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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흑룡강성 오상시 조선족 노인들의 생활사

중국 흑룡강성 오상시 조선족 노인들의 생활사

이채문, 조현미, 여필순, 이현철, 문정환

(도서출판)책과세계·2013-06-30

  • 사회과학
  • KDC 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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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서 문 입쌀 한근에 3.50원 무당 생산량이 1700근을 웃도니 임대를 주는 사람도 호호 웃을만 하고 임대를 맡는 사람도 하하 웃을만 한 벼농사가 썩 잘 되는 땅 산이 없기에 나무가 없어 집집마다 쇠그물로 울바자를 막고 풀자원이 없기에 소 돼지를 사양하지 않는다 겨울에는 벼짚과 석탄을 때고 해가 창문 높이 걸려야 아침 상이 게으르게 차려진다 오전 10시쯤 되어서야 ‘밥 먹었어... 우리 집에 와 볼래...’ 전화벨이 울리며 새날이 깨어난다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곳이 인간을 녹슬게 만드는 것일까 -김일량 시인1)1) 김일량(金日亮) : 1958년 중국 안도현 출생. 시집 「남자의 피는 술이다」 등. 연변시인협회 회원. 의「흑룡강 오상행」 김일량의 시는 오상에서 생활하는 조선족2)2) 법률 제11690호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 제 2조 2항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대한민국정부 수립 전에 국외로 이주한 동포를 포함한다) 또는 그 직계비속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자를 ‘재외동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현지의 공식명칭인 조선족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김일량의 시에서도 표현하고 있는 ‘입쌀’은 광활한 만주땅에서 조선족이 처음 벼농사를 시작하여 경작해 낸 주식이다. ‘입쌀’은 단순한 곡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상에 이주하여 정착해 살아온 조선족의 상징일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족이 오상에 와서야 벼농사가 시작되었으며 오상의 ‘입쌀’은 이름난 ‘명품쌀’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선족의 한 맺힌 노력은 이 ‘입쌀’을 통해 증명한 것이다. 조선족들이 처음 오상에 터를 잡기까지 저마다 사연이 많다.3)3) 조선족의 중국 이주형태를 17세기 전쟁이민, 19세기 후반기의 자유이민, 1910년대의 망명이민, 1930년대 일제식지정책에 따른 관리이민 4가지 유형으로 나누기도 한다(황유복,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담론, 허명철(2012), 조선족 정체성 담론 재인용). 그러나 조선족의 대부분은 조선후기 만주로의 이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김춘선(2006), 중국 조선족사 연구현황과 과제). 1900년 초중반에 조선족들이 중국으로 건너와 살기 시작하였으며 오상 조선족의 많은 사람은 6살부터 13살까지 한국 고향의 모습을 기억한 채로 부모와 함께 중국으로 이주해 왔다. 일부 조선족은 중국에서 태어나 조선족과 결혼하여 삶을 일구기도 하였다. ‘내가 지금 중국에 들어오게 된 역사는 조선에서 일본놈들이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들이 타격을 받고 생활중고가 없고 해서 내가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승락씨 면담 중 일부, 2012년 1월 10일 오상시 노인협회에서 ‘…(생략)부모님이 중국에 들어오셔서 그 이듬해 앵목이라는 곳에 …(중략)… 저를 낳으셨대요.’ -윤옥순씨 면담 중 일부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났든 중국에서 태어났든 그들의 삶이 힘들었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무를 베고 산을 깎아 농사지을 땅을 만드는 고된 노동이 연일 계속되는 힘든 삶이 이어졌다. ‘추운 데 고생이 많았다’4)4) 이승락씨 면담 중 일부발췌. 2012년 1월 10일 이승락 자택에서의 면담일지. 라고 회고하는 그들의 목소리에서 과거 삶이 순탄치 않았음을 단번이 짐작할 수 있다. ‘그 때 그 생활이라는 것은 정말 죽지 못해 사는 것입니다.’ -박상노씨 면담 중 일부, 2012년 1월 10일 오상시 노인협회에서 조선족이 경작해 낸 오상의‘입쌀’이 유명해지기까지, 오상은 문자 그대로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개간하지 않은 땅에 불과하였다. 또한 김일량의 시에서 보듯이, 땅이 없던 조선족은 땅을 임대해5)5) 2012년 1월 10일 유경림씨의 면담 중 일부를 살펴보면, ‘남한테 밭을 임대한 지 10년 넘는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조선족의 삶이 가난하고 열악하였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개간하며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이주 후 정착해오면서 오상은 그때부터 ‘벼농사 왕국’, 옥토가 되었다고 자랑한다. ‘…(생략)지금 우리 한게 오상현에만 전 중국에 벼농사 왕국…(중략) 다 조선족이 시작했습니다.’ -박상노씨 면담 중 일부, 2012년 1월 10일 오상시 노인협회에서 ‘…(생략)조선사람이 들어와서 전체 중국에 옥토를 만들었지.’ -이승락씨 면담 중 일부, 2012년 1월 10일 이승락 자택에서 처음 이주 당시 조선족의 삶은 힘들었으나 벼농사만큼 열심이었던 일은 ‘교육’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벼농사도 발전하였고 교육도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을 하면서 배움과 노동은 함께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한족보다 조선족이 잘 살았다고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조선족의 근면성실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략)왜냐하면 중국에 조선족이 들어와서 제일 중시한 게 교육하고 수전 일군 것이니깐. 교육을 누구보다 중시했기 때문에 한족보다 발전이 빨랐다.…(중략)… 주요요인은 벼농사를 지을 줄 알고, 공부를 해서 출세하고 그랬단 말이야. …(중략)… 왜냐하면 우리 민족이 정말 용감하고 똑똑하고 수전 농사를 지으니깐 벼값이 쌀값이 그 때만해도 한족 강낭값보다 비싸으니깐요.’ -박상노씨 면담 중 일부, 2012년 1월 10일 오상시 노인협회에서 한족보다 비교적 풍요로웠던 조선족의 삶도 잠시, 힘든 시기가 다시 찾아온 것은 1966년부터 약 10년간 이어져온 모택동(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기6)6) 1966년부터 1976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모택동)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 운동을 말한다.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이었으며 그 힘을 빌어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권력투쟁이었다. 그러나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과도한 중공업 정책을 펼쳐 정책 국민경제가 좌초되는 실패를 가져왔다고 비판받고 있으며, ‘극좌적 오류’라는 공식적 평가를 받고 있다(두산백과). 였다. 중국 사회주의체제 하에서의 차별과 억압, 동화와 적응의 과정을 겪은 조선족은 특히, 문화대혁명이 끝나기까지 소수민족으로서 생존하기 위해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생략)문화혁명은 정치색채가 많기 때문에 한국에 친척 있거나 조선에 친척 있는 사람은 박해 많이 받았어요.’ -박상노씨 면담 중 일부, 2012년 1월 10일 오상시 노인협회에서 ‘…(생략)내가 한국에 사촌들도 있고 삼촌도 있지만 있다는 소리를 못했어요.’ -이승락씨 면담 중 일부, 2012년 1월 10일 오상시 노인협회에서 이러한 힘든 시기를 겪어온 현재 오상지역 조선족들은 노인들하고 아이들밖에 없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듯 오상지역 조선족은 노인조직7)7) 2012년 1월 10일 이승락씨 면담 중 일부를 살펴보면, ‘독보자는 오상에 노인조직이다. 독보자는 노인협회다. 독보자협회. 현에서는 독보조는 높은 기관이니깐 협회라한다. 농촌에선 독보자 독보자 하지. 한국에선 협회라 한다.’라고 노인조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을 만들었고 국가의 승인을 받기도 하였다. 대부분 이렇게 젊은 층이 줄어든 데에 ‘한국바람’을 그 이유로 꼽으며 사실 오상 조선족들의 자녀들 대부분은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생략)한국바람이 불어서 한국에 돈 벌러 가가지고’ -장석환 씨 면담 중 일부, 2012년 1월 ‘딸도 한국에 가있어.’ -윤옥순씨 면담 중 일부, 2012년 1월 ‘…(생략)아들하고 다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생략)’ -이승락씨 면담 중 일부, 2012년 1월 그리고 오상에 남아 있는 조선족들은 자녀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생활하며 젊은 층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조선족 집거지구가 점차 한족의 유입으로 다민족 집거지구로 변모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젊은 층이 사라지고 그간 조선족이 개간해 온 옥토를 구입한 한족들이 들어와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다음의 면담 중 일부를 보면 그들의 안타까움을 짐작할 수 있다. ‘이래 옥토를 우리가 개간해서 건설했는데 중국 사람들이 나가라 해서 나가는게 아니고 자기 발로 토지를 버리고 나가지. 아주 안타깝지.’ -이승락씨 면담 중 일부, 2012년 1월 오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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