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책이나 텔레비전, 영화에 의학 수련 과정이나 병원 세계가 종종 등장한다. 별 의미 없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묘사하는 경우도 많다. 의사들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보이기를 바라는지에 관한 글들도 많다. 그러나 의학의 감정적 측면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의학 세계는 사람들에게 흥미와 함께 염려의 감정을 갖게 하는 분야다. 그리고 누구든 이 세계와 마주칠 날이 찾아온다. 대중의 의학에 대한 관심 속에는 의료 체계가 이상적으로 기능하지 않고 있다는 좌절감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사회적인 압력, 입법을 통한 개선, 사법적인 공방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은 대중의 이상에 충분히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의사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의학의 지적인 측면 아래까지 파고 들어가 볼 생각이다. ‘나를 낫게 해주면 그만이지, 의사의 기분 같은 건 별로 관심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복잡하지 않은 질병의 경우에는 타당할 수 있는 얘기다. 의사들은 화가 나고, 신경이 예민하고, 질투에 사로잡히고, 지치고, 공포나 수치심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기관지염이나 발목 염좌 정도는 손쉽게 치료해낸다. 문제는 임상 상황이 복잡하거나, 해결하기 어렵거나, 예기치 않은 합병증이 나타나거나, 의료 실수가 있거나, 심리적인 문제가 엉켜있을 때 발생한다. 이럴 때는 임상적으로 유능한지 여부와 관계없이 변수가 작동할 수 있다. 세상이 많이 변해서 이제는 환자들 누구나 의사들이 활용하는 의학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그렇다. 웹엠디 WebMD 에서 기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고, 펍메드 PubMed 에서 최신 연구결과를 찾을 수도 있다. 의학 교과서나 학술지를 온라인으로 찾아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건 의사들이 이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그 점이 환자에게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이어져왔다. 제롬 그루프먼 Jerome Groopman 은 그의 책 《How Dcotors Think》에서 의사들이 진단하고 치료할 때 사용하는 다양한 스타일과 전략을 탐구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고찰하였다. 그는 의사들이 질병을 이해하고 처치하는 방식에 대해 연구하였고, 감정이 의사의 사고 思考 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때때로 환자에게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다수 의료 실수는 사고를 잘못해서 생기는데, 그 중 일부는 감정이 그 원인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며, 대부분은 자신에게 그런 감정이 있었는지조차 모른다.”1 여러 연구들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2 긍정적인 감정은 상황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말하자면 ‘숲을 보는 것이다.’ 이 감정은 문제를 풀어가는 융통성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반대로 부정적인 감정은 큰 그림보다는 작고 세부적인 면을 더 들여다보게 만든다. 말하자면 ‘나무 하나하나를 보는 것이다.’ 인지심리학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 부정적인 감정에 지배되는 상태에서는 앵커링 편향 anchoring bias 에 더 취약하다고 한다. 한 가지 세부사항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요소들을 놓치는 것이다. 앵커링 편향은 의료 실수의 강력한 원인이며, 의사들이 처음 든 생각을 고수하는 바람에 모순을 보이는 데이터를 깊이 생각하지 않게 만든다. 긍정적인 감정 상태라고 해서 편향을 피해가는 것은 아니다. 귀인 편향에 치우칠 우려가 있다. 의학에서 이 편향은 질병의 원인을 환자가 어떤 사람인가로 (이를테면 마약사용자라든지) 돌리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상황에 대해서는 (세균에 노출된다든지하는) 덜 주목하게 된다. 긍정적인 감정이 부정적인 감정보다 좋거나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양쪽 모두 정상적인 사람들이 가지는 감정 스펙트럼이다. 그러나 환자들을 대하면서 (유전자 검사, 일반 검진, 침습적 시술, 중환자실 모니터링, 말기 의료결정 등의 상황에서) 의사들이 겪는 인지적인 영역을 생각해보면, 의사의 감정 상태가 최종 결과에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신경과학자인 안토니오 다마지오 Antonio Damasio 는 감정을 ‘우리 마음속에서 계속 연주되는 음악, 멈출 수 없는 흥얼거림’ 같은 것이라고 묘사했다.3 의사가 의학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중에도 감정의 저음 연주가 계속 이어진다. 감정이라는 베이스 파트는 의사가 하는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그리고 그 감정이 환자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그리고 나 같은 의사들이 환자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는?) 이런 질문이 내 흥미를 끌었다. 이제는 의학의 중심에 있는 선배 의사들도 감정이 의료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감정 안에는 스트레스나 피로 같은 것들까지 뭉뚱그려져 있다. 그리고 ‘자기훈련이 충분한 의사는 이런 걱정거리들을 다 극복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가정까지도 그 아래에 깔려 있다. 그러나 의학의 감정적인 층위는 사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다양하게 작용한다. 사실상 감정이 의학적 의사결정의 지배적인 요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거 중심 의학이나 임상 알고리듬, 질적 관리를 위한 조치, 심지어 의학적 경험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다. 의사들이 감정적으로 복잡하다고 해 봐야 회계사나 배관공, 유선방송 수리기사 정도 아니겠느냐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사의 행동이 만들어내는 결과의 총합은 논리적, 정서적, 불합리한 행동 등 환자들, 아니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생사를 가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의사들은 누구나 자신과 환자를 위해 탁월한 의료를 원한다. 사람들은 보통 최선의 수련을 받고, 경험도 많고, <U.S. News & World Report>에서 순위가 높은 의사들이 최선의 진료를 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변의 감정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결과 때문에, 이 모든 요인이 중요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데도 불구하고, 의사들이 꽤나 감정이 없다는 종래의 고정관념은 여전하다. 이런 관념의 유래를 따지는 사람들은 캐나다 출신의 저명한 의사 윌리엄 오슬러 경을 떠올린다. 오슬러는 현대의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인물인데, 의대생들을 재미없는 강의실에서 빨리 끌어내서 실제로 환자를 검진하며 의학을 배우게 해야 한다고 처음 제안한 인물이다. 임상 수련이나 레지던트 수련 같은 현재의 교육시스템은 대개 오슬러의 아이디어로부터 나온 것이다. 1889년 5월 1일, 오슬러는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평정심 aequanimitas 4 ’이라는, 이제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개념을 주제로 졸업 축사를 했다. 그는 새내기 의사들에게 ‘일정한 정도의 무감각 insensibility 은 장점일 뿐만 아리나 냉정한 판단을 위한 필수요건’이라고 강조했다. 심장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지만, 의사들이 냉정하다는 고정관념 역시 이 평정심으로부터 나왔다. 대중문화에서도 이런 상징을 구현하고 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벤 케이시 Ben Casey >나 <하우스 House >에 등장하는 의사들은 환자로부터 초연한 태도, 기술과 진단에서 보여주는 명민함 같은 자질 때문에 칭송받는다. <애로우스미스 Arrowsmith > <미들마치 Middlemarch > <커팅 포 스톤 Cutting for Stone >에는 의사들이 사심 없는 이상주의자로 그려지고, <매시 MASH> <하우스 오브 갓 House of God > <스크럽스 Scrubs >에는 비꼬는 스타일의 의사들이 나오는데, 이들 역시 환자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평정심을 발휘한다. 병원들은 사명문에 연민 compassion 이라는 단어를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집어넣는다. 의과대학에서도 ‘돌봄의 이상’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제 의학수련 현장에서 은연중에 듣게 되는, 가끔은 말로도 하는 메시지 중 하나는 ‘의사는 절대 자기 환자에게 감정적으로 연결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주 듣는 말도 ‘감정이 판단을 흐릴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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