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서 문 기차도 여기 와서는 조선말로 붕- 한족말로 우(嗚)- 기적 울고 지나가는 바람도 한족 바람은 퍼~엉(風)불고 조선족 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 바람 바람 분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늘을 나는 새 새끼들조차 중국 노래 한국 노래 다 같이 잘 부르고 납골당에 밤이 깊으면 조선족 귀신 한족 귀신들이 우리들이 못 알아듣는 말로 저들끼리만 가만가만 속삭인다 그리고 여기서는 유월의 거리에 넘쳐나는 붉고 푸른 옷자락처럼 온갖 빛깔이 한데 어울려 파도를 치며 앞으로 훌러간다. -석화시인1)1) 석화 시인은 1958년 연변의 용정에서 태어나 연변대학을 나왔다. 현재 연변작가협회 이사로 있으며, 그는 시단에 나온 이후 천지문학상, 진달래문예상, 해란강문학상 등 넓게는 중국 내의, 좁게는 연변 내의 각종 문학상을 휩쓸다시피 수상하고 있는 연변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http://blog.daum.net/kkkkimgyun/18148029에서 인출. 의 연변의 연작시2)2) '연변‘은 석화 시인이 최근에 쓴 시의 제목으로 일련번호와 부제를 붙인 22편의 연작시이다. 연변에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 연변의 풍광과 풍습, 연변 조선족으로서의 삶과 꿈같은 것이 22편의 시로 만들었다. http://blog.daum.net/kkkkimgyun/18148029에서 인출. 중「연변·2-기적소리와 바람」 석화 시인의 「기적소리와 바람」에서 묘사되는 연변의 모습은 한족과 조선족의 어울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족말과 조선말, 한족 바람과 조선족 바람, 중국 노래와 한국노래, 조선족 귀신과 한족 귀신은 민족의 구분 없이 함께 어울려져 사는 모습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연변의 조선족은 다른 지역의 조선족들에 비해 중국어(한어)와 한국어(조선어)3)3) 면담에 참여한 구술자들 대부분이 중국어를 ‘한어 혹은 한족어’, 한국어를 ‘조선어 혹은 조선족어’로 칭하였다. 두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는 연변의 조선족이 가진 장점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두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중국 주류문화에 적응하는 데에 유리함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연변지역 조선족의 경우, 할아버지 혹은 아버지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세대 즉, 2세대, 3세대, 4세대 등으로 구성되어 한국어와 중국어를 두루 잘 사용하고 있었다. 심지어 일부 면담자의 자녀들은 한국어보다 중국어를 보다 유창하게 사용한다고 응답하기도 하였다. 연변 조선족의 이중 언어능력은 지역 간판에서 잘 드러나 있었다. 모든 간판은 한국어를 먼저 표기하고 다음으로 중국어를 표시하고 있었다. 한국어를 먼저 쓴 것은 그들의 민족이 ‘한국’이라는 것을 나타내어 주는 하나의 표식이기도 하다. 또한 그들이 중국어에 능통하게 된 이유를 일부 면담을 통해 추론할 수 있었다. 한 이유는 중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중국어 공부가 필수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유는 길림성 교육청에서의 중국어 교육이다. 연변의 조선족들의 중국어를 배워야겠다는 동기와 길림성 교육청에서 실시한 중국어 교육이 연변 조선족의 이중 언어능력 습득에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여긴 조선족 자치주라서 조선글을 쓰고 밑에 한족글을 쓰잖아요. 주장도 조선 사람이구요.” -황세운씨 면담 중 일부, 2012 1월 13일 “…(생략) 처음에는 한어를 배운다고 해도 제대로 못 배웠습니다. 지금은 좀 늘어서 말은 알아듣고 내 앞에 말은 합니다. 그래도 초등학교부터 한족학교 나온 사람이랑은 비교를 못하죠. …(중략) 우리 손녀가 2학년인데 400개를 압니다.” -강청석씨 면담 중 일부, 2012 1월 16일 “이 넓은 땅에서 중국어를 모르면 발을 못 붙이니까 그래서 한족 학교를 가는 바람이 불어…” -이국순씨 면담 중 일부, 2012 1월 15일 “길림성 교육청에서 교육과학과장으로 사업하다가 그쪽에서 생각한 것이…이 연변지역에 조선족들에게 중국어 교육을 해야겠다.” -강순화씨 면담 중 일부 앞서 언급하였듯이, 연변 조선족의 대부분은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이주한 1세대가 아닌 2~3세대 이상을 구성되어 있었다. 주로 조선족은 중국 동북 3성에 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으며, 각 지역마다 이주한 조선족의 고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용정은 함경도, 목단강도 함경도, 북한에서 넘어와도 몰라요. 오상은 경상도, 그 사람들은 남한에서 간 사람들이고 길림, 반석, 림강 다 경상도, 심양은 평안도고…” -이국순씨 면담 중 일부, 2012 1월 15일 [중국의 동북 3성]4)4) 이국순씨 면담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하였음. 중국의 동북 3성에 주로 조선족들이 이주하여 정착하였는데, 이들의 고향이 다를 뿐 아니라, 이주한 시기에도 차이가 있었다. 1차 이민이라 하여 근대 이민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40년대 초까지 두만강, 압록강을 넘어서 이민 온 경우를 말하여, 광복 후에 이루어진 대규모 이민을 2차 이민이라 한다는 것이다. 특히 1차 이민의 경우, 1875년 중국에서 본국령을 폐지하여 많은 사람들이 건너와 농사짓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살기 위해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너오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 말 러시아 철로 부설로 인해 많은 인부들이 건너와 살기 시작하면서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10년 일본에 의한 조선의 국권 상실로 인해 독립 운동가들이 중국으로 대량 유입되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족 자치구가 성립된 것은 나라가 건국되면서 전국적으로 자치구가 처음 형성되었다고 본다. 연변의 조선족은 이러한 조선족의 이주와 정착 역사는 조선의 독립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 역사는 유럽이나 아메리카의 이주 역사와는 차별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조선족 이주 역사가 타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주적인 독립과 생존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며, 이들 역사는 자랑스러운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조선족의 이민사나 개척사, 투쟁사를 볼 때 다른 유럽이나 아메리카 등을 보다가 우리 자체로 와서 여기서 일본놈들과 싸우고 이 땅을 지켰다는 게 자랑스러운 거예요. 남에 나라에 와서 사는 게 아니고 우리가 피로써 이 땅을 지키고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는 것이죠.” -강순화씨 면담 중 일부 현재 연변에 있는 2세대~4세대 조선족들의 직업은 다양한 편이다. 철강관련 업무, 벼 품종 개발 관련 일, 전기관련 일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직업군이 다양하였다. 그들이 2~3세대라면 이주 1세대 즉, 할아버지 혹은 아버지는 농업을 통해 정착생활을 이루었다. 힘들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 자녀들의 교육이었다. 한국 특유의 교육열 때문일까? 그들의 자녀는 대부분은 아버지 세대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회고하기론 조선족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있는 것이 학교라고 말하였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야학을 하던지, 자녀는 꼭 학교 교육을 받도록 장려하였다는 것이다. “…(생략) 크면서 혼자서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알고 그런데 어릴 때 어머니가 농사짓던 기억은 납니다.” -강청석씨 면담 중 일부, 2012 1월 16일 “중국에 조선민족이 있는 곳에는 꼭 학교가 있었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있던 곳에 학교는 없었지만 야학을 꾸려서 낮에 일하고 밤엔 공부를 시켰습니다.” -엄순철씨 면담 중 일부, 연변대학교 노인대학에서 면담에 참여한 조선족들 대부분이 중국 정부로부터 생활보조금을 받으려 생활하고 있었다. 생활보조금은 연금형태로 지급되며, 그들의 면담을 통해 알게 된 하나의 사실은 농민호적과 노동자 호적으로 나누어져 생활보조금의 지급여부가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농민호적은 농민으로서 노동력을 상실하게 되면 퇴직금이 없으며, 연금도 없고 자녀들이 부양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호적은 생활보조금을 정부로부터 일정금액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생략) 노동자 호적하고 농민호적. 농민은 노동력만 상실하면 퇴직금이 없어요. 연금도 없고, 자녀들이 부양해요. 옛날에 우리가 살아오듯이, 그런데 노동자는 저 같은 경우에는 퇴직금이 다 있잖아요.” -지은철씨 면담 중 일부, 용정 지신진에서 “한 달에 55원, 많지 않습니다. 국가적으로 100살은 한 달에 1000원씩 주고 90세는 지난해 200원, 올해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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