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제1장 상대주의의 여러 측면 인류학은 19세기에 나름의 조직과 자의식을 가진 하나의 학문으로 등장한 뒤로 광범위한 공공적 관심을 끌어 모은 여러 가지 논란에 휩싸여왔다. 이 논란들은 대체로 인민족속들 사이의 차이점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그리고 특히 서양 문명이 여타 인간 사회들과의 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지난 세기에 인류학자들을 끌어당긴 주요 논제 중의 하나는 인종이었다. 당시 알려진 최선의 증거는 인종들 사이에 정신적 능력에 차이가 있음을 시사했고, 그래서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들이 피부색이 옅은 사람들을 따라잡을 날이 올 수 있을지 여부에 질문이 모였다. 저열한 인종들은 영원히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아니면 조금씩 자신을 고양해서 고급 문명의 수준까지 오를 수 있을까? 대체로 인류학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두 번째 주요 논제는 인간들 사이의 이러한 차이가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자연적 원인의 결과인가였다. 대다수 인류학자들은 지질학에서 동일과정론자들이나 생물학에서 다윈주의자들처럼 자연적 인과관계를 주장했다. 그들의 생각에 미개인들을 열등한 지위로 떨어뜨린 것은 신의 의지가 아니라 인간 진보에 작용하는 일정한 자연법칙 때문이었고, 과학적 연구를 통해 그러한 법칙은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세기가 바뀌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논제들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연관된 학문 분야의 일부 다른 과학자들과 인류학자 자신들 사이에서 새로운 논란이 벌어졌는데, 외부인들의 눈에는 이런 논쟁이 지루하고 밀교적으로 비쳤다. 그러나 1920년 즈음에, 늦어도 1930년대에 이르면 인류학자들이 집필하고 강의하는 대상 독자층과 청중층은 전에 비해 확실히 훨씬 넓어졌다. 밀교적인 논제가 전혀 아니었음이 판명된 것이다. 그리고 1930년대 말엽에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류학은 지적으로 역동적이며 진취적인 학문의 하나라는 평판을 획득한 다음이었다. 뿐만 아니라, 논쟁의 중심에 다시 인종이 있었다. 인종에 따라 도덕적 지성적 차이가 나타난다는 19세기의 이론은 신뢰를 잃었다. 이제 인류학자들은 인민족속 사이의 차이를 문화적 조건화라든지 사회적 환경 등을 통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이 결과 인류학은 (수많은 사례들 가운데 몇 가지만 열거하면) 선택적 이민법, 인종 분리 정책, 미국 육군의 지능검사 등에 맞서 싸울 태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로 접어든 이후에 등장한 또 하나의 논제는 인간 사회 전 영역 안에서 서양 문명의 위치가 무엇이냐는 질문과 관련된다. 인종들 사이에 자연적 능력의 차이가 있다는 얘기를 인류학자들은 이제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높은 문화와 더 낮은 문화를, 개명된 인민과 원시적 인민을 구분하는 기준 자체를 문제시하게끔 만드는 증거들이 나타났다. 서양 문명은 단지 자신의 문화적 가치를 판단의 표준으로 삼기 때문에 자신이 여타 문명보다 더 나은 것처럼 상상한다는 논증이 펼쳐졌다. 우리가 진보라고 여기는 것이 우리와 다른 문화적 선호를 가지고 양육된 다른 인민의 눈에는 전혀 진보가 아니다. 그리하여 교육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류학자라고 하면 진보의 관념이나 서양 문명의 우월성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연상하는 경향이 생겼다. 또한 다른 생활방식들을 완전히 관인해야 한다는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원칙을 인류학자들로부터 연상하는 경향도 생겼다. 심지어 우리에게 가장 이색적이거나 기괴한 것처럼 비치는 문화마저도 우리 자신의 문화만큼이나 타당하고 알맞으며, 동등한 존중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저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 한 마디로 인류학자들은 역사를 거의 통틀어서 풍미해왔던 바와는 다른 자기정체성을 서양 문명에 제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성적 혁명이라 일컬어질 만한 변화를 개척하고 있었다. 인류학자들이 진보와 관인에 관해, 그리고 인간 사회들 사이에서 서양 문명의 위치에 관해 내놓은 제안들은 20세기의 문화 상대주의 이론에 담겨 있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는 여러 측면들에 불과하다. 그리고 20세기의 문화 상대주의 이론이 이 책의 주제다. 내 목적은 인류학에서 문화 상대주의 이론이, 또는 더 낫게 표현하면 윤리적 상대주의 이론이 (이 차이는 잠시 후에 논의할 것이다)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비판자들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아왔고 세계의 사건들과는 어떻게 부대껴왔는지를 서술하고, 20세기의 막바지에 수용될 수 있는 하나의 수정본을 제시하는 데 있다. 문화적 상대주의에 관한 설명으로는 루스 베네딕트가 하나의 원형을 제공했는데, 그녀의 논증은 두 부분으로 이뤄졌다. 첫째, 문화는 장소에 따라 다르다. 그녀의 말로 표현하면, “문화의 다양성은 끝없이 기록될 수 있다.” 둘째, 그러므로 절대란 없다. 행태라든지 또는 기타 무언가를 판단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원칙들은 우리가 그 안에서 양육된 문화에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그녀의 말로 표현하면, “행태의 어떤 양상에 관한 것이든지를 막론하고 서로 다른 여러 문화에서 각각 표준이란 긍정적인 극단에서 부정적인 극단에 이르는 폭을 아우른다는 것이 [문화적 다양성의] 하나의 논리적 귀결이다.” 그녀는 죽임이라는 행위를 예로 든다. 사람들이 모든 곳에서 죽임을 규탄하리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만약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국경을 넘나든다면, 그리고 두 나라 사이의 외교 관계가 단절된 상태라면, 죽인 사람의 사회 안에서 죽임이라는 행위는 비난을 받지 않는다. 한 남편과 한 아내 사이에 태어난 처음 두 아이를 죽이도록 정한 관습도 찾을 수 있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늙기 전에 자녀들이 부모를 죽이도록 정한 관습도 찾을 수 있다. “닭 한 마리를 훔쳤기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위쪽 젖니가 먼저 빠졌기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수요일에 태어났기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Benedict 1934a: 45-16). 멜빌 허스코비츠도 베네딕트와 비슷한 논증을 펼치면서 문화 상대주의를 제창했다(예컨대, Herskovits 1955, 1973년에 재수록: 14-15). 허스코비츠도 베네딕트처럼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논점에서 출발한다. 그가 보기에 세계 도처의 인민족속들이 가진 문화적 체계들이 폭넓게 다양하다는 것은 이견이 나올 수 없도록 인류학 연구에 의해서 밝혀진 하나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떤 절대적 표준도 어떤 고정된 가치도 있을 수 없다. “평가는 그 평가가 어떤 문화적 배경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상대적이다.” 문화 상대주의가 그토록 관건이 되는 까닭은 우리 문명의 정통성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확신에 찬 상대주의자에게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이든 실존적이든) 이념들은 관습의 문제일 뿐으로,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절대적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심지어 상식조차도 상대주의자에게 검토를 받게 되면 사라지고 만다. 상식이라는 것은 문화에 따라서 달라지는 관습적 지혜에 불과한 것으로 비쳐지게 된다. 만약 다른 누군가의 상식을 우리의 생활방식에 적용한다면, 우리의 실천은 그들의 실천이 우리에게 그렇듯이 낯설고 이색적인 것으로 보이리라는 결론이 뒤따른다. 문화 상대주의가 우리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실태는 말하는 습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의해 생생하게 예시된다. 중류계급 미국인들은 자기들보다 덜 부유하고 교육도 덜 받은 부류의 사람들에 비해 자기들이 말하는 습관이 더욱 정확하고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나 차 웁써” 또는 “걔 집에 웁써” 같은 용례들은 격이 떨어지는 형태일 뿐 아니라 생각 자체가 엉성하다는 표시로 간주된다. “쿨한데?”라든가 “털렸다”는 따위의 신조어들은 이들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혼탁시킴으로써 언어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모든 사투리는 정확하고 효율적인 소통을 위한 역량에서 전혀 손색이 없다고 주장하는 언어학자는 생각이 다를 것이다. 이런 사투리들을 더 낫거나 더 못하다고 보는 우리의 평가는 순전히 관습적인 서열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그러한 관습적인 서열은 언어학적 정밀도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계급과 위신의 문제인 것이다. 상대주의자가 펼치는 논변은 오늘날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거의 없을 문화화 과정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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