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나는 1977년 여름에 처음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했다. 미?중 관계는 아직 정상화되지 않았는데, 마오쩌둥이 사망한 지는 채 일 년이 되지 않았고, 마오 주석이 후계자로 낙점한 화궈펑을 그의 병상 옆에 앉혀 두고 “당신이 일을 처리하면, 내가 안심하겠소.”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그린 정치 포스터가 가는 곳마다 붙어 있었다. 화궈펑은 1978년 12월까지만 집권할 터였다. 정치적 박해와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1949년 중국 공산당의 군대로 쟝졔스의 국민당을 물리치고 국민당과 그 추종세력을 타이완으로 몰아냈던 마오 만큼 중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 하고 있던 덩샤오핑이 이끄는 개혁적인 정부가 뒤를 이었다. 스물 네 살이었던 나는 상하이에서 목격한 퍼레이드와 축하 행사들이 덩의 정치적 복권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개방”이 바야흐로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그리고 문화대혁명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몇몇 외국인 마오주의자들과 함께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최초 40명의 미국인 중 한 명이었던 나의 삶 역시 변화시키려 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1960년대 초 중?소 분쟁 이래 중국은 거의 모든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있었다. 서방 세계가 마오 시대에 대해 알 수 있던 정보는 홍콩에 있던 학자들이나 정부 관리들에 의해 수행된 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나 좌익 “중국의 친구들”이 작성한 붉은 빛으로 물든 르포타주에 국한되어 있었다. 내가 학부와 대학원을 다니던 1970년대 미국은 인기 없는 베트남 전쟁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정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정부가 종래의 미국의 적들―중국도 그들 중 하나였다―에 대해서 그들이 정말로 그만큼 나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들을 믿을 수 없어 했다. 우리는 “인민 공사”에 대해서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는데, 미국 내의 반체제 문화 역시도 공동체 생활을 실험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인민 공사라는 말은 대단히 근사하게 들렸다. 우리는 또 중국에서는 “여자가 세상의 절반이다”라고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이 말은 지적, 정치적, 그리고 개인적인 영향력을 넓혀 가면서 대중적인 여성 운동이 되어가고 있던 서방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정말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슬로건이었다. “핑퐁 외교,” 또는 정치적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친선 스포츠 경기와 유명한 1972년의 닉슨과 키신저의 방문에 뒤이은 제한된 문화적 교류를 통해 우리는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환상적인 상하이 곡예사들의 공연에 사로잡혔는데, 어떤 여성 곡예사들은 후굴 자세를 취하고서 팔뚝으로 서 있는 채로 발을 사용해서 머리에 그릇들을 차곡차곡 포개서 쌓을 수 있었고, 남성 곡예사들은 원을 그리며 도는 자전거 한 대 위에 스무 명이 올라타 균형을 잡고 여러 가지 대형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우리는 빨간 볼을 한 소녀들이 “공, 농, 병” 프롤레타리아트의 한 구성원으로 묘사된 잉어로 가득 찬 그물을 그린 그림이나 풍년을 맞이한 들판을 그린 농민들의 소박하고 매력적인 그림들에 감탄했다.그러나 돌이켜보면 우리의 낭만은 기껏해야 순진한 것이었고 최악의 경우에는 위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가 프린스턴 대학 2학년 때부터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에 가서 살게 된 이유였다. 어쩌면 1977년 여름의 첫 중국 방문에서 모든 것이 내가 바랐던 것만큼 장밋빛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징후들에 좀 더 민감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속해 있던 여행단은 미?중 친선협회의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미?중 친선협회는 미?중 양국 정부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을 때 일반인들 사이의 유대 관계를 구축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조직된 기관이었다. 언젠가 우리가 베이징 발 시안 행 심야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우리들과 함께 2주를 보내기로 되어 있던 여행 가이드였던 싹싹한 중년의 여인은 열차가 정차해 있던 10분 동안 열차 플랫폼에서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 그녀는 나와 침대칸을 함께 사용했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고향에서 농민들로부터 “배우기” 위해 시골로 “하방”당한 그녀의 사랑스러운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0년 전에 그가 고향을 떠난 뒤로 그녀는 처음으로 다시 아들을 만났던 것이다. 그녀는 중국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등록되어 있고 그녀의 아들을 계속 추방 상태로 만들고 있는 거주자 카드 시스템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후커우(戶口)라 불리는 거주자 카드가 시골로 넘어 갔기 때문에 아들은 그 곳에 계속 잡혀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그에게 필요한 쌀, 식용유, 채소, 의복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을 살 수 있는 배급 쿠폰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아들을 끔찍이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우리 여행 그룹에 끼여 있던 한 화교 여인은 친척들과 연락을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고 마침내 잠깐 동안 친척들을 만나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당에서 나온 지도원들과 동행했기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친척들은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지 못했고, 그녀는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수척해진 모습과 겁먹은 듯한 태도 때문에 그녀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이러한 위험한 징후에 주의를 기울이는 대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강인하고 날씬하며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있는 이 나라에 이전보다도 훨씬 더 반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같은 푸른색이나 녹색 바지와 단정한 흰색 셔츠를 입었다. 머리는 긴 머리끈으로 묶거나 단발이었다; 화장은 하지 않았는데 정말로 화장품을 구할 수 없었다. 남성들은 머리는 덥수룩했고 치아는 좋지 않았지만 굉장히 매력 있는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나라 전체의 교통은 자전거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동차는 거의 없었고, 있어도 우리들 같은 외국인이나 서열이 높은 당 간부들과 같은 “특별한 손님”을 위해 따로 남겨 두었다. 중국인들도 우리가 방문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흥분하고 있었다―우리는 가는 곳마다 엄청난 수의 호기심 어리고 다정한 군중들을 끌어 모았다.그들은 키가 크거나 금발 또는 빨간 머리를 가진 불운한 외국인에게 마구 몰려들었다. 중국인들은 우리들에게 꼭 다시 돌아와 중국의 개발을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깊이 감동한 나는 보탬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1979년 초 중국 대사관으로부터 내가 후난 성에서 영어를 가르칠 요원으로 선발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아시아학을 전공하는 석사과정 학생이었다. 약 6년간에 걸친 중국어 훈련과 작은 키 그리고 어두운 머리색이라는 축복이 현지인들과 어울리게 도와줄 것이었기 때문에 앞으로의 경험을 위해서 다른 미국인만큼 잘 준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도착하면 듣게 될 충격적인 이야기들과 경험하게 될 감동적인 일들에 대해서 나는 정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중국에서의 이 년 반 동안 나는 친구들과 깊은 그리고 종종 위험한 우정을 나눴고 (외국인은 여전히 스파이로 간주되기 일쑤였다), 외국인이 방문하지 않았던 많은 곳들을 여행했으며, 오랫동안 지속된 악몽과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한 나라의 몸부림을 목격하였고, 하소연할 곳이 없던 사람들의 고통을 증언할 기록자로서의 나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후난 성은 마오 주석의 고향이었다. 마오주의는 당연히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극좌파 군인들이 내가 가르칠 후난 사범 대학의 권력을 쥐고 웅크리고 있었고, 나의 영어가 새로운 정부의 현대화 정책에 필수적인 도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내가 파견된 뒤로) 그들은 서방에서 외국인 선생이 온다는 사실에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다. “외국인 전문가”는 당시 중국 기준으로는 넓은 아파트와 캠퍼스에 단 하나밖에 없었던 에어컨을 제공 받았다. 에어컨을 켜면 학교 전체가 정전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에어컨 사용을 단념했다. 당 지도원―젊고 매력적인 학교 선생―이 나에게 배정되었는데 그녀의 유일한 임무는 가능한 한 매순간 나의 활동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숨 막히는 감시에 나는 맹렬하게 저항했고 결과적으로는 성공을 거뒀다.…
리뷰 남기기
로그인하면 리뷰를 남길 수 있어요.
리뷰 0개
아직 리뷰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