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탕, 탕!” 두 발의 권총 소리가 청와대 근처에 있는 궁정동의 적막을 깼다. 그 소리를 신호로 십수 발의 총성이 콩볶듯 뒤를 이었다. 총을 쏜 사람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었고, 그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은 한국 현대사에 큰 획을 그었던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향년 62세, 5·16혁명으로 권좌에 오른 지 18년째 되는 해의 일이었다. 그날 새벽 5시, 김종필은 잠에서 깨어나자, 오랜 습관대로 샤워를 하면서 간밤의 꿈을 떠올렸다. 그는 꿈속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골프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이 제대로 맞질 않았다. 김종필은 옆에서 지켜보는 박 대통령을 의식하며 진땀이 나기 시작했고 예상 외의 저조한 스코어에 박 대통령은 파안대소했다. 육 여사가 세상을 떠난 후, 여간해서 보기 힘들었던 소년처럼 수줍고 천진스러운 웃음이었다. (오늘쯤 무슨 연락이 있으려나?) 아래층의 응접실로 들어서면서 김종필은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해봤다. 꼭 열흘 전인 10월 16일의 일이었다. 이날은 유신정권 수립 7주년이 되는 날. 청와대 영빈관에서 파티가 열렸다. 공화당과 유정회 소속 의원들은 물론이고 정부각료와 군장성, 청와대의 주요 보좌관들이 참석한 기념연회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날 따라 박정희 옆에 김종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청와대 실세들의 견제 때문에 흔하지 않은 일이어서 힐끔 차지철 경호실장을 쳐다보았다. 차 실장은 모르는 척 딴데로 시선을 돌렸다. (영감의 지시가 있었던 모양이로구만.) 김종필은 오랜 만에 박정희 옆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러나 영 먹히지가 않았다. 그래서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구자춘 내무장관이 심상찮은 얼굴로 급히 다가와서, 박정희에게 무언가 귓속말로 보고를 하고 있었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부산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시위사건을 보고한 것이었다. 이날 부산대학 학생 5천여 명이 유신 철폐와 독재정권 퇴진, 학원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교내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가두로 진출했고, 부산 시민들이 거기에 합세, 그 시각까지 야간 가두시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보고를 듣는 박정희의 안색이 달라졌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라두?” 구 내무가 돌아간 뒤에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박정희는 거기에 대해선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불쑥 “당분간 어디 안 가지?” 하고 김종필을 돌아보았다. “네, 서울에 있으려고 합니다.” 박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내가 곧 부를 테니 기다려.”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의례적인 빈말이 아니라 무언가를 결심한 듯 심각한 어조였고, 그래서 김종필은 조만간 박정희가 그를 부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빨리 만나야 할 텐데…) 김종필은 초조했다. 심상찮은 시국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로 정국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벼랑 끝을 향해 굴러갔다. 다음날인 17일엔 부산대, 동아대 학생들이 시민과 합세하여 파출소를 때려 부수고 KBS 부산방송국 건물과 기타 공공건물들을 파괴하는 과격 시위를 벌였다. 마침내 정부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런 강경책으로 시위가 진압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계엄하에서도 2천여 명의 부산시민들이 계엄령 해제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고 마산에서도 시민과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공화당 당사를 불태우는 등 극렬데모가 전국으로 번져갈 조짐을 보였다. 김종필은 대통령이 강경 일변도로 치닫고 있는 것은 그를 보좌하는 측근 참모들에 의해 귀와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동안 여러 차례 대통령을 만나 솔직한 시정의 여론을 전하고 그 수습책을 건의하려고 했지만 무소불위의 전횡을 일삼고 있는 차지철의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대통령 스스로가 ‘곧 부를 테니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날까지 청와대에선 아무 소식도 없었다. 김종필은 탁자 위에 놓인 조간신문을 펴들었다. 아침 6시였다. 박정희가 잠을 깬 것은 바로 그 시각이었다. 청와대 본관 2층에 있는 그의 침실은 육 여사가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 더욱 넓고 썰렁해 보였다. 박정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정원 쪽으로 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한겨울에도 예외없이 실천해 온 생활습관의 하나였다. 그리고는 이내 청와대 뒤뜰로 산책을 나섰다. 스피츠 종자인 애견 「방울」이 졸래졸래 뒤를 따라나섰다. (조짐이 심상칠 않아…)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조간신문을 펴 든 채 김종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신민당은 부산과 마산의 시위를 전면적으로 지지하면서 비상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공화당과 유정회는 야당의 이런 요구를 처음부터 묵살해 버렸고 오히려 김영삼 제명에 항의하기 위해 의원직을 사퇴한 신민당 국회의원들이 사퇴서를 철회하고 하루라도 빨리 국회로 돌아오는 것만이 시국을 수습하는 길이라고 맞대응을 했다. 어느 쪽이고 간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대결이었다. 게다가 신문은 윤보선 전대통령이 어제부터 자택연금이라는 기사를 싣고 있었다. (도대체 이 친구들이 어쩌려구 이러는 거지?) 김종필의 예민한 정치감각은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집권층의 불길한 운명의 그림자가 손에 잡히는 듯 뻔해 보였다. 무리수(無理數) 법원에서 신민당 총재의 직무집행정지 판결이 내리자 김영삼은 이 결정이 정치적, 도덕적, 법률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결정이라면서 기자회견 석상에서 처음으로 「박정권 타도」를 공언하여 정국은 더욱 혼란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때 불거져 나온 것이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기자회견문이었다. ‘카터 행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을 더 이상 지지해선 안 된다.’면서 ‘미국은 국민과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의 둘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할 때가 왔다.’고 발언함으로써 박정희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마침내 공화당과 유정회는 9월 22일 소속 의원 160명 전원의 이름으로 김영삼 총재에 대한 징계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 징계동의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그때까지 원칙을 정하지 못했었다. 9월말 경, 박정희는 박준규 공화당 의장서리와 태완선 유정회 의장을 청와대로 불러 격앙된 말투로 제명을 지시했다. 그 무렵 미국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해 오던 박 대통령은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 내용이 친미 사대주의자의 표본이라면서 제명뿐 아니라 구속까지 검토하고 있었으나 유혁인 정무비서관 등의 만류로 구속을 보류한 상태였다. 고향에서 쉬고 있던 김종필은 당의장 서리인 박준규의 전화를 받고 급히 서울로 올라왔다. 프라자호텔 중국관에 가니 이효상, 백남억, 백두진, 정일권 등 당 고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들…?” “대통령께서 김영삼 야당 총재의 옷을 벗기겠다는 겁니다.” 박준규 의장으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설명 들은 김종필은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야당 당수를 내쫓아요? 안됩니다. 절대로 안 돼요.” 이효상과 정일권이 즉석에서 동의를 했다. 그러나 백두진과 백남억은 침통한 표정만 지을 뿐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자 박준규가 난감한 표정으로 일어서면서 일방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당의 원로 여러분들께서 협력해 주십시오.” 제명 전날인 10월 3일 박준규, 태완선, 김계원, 김재규가 신라호텔의 한 객실에 모여 다음날의 전략을 의논했다. “오늘 아침 모 대사관에서 전화가 왔어요. 김 총재의 제명을 재고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김계원 비서실장이 이렇게 말문을 열면서 “방법이 없어요. 우리 네 사람이 각하에게 지금 올라가 재고를 건의합시다.” 하고 제안을 했다. 이론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네 사람이 청와대로 출발하려는데 차지철 경호실장이 나타났다. “무슨 소리들이요? 방금 각하를 만나고 오는 길인데, 각하의 뜻은 절대로 제명 쪽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청와대행을 고집할 수가 없었다. 10월 4일, 마침내 국회에서 김영삼의 제명동의안이 가결 처리되었고 이것은 한국 의정 30년사를 통해서 몇 가지 부끄러운 기록을 세운 꼴이 됐다. 우선 제명 1호라는 것이 그렇다. 제헌국회 이래 39건의 제명 동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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