걸 배운 적이 없어. ‘인간으로서의 올바름’이란 무엇인지, 교사가 그것부터 명확히 밝히고 학생들과 공유해야 해. 그것이 교사와 학생이 맺는 관계성의 기반이며 출발점이라 한다면, 그런 논의도 없이 교사와 학생의 상하관계를 당연한 듯 강요하는 현대 교육에는 큰 문제가 있어!” 지금 이 이야기를 과대망상에 가까운 유치한 발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물며 이것이 ‘남자 중학생’의 말이라고 한다면 코웃음을 치며 상대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말을 저명한 학자나 대학 교수가 고상한 어휘로, 심지어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할 난해한 문장으로 썼다고 한다면 어떨까? “(잘 모르겠지만) 훌륭하다.”, “눈이 번쩍 뜨인 느낌이다.”, “두고두고 읽을 책이 될 것 같다.”라는 반응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모든 철학이 열네 살 수준의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것, 오해를 무릅쓰고 다시 말하자면 열네 살 수준의 극단적으로 유치한 생각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모든 철학서가 난해하지만 그 ‘난해한 부분(저자가 온갖 반박을 상정해 전문가용으로 엄밀히 집필한 부분)’을 걷어내고 보면 근간에 있는 내용은 다 이와 같은 성격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은 여러분 중 어느 누군가도, 듣고 보니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고 회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 무렵의 애처롭도록 유치한 생각을 관철했다면 나도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을까?’라고 말이다. 만약 그런 독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저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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