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작가의 말 오류 나는 그를 잘 모른다. 그에 관한 논문 한 편 읽지 않았고, 그를 찾는 여행 한번 가지 않았다. 무식한 자의 용기로 이 소설은 씌어졌다. 그가 남긴 자서전 한 권에 빌붙어 이 소설 비슷한 것은 겨우 지어졌다. 나는 그를 번역했다. 모든 번역은 오역이라고 배웠다. 그의 말과 나의 말이 다르므로 내가 그를 오해하지 않을 길은 없다. 그를 이해할 수 없는 내가 지어낸 그는 누구인가. 어떤 그인가. 내가 대답할 질문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나를 읽는 이는 나를 통해 그를 읽을 것이고, 그를 통해 또 나를 읽으려 하겠지만, 결국은 자기를 읽게 될 것이다. 모든 독서는 번역이고, 그러니 당연히 오독인데, 잘못 읽는 자가 달리 누구를 읽겠는가. 끝내 남는 것은 저마다의 그가 될 것이다. 수업 1978년 4월의 어느 날, 나는 검은 옷을 입고 교실에 앉아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사회 시간이었다. 칠판에는 몇 개의 단어가 적혀 있었다. 동학, 돌베개, 함평 고구마…… 선생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어떤 날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다. 5ㆍ16이 혁명이라고 배운 나로서는 알아듣기 벅찬 얘기였다. 선생은 불온했고 나는 멍청했다. 선생은 젊은 여자였고 나는 어린 남자였다. 그리고 세상은, 긴급조치의 세상이었다. 그날 선생은 몇 사람의 이름을 댔다. 함석헌, 장준하, 김주열…… 그 속에 그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이름이었다. 그에 대해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이름이었다. 선생은 그의 자서전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나는 그를 소설로 쓰기 전까지 그 책을 읽지 않았다. 내가 읽은 것은 소설이었다. 나중에 선생은 나를 불러 그해 나온 문제의 소설 한 권을 건넸다. 선생은 내가 그 소설을 읽고 의식 있는 학생이 되기를 원했다. 나는 그 소설을 밤새워 읽고 나서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듬해 선생은 감옥으로 갔다. 착란 언제부턴가 그는 더 이상 불온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소원도 우리의 소원도 다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그를 몰라도 되는 이유였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는 다만 떠다녔으며, 그의 많은 꿈은 오래도록 미루어졌고, 숱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는 정처없었다. 그에 관한 모든 소식은 풍문이었다. 그는 괴력의 장사였고 변장과 은신의 귀재였고 불세출의 지도자였고…… 하나의 전설이었다. 그를 전설로 만든 결정적인 사건은 물론 그의 죽음이었다. 자서전은 저자의 죽음을 기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에 관한 한 나도 꿀릴 게 없었다. 그렇게 그는 내 안에서 화석이 되었다. 그도 나처럼 불효막심한 아들로 살았다는 무늬 따위는 새겨지지 않았다. 그는 누구의 아들이 아니라 오직 그였다. 여러 해 전 술자리에서 어느 지인이, 그에 관해 기억할 만한 영화나 소설 한 편 없다는 게 신기하지 않냐고 했을 때, 나는 대뜸 내가 써보겠다고 나섰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냐고 묻는다면, 영화 만드는 재주는 없으니까 그랬다고 답하겠다. 그러니까 내가 믿은 것은 그가 아니라 소설이었다. 지인의 말에 따르면, 당시에 여야를 막론하고 대다수의 정치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이가 그였다. 그 점이 마음에 걸려 개운치 않았다. 그런 인물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들 안 쓰거나 못 쓰는 게 아닐까. 소설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흔들리는 나를 믿을 수는 없었다. 어느 쪽으로든 흔들리지 않기 위해 그의 자서전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죽으려고 스스로 목을 조르기도 했고,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극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그의 숙부는 자기 아버지의 장례를 훼방놓아 발뒤꿈치가 잘리기도 했으며, 그를 돕느라 전재산을 거덜내고 홀연히 사라진 이상한 사내도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인물들이 수두룩했다. 그가 맺은 역사적인 인물들과의 인연도 새로웠고, 게다가 그가 겪어야 했던 가족사는 우여곡절의 극치였다. 망명하기 전부터 일찌감치 그의 생애는 공과 사를 불문하고 파란만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의 자서전이 재미없었다. 그리고 또 이상하게도 그를 소설로 써야겠다는 생각은 굳어졌다. 나는 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불온 1980년 5월의 어느 날, 나는 또 검은 옷을 입고 교실에 앉아 있었다. 무슨 과목 시간이었는지 잊어버렸다. 나는 교과서 밑에 소설을 깔아놓고 읽기 바빴다. 걸리면 맞겠다는 각오였다. 얼마나 재미있는 소설이었기에? 어려운 소설이었다. 그때 내가 그 소설을 이해하며 읽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소설을 수업 시간에 몰래 읽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어쨌든 나는 계속 읽어나갔다. 가족과 헤어진 주인공의 처지가 내 마음을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동정보다는 동경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그때 나는 조금 비뚤어져 있었고, 세상은 완전히 망가지는 중이었다. 나는 불온한 척했고, 세상의 참상은 소문 저편에서만 아른거렸다. 그리고 소설은…… 그때 우리는 모두 소설을 읽었다. 그날 그 소설에 그의 이름이 나왔음을 기억하는 까닭은, 소설 속 인물들과 나의 처지가 닮았다고 느껴서였을 것이다. 내가 눈치 보며 읽는 소설 속에서, 그들은 가슴 졸이며 그의 묘를 찾아갔다. 그들은 경찰을, 나는 교사를 두려워했다. 우리는 모두 불온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공범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스릴이 있단 말이야. 불온한 자는 그 짜릿한 맛을 잊지 못한다. 한때 사람들은 그와 몰래 연루되는 아슬아슬함 속에서 불온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자유당 때 얘기다. 이제는 그의 자서전이 전국민의 교양도서가 되었다. 세상이 아무리 흉흉해도 설마 그 책이 불온서적으로 찍히는 날이야 오겠는가. 그의 자서전은 안온하다. 변명 그의 자서전은 광활하다. 안온하게 살지 못한 탓이다. 그의 드넓은 생을 전부 감당할 수 없는 나는 거두하고 절미한 끝에 간신히 한 시절을 붙들었다. 몸통보다 길고 통통한 꼬리였지만 내 몫이 아니므로 욕심내지 않았다. 한 도막 남은 시절만 해도 이십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그 세월을 통으로 밀고 나갈 힘이 내게 있을 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기에, 나는 그의 한 시절을 또 셋으로 나눴다. 그 시절 그의 이름은 두 번 바뀌었다. 그의 자서전은 건조하다. 군말이 없다. 중요해 보이는 대목을 그는 한 줄에 줄이곤 한다. 그럴 때 그의 글은 경전을 닮았다. 그래가지고는 소설이 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기에, 나는 그 한 줄을 한 장으로 늘이곤 했다. 반대로 한 장을 한 줄로 줄이거나 몇 장씩 건너뛰곤 한 것도 똑같은 짓이다. 뛰어난 기억력 때문에 그의 자서전은때로 장황하다. 군말투성이다. 그대로 둬가지고는 내가 읽어도 지루한 소설이 될 게 뻔했다. 늘이고 빼고 나누는 것으로 소설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소설은 무엇으로 되는가. 그 비법을 모르는 나로서는 더 늘이고 더 빼고 더 나누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느라 곳곳에 생긴 틈을 메우려면 거짓말이 필요했다. 내 본연의 일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신나게 꾸며냈다. 그런 재미도 없이 이 짓을 왜 하랴 싶었다. 그래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나는 그 경계 밖으로 나갈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소심한 탓이라고 해도 좋고 안이함의 소치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를 소설로 쓰는 나의 자세는 그토록 태만했다. 참배 2007년 6월의 어느 날, 나는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묘지였고, 소설의 초고를 끝낸 뒤였다. 비가 올 것 같아 우산을 들고 나왔는데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내 마음은 좀 들뜬 것 같기도 했고 무겁게 가라앉은 것 같기도 했다. 그곳을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바로 옆 운동장에서 축구경기를 본 적은 있었다. 어렸을 때였다. 그의 묘지가 새로 단장되고 기념관도 지어진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괜한 조바심이 났었다. 그 전에 한번 가봐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품었다가 곧 잊었다. 나는 그의 묘지가 어떻게 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어 조금 민망했다. 어떻게든 좋아졌겠지. 나는 서둘러 두 손 모으고 고개 숙이고 눈 감았다. 기도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묘지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때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경찰도 안 보이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자꾸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그 길을 편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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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수의 수업 시대 2 나의 소원 3 불혹의 청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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