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서문 이 책은 2008~2011년 시카고 로욜라대학교 철학과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와 라캉의 구조주의 논쟁』1)을 번역?보완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루이 알튀세르와 자크 라캉의 논쟁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핵심 메커니즘을 고찰한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뛰어난 프랑스 이론가들 사이에서 서로 어깨를 겨룬 이 두 사람의 이론적 수렴과 발산은 말 그대로 프로이트-맑스주의 역사의 중요한 한 국면을 규정했다. 1960년대 초 서로 동맹을 맺었을 때, 이들은 구조와 주체라는 질문을 공유하면서 맑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 사이에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드는 결정적인 일보를 내딛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동맹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는데, 라캉은 곧 자신의 세미나(1968~69년)에서 알튀세르를 공개적으로 실명 비판하고, 알튀세르는 1976년의 에세이(「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에서 라캉의 이론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라캉의 전기를 쓴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는 알튀세르와 라캉의 입장 차이를 이렇게 묘사한다. “라캉은 알튀세르와 정반대로 나아갔다. 라캉이 상징적 기능이라는 레비-스트로스의 관념에 항상 새로운 애착을 보였다면, 알튀세르는 모든 친족적 상징성에서 탈출함으로써만 정초적 행위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라캉은 반대로 이런 탈출이 진정 논리적 담론을 생산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담론은 정신증에 의해 침범당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줬다.”2) 많은 독자들은 이 구절 앞에서 당혹스러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제시된 두 이론가의 이미지는 독자들이 보통 옳다고 믿는 것과 정반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알튀세르는 주체가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어떤 기회도 불허한 고집스러운 구조주의자로 비쳐지는 반면, 라캉은 이런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한 진정한 비판가, 곧 ‘실재’의 환원 불가능한 차원을 강조함으로써 어떻게 주체가 상징적 질서 전체를 전복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보여준 이론가로 비쳐진다. 물론 이런 독자들의 이해를 일반인들의 아무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실제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1970)을 출판하자마자 곧바로 구조주의자 또는 기능주의자라고 비판받기 시작했다. 이런 비판이 마침내 그 이론적 무게와 토대를 확보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슬라보예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발표해 그 타당성을 나름대로 논증해보였을 때였는데, 지젝은 정확히 알튀세르와 라캉의 비교를 통해 이를 달성했다. 출판된 지 20년이 훨씬 넘었지만, 지젝의 저 책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학문 공동체들이 알튀세르와 라캉을 이해하는 방식을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 이안 파커 같이 지젝에 동조하지 않는 비판가조차 알튀세르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타당하며 라캉 자신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한다는 생각을 기꺼이 수용한다.3) 그렇다면 루디네스코는 단순히 실수를 범한 것일까? 그러나 훨씬 더 최근에 사토 요시유키는 루디네스코와 유사한 주장을 펼친다. 즉, 1960~70년대 프랑스에서 벌어진 주체에 대한 논쟁에서 가장 완고하게 구조주의의 입장을 취했던 것은 오히려 라캉이며 알튀세르, (후기)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의 이론화 작업은 모두 라캉의 이런 입장과 거리를 두기 위한 다양한 시도였다고 단언한 것이다. 사토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라캉의 이론은 상징적 구조에 대해 주체가 ‘절대적 수동성’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4) 그렇다면 우리는 알튀세르와 라캉에 대해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이미지야말로 단순한 오해라고 여겨야 하는 것일까? 나는 정통 구조주의의 입장을 좀 더 완강하게 견지했던 것은 알튀세르가 아니라 라캉이라는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이 두 이론가의 이견뿐만 아니라 동의의 지점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바꿔 말해서, 구조주의라는 것 자체는 하나의 통일된 학파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알튀세르와 라캉이 구조주의와 맺었던 관계도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주체라는 범주를 ‘구성하는 위치’에서 ‘구성되는 위치’로 옮겨 놓으려 했던 한에서 그 두 사람은 모두 훌륭한 구조주의자였다.5) 그들은 (주체의 능동성과 자율성까지 포함해) 주체의 범주를 단순하게 무효화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설명’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주체가 어떤 과정과 메커니즘을 통해, 구조에 특정한 방식으로 의존하면서도 여전히 스스로를 자율적이라고 인지하는 존재로 구성되는지 검토했다. 이렇게 그들의 공통 관심사를 분명히 윤곽 지은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알튀세르와 라캉이 각자의 이론화 작업에서 감행했던 상이한 선택지들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제1장에서는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제시한 알튀세르-라캉 논쟁 해석을 재검토할 것이다. 지젝은 주로 라캉의 욕망 그래프 안에 설치된 두 층(수준) 사이의 차이에 준거해 알튀세르-라캉 논쟁을 분석한다. 요컨대 지젝은 욕망 그래프의 아래층(1층)이 상징계의 확립을 설명한다면, 위층(2층)은 그런 상징계가 어떻게 실재에 의해 관통되는지, 구멍 뚫리게 되는지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르가 상징계 안에서 주체의 ‘소외’가 일어나는 아래층에 논의를 한정하는 반면, 라캉은 그 위에 한 층을 더 추가해 실재(주이상스)의 차원을 도입하고 상징 그 자체로부터 주체의 ‘분리’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보여준다는 식이다. 나는 지젝의 이런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욕망 그래프의 아래층이 (상징계가 아닌) 상상계를 도식화하고 위층이야말로 상징계를 도식화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지젝의 오해는 라캉이 모든 주의를 기울여 구분한 두 종류의 상징을 혼동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곧 상상적 시기에 ‘미리 도착해 있는 상징’(아래층에 도입되는 모성적인 상징적 질서)과 ‘고유한 의미의 상징’(위층에서 상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는 순수 상징으로서의 부성적인 상징적 질서)이 그것이다. 이 둘을 혼동함으로써 지젝은, 라캉의 ‘분리’라는 개념이 단지 대타자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며 이런 분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아버지의 은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된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놓치게 되는데, 결국 지젝의 이런 체계적인 오해야말로 상징의 절대적 필연성을 주장했던 라캉의 구조주의에 대한 알튀세르의 비판을 인지 불가능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제2장에서는 라캉의 이론적 발전의 시기 구분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이 시기 구분이 중요한 까닭은, 라캉이 ‘아버지-의-이름’이라는 개념을 이론화하면서 상징의 절대적 중요성을 주장했던 초기(또는 초?중기)와 달리 후기에는 실재의 차원에 초점을 맞춘다는 지젝과 또 다른 이들의 주장 때문이다. 나는 ‘후기 라캉’의 시기가 이들의 주장처럼 1950년대 말(『세미나 7: 정신분석학의 윤리』) 또는 늦어도 1960년대 초(『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인 1970년대 초(『세미나 20: 앙코르』)에 이르러서야 시작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처럼 시기 구분을 어떻게 잡는가에 따라 알튀세르-라캉 논쟁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까닭은 양자의 논쟁이 바로 1960년대 후반에 집중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단절이 일어났다고 가정할 경우, 상징의 중심성을 옹호했던 1960년대의 라캉은 여전히 구조주의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알튀세르는 바로 이런 라캉의 입장에 비판적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나는 제2장에서, 1970년대에 일어난 라캉의 이론적 변화는 결국 과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을 포기하고 (생톰le sinthome에 대한 논의로 대표되는) 포스트-정신분석학으로 나아가는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제3장에서는 알튀세르와 라캉이 1960년대 후반에 서로를 비판했던 텍스트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논쟁의 요점이 지젝이 이해한 것과는 크게 달랐다는 점을 밝혀낼 것이다. 실제 쟁점은 주체가 구조에서 분리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형성이 경제나 정치 같은 다른 사회적 실천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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