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발간사(發刊辭) 자호재(自好齋) 이택징(李澤徵)은 1715년(숙종 41) 7월 16일 강릉 홍제리에서 태어나 1782년(정 조 6) 7월 22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1782년 5월 공조참의(工曹參議)였던 공께서는 정조 임금이 가 뭄을 근심하여 구언(求言)했을 때, 자연재해는 헛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부르게 된 이유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대신(大臣)이 직접 먼저 대전(大殿)에 문후하고 중전(中殿, 孝懿王后)에 문후 하지 않으니 군부(君父)는 있으나 국모(國母)는 없다는 것이고, 국정의 중요한 일이 규장각(奎章閣) 의 신하를 중심으로 처리되는 것 등 때문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 조정 대신들은 연명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공을 처벌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나 정조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 지평(持平) 이유백(李有白)이 공을 옹호하는 상소에서 중전(中殿) 의 문후 철폐를 더욱 강경하게 말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같은 해 7월 22일에 이유백 등과 함께 역적으로 몰려 극형에 처해졌다. 그후 1801년(순조 1)에 신원(伸寃)되고 복관(復官)되었다. 자호재이공문집(自好齋李公文集)은 공의 종현손(從玄孫)인 발영(發榮)이 1887년(고종 24)에 편집, 간행하였는데, 모두 2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 중 시(詩)는 분량은 많지 않 으나 공의 시는 건실하고 화려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서(書)는 동료들과 시사(時事)에 관하여 논한 것이 많다. 계사(啓辭)는 심언광의 후손인 심상현(沈尙顯)이 하남영당(河南影堂)을 중 건하고 서원을 창건하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향토문화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애로점은 문헌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이유는 기존의 문헌자료에서 지방 관계 기사가 거의 검색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역사 연구에 흔히 이용하는 관찬(官撰)의 연대기(年代記)나 법전, 문집류들의 대부분이 지배층 혹은 중앙 중심적인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어 지방사와 연관된 자료는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향토사 연구의 주된 분야가 이러한 문헌자료가 검출되지 않아도 가능한 분야 즉, 민속 이나 구전(口傳)ㆍ민담(民譚), 설화, 그리고 고고학 및 미술사 관련 유적ㆍ유물의 확인 등에 집중되 어 왔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과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관찬적(官撰的)ㆍ중앙중심적 문헌자료의 한계 를 극복할 수 있는 보다 확실하고 생생한 지방과 지방민의 기록물들도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다. 이 제까지 향토사 연구의 영역에서 거의 등한시되어 왔던 자호재이공문집은 지방 혹은 지방민과 직접 관계있는 기록이라는 점, 전제한 문헌자료들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다는 점 등 에서 매우 주목된다. 그러나 공의 시문(詩文)이 담겨 있는 자호재이공문집이 지금까지 번역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다 가 이번에 우리 강릉문화원에서 번역하게 되었다. 국역 자호재이공문집은 번역과 아울러 관련 기사 에 대한 주석 작업도 하여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바라건대 많은 노력 끝에 이룩된 이 책이 강릉 시민은 물론이고, 인근 대학에도 널리 보급되어 조선후기 강릉지방의 향촌사회를 연구하는 데 좋은 양서(良書)가 되었으면 하는 바이다.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열의를 가지고 번역해주신 박도식(朴道植) 교수님께 깊은 애정을 느끼며, 아 울러 감수에 정성을 다해 주신 송수환(宋洙煥) 교수님께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책이 출간될 수 있 도록 도와주신 최명희(崔明熙) 강릉시장님과 김화묵(金華默) 강릉시의회 의장님께 감사를 드린다. 2013년 12월 江陵文化院長 廉 敦 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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