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서 문 1979년 1월 중순, 우연히 방문한 파리 근교 프레테 마을의 문신 아틀리에는 충격의 현장 그 자체였다. 농가 야채 창고를 개조한 아틀리에에 들어서는 순간 산더미 같은 온갖 작업 공구와 방 안이 빽빽할 정도의 완성·미완성 작품들과 각종 너저분한 물건들이 잡동사니처럼 쌓여 있어 사람이 움직일 공간조차 없었다. 식사를 해 먹는 국솥과 끊이다 만 각종 동물 뼈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수많은 친필 원고들이 쌓여 있었다. 친필 원고에는 문신의 치열한 작업 정신과 자기 다짐, 외국 생활을 하면서 겪은 애환과 잊을 수 없는 고향산천과 헤어져 있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이 배어 있었다. 수많은 친필 원고들을 한 장씩 읽어 내려가다 “내가 남모르게 울어야 할 일이 있다면 한때나마 자기 나라에서 작업을 하지 못하고, 현재도 남의 나라에서 제작 생활을 소모하고 있는 이것뿐이다”라는 부분에 망연자실했던 게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무엇보다 정신없이 원고지를 넘기다 친필 원고더미 속에 빛바랜 태극기를 발견하고 ‘위대한 한국인 문신의 이국에서의 쓰라린 처지’가 안타까워 소리 없이 울었다. “왜 이렇게 쌓아 두고 있는 건가요?”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내가 이국에서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신세잖소. 만약 내가 죽으면 한국인 누구라도 이 원고들을 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문신이 어떻게 세계 화단에서 몸부림을 쳤는지 알려질 게 아니오”라는 말씀에 가슴 한 구석이 저려왔다. 이국에서 역경을 헤쳐나간 위대한 작가 문신의 치열한 작가정신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많은 주옥같은 친필 원고를 보면서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공부는 언제 이렇게 많이 하셨나요?” 그의 대답은 또 다시 나를 감동에 빠지게 했다. “1961년 라슬로 자보가 아카데미 뒤페의 회화 교수로 발령을 냈어요. 그런데 당시 회화를 배우던 미국인 등 외국인들이 ‘이름 없는 동양인에게 배울 수 없다’며 반발한 것에 충격을 받았어요. 오직 실력만이 내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수년간 밤을 새워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선생은 그때부터 창작 메모 등을 작성하는 데 습관을 붙이기 시작해 제작 일기를 작성하거나 국내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초고 본을 보관하거나, 자신이 언제 죽을 지도 몰라 항상 2부씩 작성해 보관했다고 하셨다. 친필 원고는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친필 원고를 통해 나는 선생이 매년 수많은 전시를 치렀다는 것을 알았다. 해마다 12~15회 정도 전시에 3~4점의 작품을 출품했다는 기록을 발견한 순간 나는 이 기록들에 적혀 있는 작품 사진들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자 선생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전시에 작품을 출품할 때 대형 작품들은 석고나 폴리에스테르로 만들었기 때문에 판매할 수가 없었어요. 보관 문제 등으로 파손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요. 대신 중간 크기와 소품 흑단 등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이란 등 세계 각국에 팔렸는데 정작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사람이 없어요. 1970년대 초반까지는 돈이 없어 작품 도록도 만들지 못하는 바람에 사진조차 없답니다”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마지막으로 선생은 “고향 마산에 미술관을 짓기 위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자신의 “자료를 정리해 달라”는 당부를 내게 하셨다. 나는 “고향에 돌아가 고향 땅에서 작업을 하면서 뼈를 묻고 싶다”는 선생의 간절한 염원을 이루어드리고 싶었다. 태극기를 간직한 채 이역만리에서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조국에 돌아가 고향의 황무지 야산에 미술관을 건립하겠다는 그의 불타는 개척 정신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일세의 대가’를 ‘예술적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기로 결심했다. 문신과 함께 잃어버린 문신 예술의 역사를 찾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초기 문신 예술 역사의 상당 부분이 소실된 상태였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우리에겐 문신 선생의 친필 원고가 있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 단 한 명의 한국인이라도 자신의 삶을 볼 거라는 기대로 남겨둔 엄청난 양의 친필 원고가 문신이라는 한 거장의 일대기를 피상적으로나마 복원해줄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망각의 역사 속에 함몰된 문신 예술 역사의 아픔은 그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수집·관리하면서 차츰차츰 치유될 수 있었다. 출생에서 사망까지, 그리고 사후에 세계 속에 예술한국의 빛으로 부활한 불멸의 거장 문신. 그의 삶과 예술은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단편적이거나 부정확하게 알려졌던 게 사실이다. 자료실에 보존되어 있는 친필원고 등 방대한 문신 예술 자료들을 볼 때마다 이것들을 언제 풀어 헤쳐 문신의 삶과 예술 세계가 제대로 조명을 받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세상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원했다. 문신 예술의 모든 것이 언젠가 부활할 거라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오랜 인고의 세월을 거쳐 베일에 가려져 있던 문신 육필 원고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이 문신 예술 및 현대예술을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작은 길잡이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거친 풍랑을 헤치며 달려온 문신 예술의 고난과 영광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이 책은 문신 예술을 연구하는 데 있어 튼튼한 뿌리가 될 것이 분명하다. 문신 육필 원고를 최초로 세상에 소개하는 이 책은 이역하늘에서 불멸의 거장 조각가로 자리 잡은 거장 문신의 인생역정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담겨 있다. 1970년 발카레스의 작업 현장에서 이라는 걸작으로 세계적인 조각가로 부상하는 전 과정과 1970년대 세계 화단의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그 어떤 자료보다도 귀중하게 다가온다. 책 곳곳에서 발견되는 예술가 문신의 해박한 경륜과 지식은 많은 독자들을 문신 예술이라는 심연의 늪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다. 아울러 그동안 설로만 떠돌던 예술의 수많은 비화들 중 상당 부분이 공개됨으로서 문신 예술 연구에 대한 기반 구축은 물론 한국 예술사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나는 소망한다. 생의 모든 의미와 삼라만상의 원리를 자신의 예술 용광로에 녹여 세계적인 작가로 떠오른 거장 문신의 치열한 예술혼과 업적이 이 책을 통해 제대로 평가받기를, 예술을 향한 자신의 투혼과 열정을 인정받기는커녕 반 문화 정책에 상처를 받아 예기치 않게 세상을 떠난 문신의 영전에 작게나마 위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디자인 &출판 스튜디오 미인과 이 책을 위해 관심을 아끼지 않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올린다. 2008년 12월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장 최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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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서문7 1 25 2 87 3 167 4 225 5 247 작가 연보 285 1| 작가의 바람 이곳은 겨울이면 시속 180킬로미터 이상의 돌풍이 불어 닥친다. 그런 만큼 작품이 세워질 장소를 선택하는게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나는 1969년부터 작품의 진열 및 배치를 도맡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작품도 이곳에 전시된다. 이번에 내 작품은 도로에 일렬로 배치되는 게 아니다. 바다와 도로 사이에 위치한 백사장에 원형으로 세워지기에 사람이 많이 지나가는 방향이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전에 한 바퀴가량 돌면서 미리 확인해두지 않는다면 뒤에 자리한 작품은 시야에서 벗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러 작가들이 참여하는 초대전에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좋은 위치에 놓이기를 원하는 법이다. 나는 이번에는 어느 장소에 내 작품이 세워져도 좋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번에 출품한 작품이 요코하마 때의 6미터에 비하면 높이가 거의 두 배가 넘기 때문에 어디에 세워 놓아도 눈에 잘 띌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주일 후면 모든 작가들이 전시장에서 작품을 제작해야 하는 까닭에 몇몇 작가들은 상당히 초조한 듯했다. 로시뉴와 모리엘이 사무실에서 설계도를 복사해서 가지고 왔다. 앞서 말했듯이 바다와 도로의 평행선 사이의 원형에다 15번까지 이어지는 번호가 적혀 있었다. 출입구 오른쪽 끝에 자리한 15번은 이미 모리엘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곳은 모리엘을 포함해 모두 7명이 선호하던 장소였다. 2| 조선소 아틀리에 S.E.M.E.T.A의 현장 사무실(조각 심포지엄 임시 사무처)을 찾아 작업이 이루어질 아틀리에 등 작업 현장을 둘러보았다. 조각 작품에 가장 중요한 목재를 문의하니 아프리카 가봉에서 목재를 싣고 오던 운반선이 발동기 고장으로 인해 며칠 지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다행히도 아틀리에는 숙소에서 500미터 지점에 있는 조선소 공장의 절반을 사용할 수 있어 10명 내외의 조각가들에게 한 명 당 약 800평방미터의 공간이 부여되어 만족할 만했다. 우리는 조선소 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의 시설과 우리가 작업할 공간을 구경했다. 사장은 우리를 위해 공장 안에 놓인 배들을 모조리 밖으로 옮기겠다고 약속하며 재미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속옷만 걸친 노인이 그의 둘째 아들(그는 지금 공장장으로 일하고 있다)을 찾아와 그림을 그릴 캔버스가 될 만한 몇 장의 합판을 요구했다고 한다. 물론 둘째 아들은 공장에 있는 합판 중 몇 장을 골라주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둘째 아들이 노인에게 합판을 빌려주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을 무렵 노인이 다시 찾아와 합판 조각과 자신이 그린 소품 한 점을 전해주고 갔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 달 후, 말쑥하게 차려 입은 한 신사가 오더니 지난 번 주었던 합판과 똑같은 것을 트럭에 잔뜩 싣고 와서 노인이 빌린 합판을 이것으로 사례하겠다고 말한 뒤, 대신 그가 준 그림을 돌려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는 것이다. 결국 사장의 둘째 아들은 합판 한 장을 빌려준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놀라움과 의심을 금치 못하며 그림을 돌려주었다. 3| 목조각의 참맛 이번 조각 심포지엄에서 나는 몇 가지를 느꼈다. 첫째, 체력적으로 10톤에 가까운 재료를 상대하기 버거운 여류 조각가들의 참가에 동정을 느낄 수 없었다. 몇몇은 끌을 가지고 오기도 했지만 워낙 단단한 재료 앞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다른 조각가의 손을 번갈아 가며 빌릴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조각가들은 둥근 끌을 사용하는데, 이것을 사용하면 둥근 끌이 만들어내는 마티에르를 통해 전통적인 목조각의 참맛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나는 끝이 직선이라야 끌의 끝이 나무의 표피에서 놀지 않고 작가가 생각한 그대로의 감촉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대작일수록 마티에르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크게 보아야 할 공간을 구획 짓기 위해, 그리고 면이 서로 교우하는 형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나는 언제나 칼끝이 직선으로 이루어진 끌을 즐겨 사용한다. 정리하자면 목재라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조각 재료를 사용하는 데 있어 단순화된 면의 상반된 성격과 통일감을 통해 합리적인 현대성을 구현하자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나무가 단단할수록 작가의 의도한 대로 끌 끝이 바로 파고들어가고 좀처럼 실수가 없는 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에 사용하게 된 단풍나무는 두드러진 마티에르를 취하지 않고, 미끈한 표면이 비바람을 잘 견뎌 만족스러웠다. 4| 피카소의 등대 발카레스의 서쪽에 위치한 바닷가에는 피카소의 〈등대〉라는 작품이 서 있다. 이것은 수년 전 피카소가 미국의 어느 항구 도시에서 의뢰 받아 만든 등대이자 작품인 〈마케트〉와 동일한 것으로, 발카레스측은 피카소의 허락을 받아 높이 30미터의 이 작품을 등대 대신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발카레스에 피카소의 작품이 세워진 것은 1969년부터 시작된 자블레 박물관Mus�e des Sables의 방침에서 기원한다.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리디아`Lydia에서부터 시작된 자블레 박물관의 전시 장소는 이후 북쪽으로 향하여 1킬로미터 길이로 상설화되었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진 길을 따라 반대편 해안까지 이르는 곳은 발카레스의 도시, 즉 백사장의 미술길 계획에 따라 여러 가지 시설과 올해(1971년) 열리는 조각 심포지엄에 참여하는 작품이 전시될 예정이다. 물론 앞으로 계속해서 열리게 될 조각 심포지엄에 참여하는 작품들이 피카소의 〈등대〉까지 계속해서 세워지게 된다. 수년 내에 있을 피카소의 등대 공사는 철근으로 구축될 예정이라고 한다. 중요한것은 이 공사의 관계자들이 작품의 기술적인 면을 감안해 이 작업을 나에게 맡기기로 했다는 것이다. 5| 끝없는 고통 이곳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나는 수시로 전기톱에 손목을 베었다. 다행히 차에 싣고 다니는 응급용 붕대로 감아 지혈을 했지만 작업실 곳곳에 피가 난자했다. 나는 상처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누구도 보는 사람도 없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마치 격렬한 전장에서 피를 쏟은 채 쓰러져가는 것을 전사를 보고 복수심에 불타 돌격하는 군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 나는 붕대를 맨 뒤 소음이 진동하는 전기톱을 마치 기관총을 잡듯 붙잡고 있다. 다음 날, 나를 본 사람들은 모두 팔목의 상처를 걱정했다. 병원에 가니 네 바늘을 꿰매고 8일 동안 망치를 들지 말라고 했다. 의사는 내가 조각 심포지엄에 참가한 작가라는 걸 이미 아는 눈치였다. 그래서일까. 의사는 치료비도 받지 않고(이곳에 있는 동안 나는 주최 측의 배려 덕분에 작품을 제작하는 기간 동안 생명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10일의 약까지 챙겨준 뒤 현관까지 따라 나와 부디 발카레스까지 조심스럽게 운전하라는 당부까지 했다. 병원을 다녀온 뒤 나는 내 작업실을 공장 내부에서 공장 옆 노천으로 옮겨줄 것을 희망했다. 며칠 후, 작가 모렐스가 조선소 사장의 아들과 몇 차례 갈등 끝에 작업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말했다. 바닷가에다, 리디아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승마 교습소 건물의 마당을 빌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나보고 함께 가자고 청했다. 나는 두 곳의 여러 환경을 고려한 후 그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6| 미술 올림픽 손목을 다쳐 병원에 다녀오고, 작업실을 옮기는 것은 국제전시나 심포지엄 기간 동안 작가들이 겪는 상황 중 한 예에 불과하다. 어떤 심포지엄에 가든지 여러 명의 작가들이 같은 공간에서, 주어진 예산 안에서 작품을 매끄럽게 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10미터 이상의 대작을 제작한다는 데 그나마 의의를 둘 수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노천으로 옮긴 작업실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작가들이 남보다 나은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미술의 올림픽’이라고 생각하며 감동에 빠졌다. 7| 15명의 작가를 선정하라 이번 조각 심포지엄에 참여한 작가들은 나무로 만든 조각 작품을 출품해야 한다. 아프리카 가봉에 벌목장을 갖고 있는 파리의 한 부호가 이번 조각 심포지엄을 위해 흑단목을 무상으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주최 측 역시 나…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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