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작은할머니 연가 내게는 외할머니가 큰할머니 작은할머니 차례로 두 분이었다. 외갓집은 하얀 백사장이 눈부신 강가에 나루터가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길이 끝나는 곳, 길 어구지에서 보면 길이 합해져서 꼭대기로 보이는 집, 안마당, 바깥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마을에서는 제일 큰 집이라 했다. 취학 전까지 나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마도 그때가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동경유학까지 마친 분답게, 교양과 학식을 갖춘 분이었다. 외가 집안은 외할아버지를 유학까지 보내 공부시킬 정도로, 온 동네가 알아주는 부농이었다. 지주집안 외아들을 남편으로 모신 분이었지만, 큰할머니는 신식학교든 구식학교든 학교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분이었다. 밥하고 빨래하고 들일하면서도, 자식 낳아 기르고, 식솔들 뒷바라지하는 전형적인 조선나라 여성이었다. 그 시절 여성을 얽어맨 인습이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이었다. 그중 칠거지악은 어서 빨리 사라져야 하는 인습이었다. 특히 전통이란 미명하의 남아선호사상은 여성에게는 살아있으면서 겪어야 하는 지옥이었다. 결혼한 여성은 필히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지상명령, 이 의무 아닌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아내이자 어머니이면서도 죄인이었다. 죄인이므로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악법이기도 했다. 조강지처(糟糠之妻)는 칠거지악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불문율은 효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딸만 내리 셋을 낳으셨으니 몸 고생은 차치하고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독자로 이어지는 집안에서 아들이 없었으니 난감한 일이기도 했다. 집안어른들은 전라도 산골마을 가난한 집 딸이었던 작은할머니를 소실로 두게 했다. 마침내 작은할머니에게서 딸 하나, 그리고 그토록 소원하던 아들까지 두게 되었으니 씨받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큰할머니의 막내인 셋째 딸이었다. 작은할머니는 막내이모와 외삼촌의 생모이므로, 혈육으로서의 외할머니는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는 6.25전쟁 때 돌아가셨다. 때를 같이하여 집안은 토지개혁 등의 사유로 토지와 재산을 잃었고, 가세는 기울었다 한다. 외할머니 두 분은 자식을 키우며, 특히 독자인 아들을 합심하여 금자동이로 키우는 과정에서 친형제처럼 의좋게 지낼 수 있었다 한다. 평생을 아들에 포원 진 큰할머니는 딸들만은 아들 많이 낳고 근심걱정 없이 살라는 바람으로, 딸들 모두를 아들 많은 집만 골라 시집을 보내셨다 한다. 큰할머니의 바람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닌 듯, 엄마도 할머니 닮은꼴인 양 위로 삼녀이고 막내로 아들 하나를 낳아 건지셨으니 구사일생이 따로 없다. 삼녀 일남 더불어 셋방살이가 어머니와 우리 가족의 도시생활의 출발이었다. 의식주와 교육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엄마는 손도 좀 덜고 입도 좀 덜어야 했다. 이미 학교에 들어간 두 언니는 두고, 취학 전 어린아이 겨우 예닐곱 살 된 나를 잠간 동안이라며 외갓집에 맡기게 되었다. 그것이 오히려 행운이었다. 한적한 시골, 초가집, 강가, 나루터, 뱃사공, 빨간 뱀 딸기, 까맣게 익은 까마중, 졸졸거리며 흐르던 시냇가, 산기슭 옹달샘, 산 속의 예배당과 이상스럽고 경이롭던 상여행렬, 무서운 상엿집 시루떡에 촛불 켜고 빌던 모습, 명절날 제사풍경, 전통적 혼인잔치 긴 수로에 물내려가던 풍경, 가을날 볏 집 창고, 발 굴러 벼 털던 기계, 멍석 깔고 들깨 털기, 고구마 캐기, 감 따기, 밤 털기, 땅콩 밭 메기, 막걸리에 새참, 시큼하니 맛있던 술지게미, 무채를 가득 넣고 찌던 무시루떡 머슴들이 살던 사랑방의 퀴퀴한 냄새, 뭐든지 다 들어 있을 범하던 커다란 광 여름에 우물가에서 할머니와 목욕 하던 일 등, 가지가지 어리던 날의 기억과 기중 빛나던 추억은 모두 외갓집에서 보냈던 그 시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내가 외가에서 지내는 동안 온갖 정성들여 먹이고, 씻겨주고, 입히고, 보살핌을 준 것은 작은할머니였다. 어린 시절이라 세세한 기억은 없지만, 작은할머니는 늘 눈물이 많고 정이 넘치는 분이었다. 사람이 그립고 정이 그리워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사심 없이 친딸 친손녀 이상으로 대해 주셨다. 오히려 큰할머니는 속정이야 깊고 허허로웠지만 성격이 무뚝뚝하신 편이라 잔정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느거졌다. 서울서 대학 다니던 외삼촌은 방학 때 집에 와도 친어머니인 작은할머니한테 살갑게 대하지 않고, 괜히 툴툴거리고 했던 걸로 기억이 된다. 작은할머니는 아들한테 고양이 앞에 쥐였다. 꼼짝달싹 못했다. 큰어머니 눈치가 보여서 그랬을까? 외삼촌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두 분 모두 아들에게만은 지극정성이었다. 큰할머니는 친딸들이 서운해 할 정도로 아들사랑이 깊었다. 어쩔 수 없는 조선식 남아선호였다. 요즘은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판이해진 상황이 다행스럽다. 작은할머니는 취학 통지서를 받고 학교에 가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던 나를 보내며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며칠 전부터 목 놓아 울어서 나도 같이 울었으니, 온통 눈물바다였다. 춥다고 목도리를 몇 번이고 꼭꼭 싸매 주며, 잘 가라고 슬픈 눈물 철철 흘리던 할머니. 나도 너무 서운하고 서러워 집에도 가기 싫고 학교도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만 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정답게 잘해주던 할머니가 새록새록 생각나 많이 울었다. 집에서는 손이 가야하는 형제가 많았으니, 오로지 나 하나만을 꽃이다 싶게, 알뜰살뜰 보살펴주던 할머니와 같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밤이면 누워서 할머니가 주신 할머니 냄새가 밴 거울 달린 목걸이를 만지며 그리운 마음을 달랬다. 변비에 걸려 변을 보지 못해 힘들어 할 때, 낮이 지나고 컴컴해 질 무렵 뒷간 앞에 앉으라고 하고는 ‘응하고 힘을 많이 줘라’ 그러면 손으로 변을 파내 보겠다고 했던 말, 나는 힘주고 할머니는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싸매고 빼보려고 했지만 그날 손수건은 버리지 못한 일조차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눈물 많고 정 많았던 작은할머니,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 이제 두 분 다 돌아가신지 오래다. 큰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따라가셨다. 남편 없이는 살았어도, 믿고 따랐던 큰할머니가 안 계시자 의지가지가 없어 바로 따라 가신 것 같다. 그렇게 그립고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살다보니, 다 잊은 듯이 살았다. 그러나 가슴 한 켠에 새록새록 숨어있는 그리움이야 어딜 가랴. 얼마 전 할머니 산소에 다녀왔다. 외삼촌이 각각이던 산소를 합장하여, 잘 모셔놓았다. “죄송해요 할머니! 사랑해요. 용서하세요. 그땐 너무 어려서 고마운 게 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보살펴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할머니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할머니! 할머니!” 살아서는 못했던 말을 하고 왔다. 푸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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