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가을 1 헤르만은 고개를 들어 나무를 빤히 올려다봤다.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나뭇잎들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축 늘어져 있었다. 검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서 있자니 헤르만은 조금 어지러웠다. 마치 자기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기분은 무척 좋았다. 어쨌든 잠시 동안은 그랬다. 모놀리트{{) 프로그네르 공원에 있는 구스타브 비겔란의 조각 작품. 높이 17.3미터의 화강암에 노인부터 유아까지 121명의 남녀노소가 서로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 같은 데 부딪히지만 않는다면. 헤르만은 눈을 감았다. 그러고 있다가 막 넘어지려는 순간 얼른 눈을 떠서 위기를 모면했다. 헤르만은 아직 프로그네르 공원 안에 있었다. 아까부터 1센티미터도 움직이지 않고서. 그리고 그때, 헤르만은 나뭇잎이 흔들리며 떨어지는 것을 봤다. 가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그 잎은 바람에 날려 빙빙 돌다가 분수 쪽으로 상처 입은 피리새처럼 날아갔다. 헤르만은 이리저리 떠다니는 빨간 점을 눈으로 좇으면서 뒤따라 달렸다. 나뭇잎이 바람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움직였다. 헤르만은 자갈밭을 지그재그로 달리면서 오늘 아침에 신발 끈을 두 번 매듭지어 단단히 묶었기를 바랐다. 나뭇잎이 포기한 건지 바람이 포기한 건지, 곧 나뭇잎이 힘없이 아래로, 헤르만 바로 앞으로 떨어졌다. 헤르만은 갑자기 멈춰 서서 입을 쫙 벌리고는 굶주린 개미핥기처럼 나뭇잎을 받아먹었다. 바로 그 순간, 헤르만은 누군가 자기를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석상 뒤에 누군가 있었다. 석상 뒤로 삐죽 튀어나온 분홍색 책가방이 보였다. 헤르만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 있었다. 나뭇잎 맛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헤르만은 더 고약한 것도 맛본 적이 있었다. 초콜릿 푸딩의 딱딱한 겉껍질이라든가, 우유의 막이라든가, 아빠가 부두에서 잡은 뱀장어라든가, 뭐 그런 것들. 갑자기 책가방이 사라졌다. 하지만 헤르만은 아직 거기에, 그 머리카락에 적어도 아이들 열여섯 명은 매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여자 석상 뒤에 누군가 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던 헤르만은 나뭇잎을 꿀꺽 삼켜버렸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커다란 나무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이 지금은 자기 뱃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이따가 밥 먹을 때 야채는 안 먹어도 되겠지?' 그때 석상 뒤에 있던 사람이 나왔다. 루비였다. 같은 반의 루비. 루비가 내내 석상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헤르만은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루비는 빨강 머리에 머리숱이 많아서 그 머리카락 속에 새집이 다섯 개는 들어앉아 있다고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루비는 무슨 큰 비밀이라도 숨기고 있는 듯 두 손을 등 뒤에 감추고 있었다. 루비가 한쪽 눈을 반쯤 감고서 이상한 표정으로 헤르만을 바라봤다. "너, 나뭇잎도 먹니?" "가끔." "나뭇잎을 먹는 사람은 처음 봐." "사람을 많이 못 만나봤구나." 헤르만은 벤치 곁에 두었던 책가방을 집어 들었다. 루비가 뒤따라오더니 헤르만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날 따라오는 거야?" 헤르만의 물음에 루비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나뭇잎들이 더 많이 떨어졌다. "내가 당근이랑 소시지를 먹이는 오리가 있어. 그런데 너, 어쩌면 배가 아파질지도 몰라. 벌써 아파 보여." "난 갓 잡은 물고기처럼 팔팔해." 이 말은 헤르만의 할아버지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걷지도 못하고, 4층에 있는 집에서 캐노피가 달린 침대에 누워만 있으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물고기는 나뭇잎을 먹지 않아." "물고기는 지렁이를 먹지. 그건 더 끔찍해." 둘은 함께 다리 위를 걸었다. 술 취한 남자 하나가 신나타겐{{) 구스타브 비겔란이 화난 남자아이의 모습을 조각한 석상. }} 아래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석상처럼 성난 얼굴이었다. 물을 뺀 프로그네르 수영장에는 푸른 이끼가 끼어 있었고, 10미터 높이의 다이빙대가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었다.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다리 밑에서는 오리들이 서로 맴돌기만 하면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고니 한 마리가 날개를 펴다가 날기가 귀찮아졌는지 다시 날개를 접었다. 루비가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서서 아래를 가리켰다. "저게 내 오리야." "네 오리라고?" "내가 늘 먹이를 주는 오리야." "네 오리를 어떻게 알아보는데?" 루비가 헤르만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커다랗고 빨간 머리가 흔들렸지만, 거기에서 새들이 날아오르지는 않았다. "말 안 해줄래." 하지만 곧 루비는 재빨리 덧붙였다. "나중에 말해줄게." 둘은 아무 말 없이 공원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시르셰 길에 이르자 루비가 헤르만한테 다가오더니 아주 오랫동안 헤르만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헤르만은 불안해졌다. "지금도 내가 아파 보여?" "너, 눈이 완전히 초록색이야. 코는 오렌지색이고!" 루비는 이 말을 남기고는 마요르스투아 쪽으로 뛰어갔다. 오스카르 마티센 석상 앞에서 루비가 돌아서서 손을 흔들었지만 헤르만은 보지 못했다. 헤르만은 이미 실레벡크 길로 접어든 뒤였다. 헤르만은 이제 진짜로 몸이 안 좋은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병이 나는 게 아닐까? 팔이 나뭇가지로 변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겨울이 왔을 때 누가 땔감으로 쓰려고 자기를 베어 갈지도 모른다. 헤르만은 뱃속에 비스듬히 놓여서 간질거리는 나뭇잎이 느껴졌다. 벌써 팔이 뻣뻣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팔을 몸에 꼭 붙이고 있어야 했다. 헤르만은 뷔그되위 거리에서 미용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봤다. 그 거울은 몸을 앞으로 숙이고 고개를 돌리면 옆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제 헤르만은 정말 겁이 났다. 자기 모습이 낯설었다. 코는 솔방울 같고, 귀는 딱따구리가 쪼아놓은 구멍 같고, 앞머리는 연녹색 이끼 같았다. 헤르만은 뚱보 미용사 아저씨가 자기를 발견하기 전에 얼른 도망쳐 문간에 숨었다. 그런 다음 헤르만은 결심했다. 헤르만은 아빠가 일요일에 가끔 그러듯이 목구멍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뱃속에 들어 있는 나뭇잎에 손이 닿을 정도로 손가락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러자 입에서 나뭇잎이 엄청난 속도로 튀어나왔다. 쉬는 시간에 먹은 빵이랑 학교 가는 길에 주워 먹은 캐러멜 두 개랑 같이. 나뭇잎은 아직도 빨간색이었는데, 운동화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났다. 나뭇잎이 한바탕 휘몰아친 바람에 떠밀려 도랑을 따라 굴러가다가 배수구 사이로 사라졌다. 헤르만은 일어섰다. 벌써 속이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캐러멜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르만은 캐러멜을 다시 집어 먹을까 하고 잠깐 고민했다. 결국 헤르만은 캐러멜을 집어 먹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벨 거리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헤르만은 소리쳤다. "나무 세 그루 더하기 나무 세 그루는 숲이다!" 그런데 나무 한 그루 곱하기 나무 한 그루는 무엇일까? 틀림없이 아주 쓸쓸한 숲일 것이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헤르만은 계속 느긋하게 걸어갔다. 집 앞쪽 길로 접어들었을 때, '술병 아저씨'가 1층 창문을 열어젖히고는 얼굴을 내밀었다. 얼굴빛이 불그죽죽하고, 볼은 홀쭉했다. 예전에 술병 아저씨는 드람멘스 거리에 있는 '킹' 호텔의 지배인이었는데, 그 호텔에서 묵게 된 벨기에 공주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쫓겨났다고 한다. 술병 아저씨가 실제로 스웨덴 사람이라는 것을 호텔 주인이 알게 되어 쫓겨났다는 말도 있었다. 술병 아저씨는 어떤 날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어떤 날은 아주 조용했다. 오늘은 아주 조용했는데 월요일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꼬마야, 이리 와봐." 술병 아저씨가 소곤소곤 말했다. 들릴락 말락 할 정도로. 헤르만은 가까이 다가갔다. "나 대신 술병들 돌려주고 돈 좀 받아다줄래?" "시간 없다는데요? 내일은 시간이 날지도 모르겠대요." "내일은 내일이고." 술병 아저씨는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살며시 창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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